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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평왕 35년

가뭄이 들었습니다


4월 여름

서리가 내렸습니다


7월 가을

수나라 사신 왕세의가 황룡사에 와서 백고좌 百高座 (법회 이름)를 열고

원광 등의 법사를 초청해서 불경을 설법하게 했습니다


진평왕 36년

2월 봄

사벌주를 폐지한 후

일선주를 설치하고

일길찬 일부를 군주로 삼았습니다


영흥사의 흙으로 빚은 불상이 저절로 허물어지고

얼마 후에 진흥왕의 왕비였던 비구니(여자 승려)가 사망했습니다

(진흥왕 말년 진흥왕과 왕비는 둘다 승려가 됬습니다,,)


진평왕 37년

2월 봄

진평왕이 큰 연회를 사흘동안 베풀었습니다


10월 겨울

지진이 있었습니다


진평왕 38년

10월 겨울

백제가 모산성을 공격했습니다


진평왕 40년

북한산주 군주 변품이 가잠성을 수복하기 위해서

군사를 내서 백제와 싸웠습니다

해론이 이에 종군해서 적(백제군)과 만나

전력을 다하여 싸우다가 전사했습니다


<김부식>해론은 찬덕의 아들이다


(2차 가잠성 전투)


진평왕 43년

7월 가을

진평왕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서

토산물을 조공했습니다

당고조가 직접 사신을 위로하고

통직 산기상시 유문소를 사절로 파견하면서

조서, 그림, 병풍, 비단 3백 단을 보내왔습니다


(아무래도 중국 통일제국 수나라,당나라의 등장은

고구려,백제에 비해 중국과 멀리 있었던 신라에서는

당장은 별 위기감을 못느꼈던거 같습니다)


진평왕 44년

진평왕이 직접 황룡사에 갔습니다


2월

이찬(신라 2등벼슬) 용수(김용수=김용춘,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아버지)를

내성 內省 (궁내부, 왕실 사무관리) 의

사신 私臣 (내성의 장관직) 으로 임명했습니다


(김용수가 진평왕의 딸 천명공주와 결혼하고 진평왕의 사위가 되었는데

진평왕은 아들이 없었고,, 김용수는 천명공주와의 사이에서

아들 김춘추를 낳았는데 이후부터 점점 팔자가 폈다고 합니다

김춘추가 성골이 아닌 진골출신이라 해서

뭔가 왕위 계승과 거리가 먼 이미지가 있으나

김용수 자체가 진평왕 선대왕인 진지왕의 아들이었고

당대 김용수,김춘추 부자는 왕위 계승서열에서 매우 가까운 인물들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진평왕은 즉위 7년에는

대궁, 양궁, 사량궁 세 곳에 각각 사신을 두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 내성에 사신 1인(김용수)을 두어서

3궁을 동시에 관장하게 한 것입니다


진평왕 45년

정월(1월) 봄

병부(국방부) 대감 두 명을 두었습니다


10월 겨울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백제가 늑노현을 습격했습니다


진평왕 46년

정월(1월) 봄

시위부(왕궁 호위부) 대감 6명과

상사서(공훈관계 업무, 국가보훈처) 대정 1명과

대도서(궁중소속 사찰,절을 맡아보던 관청이라고 합니다) 대정 1명을 두었습니다


3월

당고조가 사신을 보내서

진평왕을 '주국낙랑군공 신라왕' 으로 책봉했습니다


10월 겨울

백제 군사가 우리를 공격했는데

그곳은 속함, 앵잠, 기잠, 봉잠, 기현, 혈책 등 여섯 성이었습니다


이 때 3성이 함락되거나 항복했습니다

급찬(=급벌찬, 신라 9등벼슬) 눌최가 봉잠, 앵잠, 기현 3성의 군사를 합해서

굳게 지키다가 이기지 못하고 사망했습니다


<신라인 1>아니 백제가 왜이리 강해졌데 ?,,


<신라인 2>이러다 큰일나는거 아닌가 모르겠다,,


진평왕 47년

11월 겨울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서 조공하고 알리기를

고구려가 길을 막아 당나라에 조회할 수 없음과

또한 그들이 자주 침범한다는 사실을 알렸습니다


(이미 신라인들은 한강유역을 점거했기에

배를 타고 충분히 당나라와 교류가 가능했으나

사실상 고구려 견제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에 애초에 삼국통일은 당시 민족개념도 없었고

고구려,백제,신라는 적국이었을 뿐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나

언어가 통하고 같은 뿌리에서 나온,

조선[고조선]의 후예인 하나의 민족이고

당대 적대했던 시기였던 것은 맞습니다)


진평왕 48년

사신을 보내서 대당 大唐 (당나라의 존칭,,)에 조공했습니다


<당대 신라 역사가 1>야 ! 역사에 당나라로 적지말고

대 당나라로 적으래이 !


<당대 신라 역사가 2>하모,, 조금 자존심 상해뿌지만

백제와 고구려가 우리를 압박하고 있으니,,


당고조가 주자사를 보내서

고구려와 화친할 것을 권했습니다


8월

백제가 주재성을 공격했습니다

주재성 성주 동소가 항전하다가 전사했습니다


고허성을 쌓았습니다


<라봉봉>그렇게 어느새 중국 통일왕조 수나라는

거대한 국력이 있었음에도 한국 고구려 원정 실패해서

국력을 크게 소모하다가 내란으로 당나라가 들어서게 됬고

당나라는 크게 혼란없이 수나라의 거대한 국력을

그대로 이어받게 되었고 중국은 또다시 통일제국,거대 왕조가

들어섰다고 할 수 있는데

이에 바다로 가까운 백제와 육지로 닿아있는 고구려는

큰 긴장태세였으나 그에비해 신라는 수나라던 당나라던

먼 나라였기에 또 신라의 한강유역 점거 이후부터

북쪽에는 고구려,남쪽으로는 백제 두 나라를 상대해야 했기에

한편으로는 백제와 고구려의 육상 연결을 차단했다고도 볼 수 있으나

한편으로는 백제와 고구려가 위,아래에서 연합작전을 펼칠 경우

그 또한 큰 위기라 할 수 있기에

먼 중국과 적극적으로 손을 잡으려 했던

당대 신라인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당대에는 민족 개념도 없었고 삼국은 그저 적국이기에

중국과 손을 잡았다는 해석도 있으나

저는 그렇게 보지는 않고

같은 민족,뿌리였던 개념은 이미 당대 삼국인들도 있었으나

중국 거대 통일왕조의 등장에 신라인들이 백제나 고구려에 비해

덜할뿐이지 이미 삼국인들 모두가 큰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고

이에 한국도 삼국통일,민족통합의 생각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던거 같습니다

또 점차 삼국의 충돌이 커져가는 시기였고

워낙 급해서 중국과 적극적으로 손을 잡은 당대 신라인들이었을 뿐이지

민족개념도, 같은 뿌리였다는 생각도 없이 고구려와 백제를 적대했던

신라인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애초에 삼국사기 신라 혁거세 거서간 기록에도

신라는 조선(고조선)인 유민들이

건국한 나라라고 분명히 기록되있고

고구려인들이 끊임없이 조선의 영토를 수복하려 했단 점,

백제 역시 고구려와 같은 부여,고구려계 왕실이고

남쪽의 삼한 자체가 조선인들이 건국한 나라라는 점 등

당대인들 역시 같은 민족의식은 분명 있었고

언어도 중국과 달리 삼국은 서로 통했습니다

인터넷이나 글들 중에서도 근거없는 소리들도 있고

삼국은 당대 민족개념도 없었다는 이야기들이

근거없는 이야기라 생각합니다

역사는 단순히 쉽게쉽게, 대충 넘어갈 수 있는게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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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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