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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무왕의 공세에 위협을 느낀 신라 진평왕>


진평왕 49년

3월 봄

큰 바람이 불고 흙비가 내렸습니다

이러한 날씨가 닷새(5일) 동안 계속됬습니다


6월 여름

사신을 보내서 대당(당나라)에 조공했습니다


7월 가을

백제 장군 사걸이 서쪽 변경의 2성을 점령하고

남녀 3백여 명을 사로잡아 갔습니다


8월

서리가 내려서 곡식이 죽었습니다


10월 겨울

사신을 대 당나라에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라봉봉>신라인들이 당대 당나라의 도움이 급박해져서

일부로 당나라를 높여 당나라가 아니라 대당나라고

불렀던거 같고 점점 고구려,백제의 압박에

나중에는 신라 진덕여왕은 당나라 황제에게

직접 비단에 수를 놓아서

'치당태평송' 이라는 시까지 지어 바치는

눈물겨운 아부까지 합니다


진평왕은 재위를 오래했고 나름

안정적인 치세를 구가했으나

재위 말년으로 갈수록 내부적으로는 귀족들의 성장과

외부적으로는 백제의 격렬한 공세에

여러 위기가 있었다고 할 수 있고

특히나 백제의 공세가 매우 격렬해서

당대 신라인들의 위기감이 고조되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는데

당대 백제의 국왕은 서동대왕, 무왕이었고

무왕은 (특히나 신라인 입장에서는) 야심가에

카리스마가 강한 권위적 인물이자

유능했던 인물이라 백제인들을 통합하며

신라에 대한 공세를 시작했다고 할 수 있는데


[근데 무왕의 부인 선화공주가

진평왕의 딸인데도 장인의 나라고 뭐고 없습니다,,

또 이전에 신라 진흥왕 역시 백제 성왕의 딸과 혼인후 얼마후

장인 성왕의 목을 벴기에 그에 대한 백제의 똑같은

복수일 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신라가 선대로부터 이어진 튼튼한 내실과

한강유역 확보 이후부터 풍요로운 곡창지대 등을 얻었다고 해도

백제 역시 왜라는 우방세력과 더불어 사실상 왜는

백제의 영향권이었다고 할 수 있기에

인구력이 보통이 아니었던 백제였고

무왕이라는 인물이 백제를 통합하며 점점 안정을 찾고

신라는 반대로 점점 불안이 고조되던 시기라 할 수 있어서

저는 만약 백제에 무왕같은 인물이 계속 나왔다면

또 삼국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고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진평왕 50년

2월 봄

백제가 가잠성을 포위하자

진평왕이 군사를 보내서 격파했습니다


<진평왕>하,, 서동(무왕)이 이녀석한테

딸을 준 내가 잘못이지,,


<신라 장수들>전쟁엔 피도 눈물도 없는 법이죠

모두 쓸어버립시더 !


<진평왕>진정하라,, 이녀석 보통인물이 아니야,,


여름에 큰 가뭄이 들자

시장을 옮기고

용을 그려서 기우제를 지냈습니다

가을과 겨울에

백성들이 굶주림에 지쳐

자녀를 파는 일이 있었습니다,,


<신라의 *영웅 김유신의 등장>


(*영웅 英雄 지혜와 재능이 뛰어나고 용맹하여

보통 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을 해내는 사람)


진평왕 51년

8월 가을

진평왕이 대장군 김용춘(김용춘 = 김용수),

김서현(김무력 장군의 아들)과

부장군 김유신(김유신 장군은 한국사 위인이자 신라의 영웅이며

김서현 장군의 아들로 김무력,김서현,김유신 모두 장군으로

장군 집안입니다,,  이때 아버지를 따라 출전해서 공을 세웁니다)

을 보내서

고구려의 낭비성을 공격하게 했습니다

(신라 정점의 귀족들이라 할 수 있는

김용춘,김서현,김유신이 모두 출전한 거로 보아서

매우 중요한 고지였던거 같습니다)


고구려 사람들은 성 밖에 나와서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고구려 군사)들의 기세는 아주 드높았고

아군(신라군)은 이를 보고 겁을 내서

싸울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신라군 1>고구려애들이 그렇게 싸움을 잘한다면서 ?,,


<신라군 2>장난 아니래 ;;,,


김유신(당시 35세)은


<김유신>이대로는 안되겠다,,

우리 군사들은 들어라 !


나는


'옷깃을 잡고 흔들면 옷이 반듯해지고

그물의 꼭지(벼리 즉 그물 조정줄)를 쳐들면 그물이 펴진다'


라는 말을 들었다


내가 그물의 꼭지와 옷깃이 되겠다 !

(조정자, 핵심이 되겠다)


라고 말하며 즉시 말에 올라서 칼을 빼들고

적진(고구려 진영)을 향하여 곧장 돌진했습니다


세 번을 적진 속에 들어갔다 나오면서

그 때마다 적장의 목을 베거나 깃대를 뽑아왔습니다


<고구려군들>;;;;;


<김유신>보라 !

고구려는 이빨없는 호랑이이다 모두 돌격하라 !


그러자 신라 군사들이 기세를 올리며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면서 진격해서

5천여 명을 목베어 죽였습니다


낭비성이 항복했습니다


9월

사신을 대당나라에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진평왕 53년

2월 봄

흰 개가 대궐의 담장 위에 올라갔습니다


5월  여름

이찬(신라 2등벼슬) 칠숙과 아찬(신라 6등벼슬) 석품이

반역을 도모했습니다


진평왕이 이를 알고

칠숙을 잡아서

동쪽 시장에서 참수하고

구족 九族 (중요한 관계에 있다고 분류된 아홉범주의 친족인데

즉 가족과 친척을 뜻하는 말로 보면 됩니다) 을 처형했습니다


아찬 석품은 백제국경까지 도망했으나

처자(부인과 자식)가 보고싶어서

낮에는 숨고 밤이면 걸어서

총산까지 돌아왔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나무꾼 한 사람을 만나서

그의 헤어진 옷과 바꾸어 입은채

나무를 지고 몰래 집에 돌아왔으나

곧 체포되서 처형당했습니다


(진평왕 말기가 진평왕이 고령으로 접어들며

쇠약해지고 신라 귀족들의 성장, 백제의 큰 위협이 있었다 해도

진평왕대 신라는 그럼에도 강성할 때였고

신라 말기같이 왕들이 대거로 자주 바뀌고

국가재정이 파탄나고 지방 호족들이 들고 일어나서

귀족들을 견제하지 못하는 그런

막장[갈때까지 간 상황]인 상황은 아니었고

이런 귀족들의 반란을 바로 진압할 정도의

강력한 왕권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7월 가을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서 미녀 美女 (아름다운 여자)

두 명을 바쳤습니다 (당대 신라인들이

고구려,백제의 압박에서

당나라와의 우호가 급했다고도 해석할 수 있으나

그럼에도 옳지 못한 행위입니다)


그러나 당나라 신하 위징은 이를 받는 것이 옳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당황제, 당태종 이세민이 기뻐하며


<당태종>저 임읍(베트남쪽 참파 왕국)에서 바친 앵무새도

추운 고통을 말하며 자기나라로 돌아가기를 원한다


황차(하물며) 가족을 멀리 이별하고 온

두 여자의 처지야 어떻겠는가 !


라고 말하고

사신에게 맡겨 돌려보냈습니다


<신라 사신들>당황제가 인물이라던데

직접 보니 그 말이 사실이로구나 !


(비록 한국입장에서는 고구려를 멸망시키려 한

인물이 당태종이지만 야심만만하고 카리스마있고

유능했던 인물이기는 했고

근데 왕자의 난을 일으켜서 즉위한 인물이라

한국 말고도 중국에서도 평이 좋지 못한것도 있고

'멋진 악역' , '매력있는 나쁜 캐릭터' 등 으로도 이야기 되고

이런 모습 때문인지 동양 군주들이 닮고 싶어했던 인물이기도 했고

특히나 한국사에서는 조선 태종 이방원이 그를 흠모해서

왕자의 난 등

실제 그와 비슷한 길을 가게 된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흰 무지개가 대궐 우물로 들어갔습니다


토성이 달을 범했습니다


진평왕 54년

정월(1월) 봄

진평왕이 붕어(사망)했습니다

시호를 진평 이라 하고

한지에 장사지냈습니다


당태종이 조서로

좌광록대보 벼슬을 추증하고

비단 2백필을 부조했습니다


<김부식> '고기 古記 ' 에는

'정관 6년 임진봄 정월에 죽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신당서'와 '자리통감' 에는 모두

'정관 5년 신묘에 신라와 진평이 죽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틀린 것이 아닐까 ?


<라봉봉>진평왕은 그래도 내부적으로는 귀족들의 성장과

외부적으로는 특히 백제의 성장과 견제에 위기에 몰려있었다고

할 수 있었지만 나름 여러 위기상황들을 외교로 극복하고

김유신 장군같은 뛰어난 신하들을 중용해서 국가의 기반을

잘 닦아놓은 왕이라는 평이 있고

실제로 오랜 재위기간동안 안정적인 치세를 구가했다고

할 수 있고

당대 신라 왕실에서 싯다르타,부처님 같은 아들을 낳으려고

진평왕 김백정은 싯다르타의 아버지 정반왕(백정왕)의 이름을,

진평왕의 부인 마야부인은 싯다르타의 어머니 마야부인의 이름을

따와서 이제 아들만 낳으면 되서(,,) 아들을 그렇게 낳으려 해도

딸만 태어나서 딸부잣집 아버지가 되었는데

딸,공주들도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들이 되었고

공주들과 얽힌 이야기가 많아서

동화속의 '백마 탄 왕자' 이미지는 아니나

동화속의 '임금님(공주 아버지)' 이미지와 적합한 인물이라

은근 인기도 있는 왕이라 하고


나름 긴 치세기간 동안 안정적인 국정운영과

아들은 없었지만 그래도 딸들도 딱히 차별하지 않았던거 같고

특히 후계자들을 잘 양성해놔서

진평왕대가 위기적 상황들이 있었지만

진평왕 사후 큰 내란등은 없었고

이후 김춘추와 김유신이라는

신라의 큰 인물들이 나타나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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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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