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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때부터 성장한 두 신라의 거인 김춘추와 김유신>


선덕여왕 6년

정월(1월) 봄

이찬(신라 2등벼슬) 서진을

서불한(=이벌찬, 신라 1등벼슬)에 임명했습니다


(당대 신라에는 최고위직, 1등벼슬이 2가지가 있었다고

할 수 있는데

'관료'격인 이벌찬[서불한]과

'귀족들의 수장'격인 상대등 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기록에 상대등이 여럿 나오다가

이때부터 모처럼만에 이벌찬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는

선덕여왕이 귀족들에 대한 견제와

왕권 강화의 목적으로 중책을 귀족들의 대표직인 상대등이 아닌

자신의 영향력이 더 미칠 수 있는 관료직인 이벌찬에게

맡기게 된 거 같습니다)


7월 가을

알천을 대장군으로 임명했습니다


선덕여왕 7년

3월 봄

칠중성 남쪽에 있던 큰 돌이 저절로 35보 거리를 이동했습니다


9월 가을

노랑색의 꽃비가 내렸습니다


10월 겨울

고구려가 북쪽 변경의 칠중성을 침범했습니다

백성들이 놀라서 산골짜기로 들어갔습니다


선덕여왕이 대장군 알천에게 명령해서

이들을 안심시켜서 다시 모여살도록 했습니다


11월

알천이 고구려 군사와 칠중성 밖에서 싸워

승리했습니다

이 싸움에서 죽이거나 사로잡은 자가 매우 많았습니다


(아무리 당대 신라가 위기와 불안감속에서

하락세를 타고 있었다 해도

썩어도 준치, 부자가 망해도 3년 혹은 3대는 간다라는 말이

과연 당대의 신라라 할 수 있습니다

이미 신라는 체급 차이가 고구려,백제에 비해

커져있었다 할 수 있기에 더이상

옛날의 약소국도 아니었고 선덕여왕 당대에는

크게 휘청거리기도 했으나 하여튼 매우 강했기도 했습니다)


선덕여왕 8년

2월 봄

하슬라주를 북소경으로 만들었습니다

사찬 진주로 하여금 이 성을 수비하게 했습니다


7월 가을

동해의 물이 붉게 변하고 더워져서

고기가 죽었습니다


선덕여왕 9년

5월 여름

선덕여왕이 자제들을 당나라에 보내서

국학에 입학시켜 주기를 요청했습니다


이 때 (당나라 황제) 당태종은 천하의 유명한 학자들을 모아서

학관으로 임명하고

국자감에 자주 가서 그들에게 강론을 하게 했으며

학생들 가운데 '예기'나 '춘추좌씨전' 가운데

한가지 이상 능통한 자에게는 모두 관직을 주고

학사 1천 2백간을 증축하고 학생을 3천 2백 60명으로 증원했습니다


<당태종 이세민>천하의 인재들을 모두 모아라 !


<신라사신들>과연 당황제는

성명한 자로 불리고 있는 인물이구나 !


이리해서 사방의 학자들이 (당나라) 서울(수도)로 모였습니다


이 때

고구려, 백제, 고창(위구르 지역), 토번도

자제들을 보내서 입학시켰습니다

(당나라는 귀족적, 국제적 문화가 강했던 나라입니다)


선덕여왕 11년

정월(1월) 봄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서 특산물을 바쳤습니다


7월 가을

백제왕 의자(백제 마지막왕,백제 31대왕 의자왕 부여의자) 가

군사를 크게 일으켜서 (신라) 서쪽 지방의

40여 성을 공격해서 빼앗았고

8월에

다시 고구려와 공모해서 당항성 (경기도 화성시 쪽인데

당대 당항성은 오늘날 인천이라 비유 할 수 있는

국제 무역통로라 할 수 있습니다) 을 빼앗아서

당나라로 가는 길을 막고자 했습니다


선덕여왕이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서

당태종에게 급한 사실을 통보했습니다


이 달에 백제장군 윤충이 군사를 거느리고

대야성을 공격해서 점령했습니다


도독 都督 (주의 장관직) 이찬(신라 2등벼슬)

품석(김품석, 김춘추의 사위)과

사지 舍知 (신라 13등벼슬) 죽죽,용석 등이

이 싸움에서 전사했습니다


겨울에 선덕여왕이 백제를 공격해서

대야성의 패배를 보복하고자 했습니다


이를 위해서 이찬(신라 2등벼슬)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서 파견을 요청했습니다


애초에 대야성이 패했을때

도독 김품석의 아내(이름은 김고타소 입니다)가

여기서 죽었는데 그녀(고타소)는 김춘추의 딸이었습니다


김춘추는 이 소식을 듣고

온종일 기둥에 기대서서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사람이나 물체가 앞을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얼마후에


<김춘추>아아 !

대장부 大丈夫 가 어찌 백제를 삼키지 못하겠는가 !


(大丈夫 豈不能呑百濟乎 대장부 기불능탄백제호)


하고는 곧 선덕여왕에게 나아가서


<김춘추>명령을 내려 주신다면

제가 ! 고구려에 가서 군사의 파견을 요청하여

백제에 대한 원한을 갚기를 원하겠습니다 !


라고 말했습니다


<선덕여왕>윤허한다 !


선덕여왕은 이를 허락했습니다


고구려왕 고장(고장왕=보장왕으로 고구려 마지막왕,

고구려 28대왕 보장왕)은

원래 신라 김춘추에 대한 명성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보장왕)는 먼저 군사의 호위를 엄하게 한 뒤에

김춘추를 만났습니다


김춘추가 말했습니다


<김춘추>지금 백제가 무도하여

대악당(실제 원문은 위장사봉시 爲長蛇封豕

로 긴 뱀과 큰 돼지같이라고 해석할 수 있고

당대 욕이었을거 같습니다,,) 이 되어

우리국토를 침범했습니다

이제 우리(신라) 임금이 귀국(고구려)의 군사를 얻어

치욕을 씻고자 하여,


저를 보내어 하집사 下執事 (집안 아래의 집사일을 보는 사람인데

옛날엔 극진한 공손함의 표현으로 편지를 직접 보내지 않고

그집에 일하는 사람을 받는 사람으로 표기했다는

상당히 불편한 옛날식 예의라 할 수 있습니다) 에게

명령을 전하게 한 것입니다


고구려왕(보장왕)이 말했습니다


<보장왕>죽령은 본래 우리(고구려) 땅인데

너희들이 만약 죽령 서북땅을 돌려 준다면

군사를 파견할 수 있다


(일단 실권자인 연개소문 말대로도 해야겠으나

근데 왜 너네는 우리땅도 빼앗아 놓고

항상 피해자인 척만 하냐 ? ㅉㅉ )


춘추가 대답했습니다


<김춘추>(배째던가 ~ 사실 니네 도움 없이도 잘할수 있어)

제가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군사를 빌리고자 하여 왔으나

대왕께서는 이웃의 환난을 구원하여

이웃과 잘 지낼 뜻은 없고

다만 남의 나라 사신을 위협하여

땅을 돌려주기를 요구하니

저에게는 죽음이 있을 뿐

다른 것은 모르겠습니다


그(김춘추)의 말이 공손하지 않자

고장(고구려 보장왕)은 분노해서

그를 별관에 가두었습니다


<보장왕>김춘추가 감히 천하대국 天下大國

고구려에 공손한 모습을 보이지 않구나 !


<김춘추>(천하대국은 무슨, 이빨빠진 호랑이일 뿐이다),,


김춘추는 사람을 시켜서 비밀리에 본국(신라) 왕에게

이를 보고하도록 했습니다


<김유신>아아 ! 춘추공에게 무슨 일이 생겼구나 !


춘추공과 나는 한마음 한몸이다 !

당장 말발굽을 들어 고구려 왕궁을 짓밟겠다 !


선덕여왕은 대장군 김유신에게 명령해서

결사대 1만명을 거느리고 고구려로 가도록 했습니다


<선덕여왕>김유신 장군은 결사대 1만을 이끌고

고구려로 가서 김춘추를 구하라 !


김유신 장군이 군사를 이끌고 한강을 건너서

고구려의 남쪽 변경으로 들어가자


(상당히 빠른 대처로 매우 빠르게 북진해서

고구려를 위협했다 할 수 있기에

당대 신라의 국력의 강성함을 보여주는

기록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고구려왕이 이를 듣고

김춘추를 석방해서 돌려보냈습니다


(근데 김춘추의 거짓말을 믿고 보내줬다고도 하고

김유신 열전 기록과는 조금 다르고 이후

김유신 열전 이야기때 자세히 쓰겠습니다)


김유신을 압량주의 군주 軍主 로 임명했습니다


<라봉봉>선덕여왕때는 혼란의 시기기도 했으나

본격적으로 김춘추와 김유신이라는 두 신라의 거인들이

신라 사회에서 자리를 잡아가던 시기라 할 수 있고

이때부터 점점 두 인물들은 여왕을 보좌하며

신라의 실권을 장악해 가기 시작해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대 기록은 드라마틱한 사건들이 많은데

아마 이는 선덕여왕 그녀의 성향이 이런 드라마틱하거나

예술적인것, 장엄한 것을 좋아해서 그런게 아닐까 싶고

덕분에 비장하고 드라마틱한 이야기들은 있었으나

정잘 백성들의 삶과 내실적인 측면에서는 문제가 있었던

인물이라 할 수 도 있습니다


또 저가 생각하기로는 김유신 장군도 장군이미지 말고도

상당히 지식인적 모습이 있었다 할 수 있는 인물이고

김춘추라는 인물은 직업이 외교관이었기에

언어에 능했던 인물들이고 그래서인지 당대 기록된 언어들은

보통 기록과 다르게 꿈틀거리고 독특한 감이 있습니다


당대 선덕여왕이 원했던 것은


'당대 귀족들의 권한이 강해지는 것을 방지하고

자신을 호위할 충성스러운 신하가 필요했다'


라고 생각되는데

김춘추와 김유신 두 우정의 친구이자 두 거인들은

이런 선덕여왕의 의중을 파악하고

재빠르게 어려운 일들을 자처하며

선덕여왕을 호위하며 신라사회에서

'진골'이었던 김춘추 또 '가야계'였던 김유신은

점점 입지를 넓혀갔던 것으로 보이고


당대 김춘추와 김유신 역시 야심과 권력욕이 없었던

인물이라고 보기는 어려울거 같으나

적어도 정직하고 충직하며 영리한 신하들이었기에

선덕여왕 역시 두 인물들을 후원하며

여왕으로서의 위엄과 자신의 입지를

나타내려 했던 인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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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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