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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에서 가장 오래 재위하며 내실을 다진 진평왕>


신라 26대왕 진평왕 김백정

재위기간 53년 (신라에서 가장 오래 재위한 왕,,) 579~632년


진평왕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의 이름은 백정 白淨 이며

진흥왕 태자 동륜의 아들입니다


<라봉봉>진평왕 김백정의 이름은 흰 백, 깨끗할 정으로

조선시대 천민이었던 백정이 아니라

석가모니,부처님의 아버지 '정반왕'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신라 왕실은 가계도를 석가족, 석가모니,부처님 집안 가계도와

일치시키려 노력해서 이름까지 이렇게 따라 했는데


(이차돈이 순교까지해서 삼국에서 가장 어렵게

불교가 들어온게 불과 얼마전 신라인데

이후 극성맞은 신라 왕실의 불교사랑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백정의 부인의 이름 역시 마야인데

마야는 석가모니의 어머니 마야부인이고

즉 정반왕과 마야부인 사이에서

싯다르타,석가모니가 태어난 거 처럼

신라 왕실도 한번 그런 위대한 인물을

낳아버리려 하는 욕심에서

이름까지 그런식으로 지은거 같은데


(쓰잘데기 없는것으로 나서거나

욕심으로 얼룩진 치맛바람같은 행위들을

극도로 혐오합니다 근데 이거는 뭐

이름만 바꾼 정도니 이것보다 더한 욕심으로

남에게 큰 피해까지 주는 것에 비하면 양반 같습니다)


이에 진평왕이 아들만 낳았으면

곧바로 아들이 석가모니의 재림이다

이런식으로 할 수 있었을 것인데

계속 딸만 태어났고

그렇게 진평왕 김백정은 딸부잣집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근데 세 딸중 한명은 신라 최초의 여왕 선덕여왕이 됬고

한명은 태종무열왕의 어머니가 됬고

한명은 맛둥서방,마파는 청년이었던 서동의 부인이 되서

서동은 이후 백제 왕 무왕이 되서

신라 적국 백제국의 왕비가 됬고


개인적, 종교적으로 생각해보면

그런식으로까지 이름도 석가모니 부모 이름으로 지어서

극성맞게 해서 성인을 낳고싶냐고

하늘께서 노하셔서 일부로 딸만 낳게했다거나


원하던 석가모니같은 아들은 안태어나게 하고

딸만 낳게했지만 딸들 역시 훌륭한 인물들로

보이려 하며 남녀평등 사상을 일깨워 주려했던

하늘의 장난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물론 저는 미신,비과학적인것을 좋아하지도 않고

과학적인 이야기라기보다

그냥 기록들을 보고 생각나서 써본 말들입니다,,


(진평왕의) 어머니는 김씨 만호 부인이며


<김부식>만내라고도 한다


갈문왕 입종의 딸입니다


왕비는 김씨 마야부인(석가모니의 어머니 이름과 같음)이며

갈문왕 복승의 딸입니다


진평왕은 태어나면서부터 얼굴 생김이 기이했습니다

그는 체격이 장대했으며

지식이 깊고 의기가 활달했습니다


진평왕 원년(1년)

8월

이찬(신라 2등벼슬) 노리부(세종)를 상대등에 임명했습니다


왕의 어머니의 동생인 김백반을 진정 갈문왕에 봉하고

김국반을 진안 갈문왕에 봉했습니다

(김백반,김국반은 석가모니 삼촌 이름을 따온 것이라 합니다)


진평왕 2년

2월 봄

진평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를 지냈습니다


이찬 후직을 병부령(국방부 장관)에 임명했습니다


진평왕 3년

정월(1월) 봄

처음으로 위화부를 설치했습니다


<김부식>이는 지금의 이부 吏部 (이조, 오늘날 행정안전부 격)와 같다


진평왕 5년

정월(1월)

처음으로 선부서(선박관계, 배에 관계되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를

설치하고 대감과 제감 각 한명씩을 두었습니다


진평왕 6년

2월 봄

연호를 건복으로 고쳤습니다


3월

조부령 한 명을 두어서

납세와 부역에 관한 사무를 관창케하고

승부령 한 명을두어서

수레에 관한 일을 맡게했습니다


(보통 중앙 집권화를 완성한 왕은

법흥왕이라 하는데

실제 법흥왕데 굵직굵직한 사업이 많았기에

그렇게 이야기 되나 이후에도

중앙집권화는 계속됬음을 보여주는 기록들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진평왕 7년

3월 봄

가뭄이 들자 진평왕이 정전(정식 궁전)에

거처하지 않았으며

평상시보다 음식을 줄이고

죄수를 직접 재심사했습니다


7월 가을

고승 高僧 (지혜가 뛰어나고 덕이 높은 승려) 지명이

불법을 구하기 위해서 진나라에 갔습니다


진평왕 8년

정월(1월) 봄

예부령 禮部令 (신라시대 교육과 외교 및 의례에 대한

사무를 관장하던 예부의 장관급 관직) 두 명을 두었습니다


5월 여름

뇌성과 벼락이 치고

별이 비오듯 떨어졌습니다


진평왕 9년

7월 가을

대세와 구칠 두 사람이 배를 타고

바다의 어디론가 떠나갔습니다


대세는 내물왕(신라 17대왕 내물 이사금,내물 마립간)의

7대손이며 이찬(신라 2등벼슬) 동대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자질이 뛰어나고

젊어서부터 세속을 떠나서 외지로 나가려는 뜻을

품었었습니다


그는 담수라는 승려와 사귀면서 말했습니다


<대세>신라같은 산골에서

일생을 마친다는 것은

연못의 고기와 산림의 새가 바다의 크기를 모르고

산림의 넓고 한가함을 모르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


(자신의 조국을 이런 식으로 낮춰 부르는 것부터

위험 징조, 영화로 치면 사망플래그가 보이는거 같습니다)


나는 장차 뗏목을 타고 바다를 지나

오나라 월나라로 가서 스승을 찾을 것이며,

명산에서 도를 구할 것이다


만약 속된 자세를 바꿀 수 있거나

신선이 되는 것을 배울 수 있다면

표표하게 바람을 타고 허공을 날아다닐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신기한 노름이요

장관일 것이다


그대는 나를 따를 수 있겠는가 ?


그러나 담수는 이에 따르지 않았습니다


<담수>(패기는 있으나 생각이 너무 어리군,,)음,, 거절하겠소,,


대세는 그를 버리고 다시 친구를 찾았습니다


그는 마침 구칠이라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는 사람됨이 굳건하고 남다른 절개가 있었습니다


그는 곧 구칠과 함께 남산에 있는 절을 유람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비바람이 불어와서

정원의 연못에 나뭇잎이 떠다니고 있었습니다


대세가 구칠에게 말했습니다


<대세>나는 그대와 함께 서방을 유람할 생각이 있다

이제 우리가 나뭇잎 하나씩을 주워

이를 배로 생각하고 띄워서

누구의 것이 먼저 가는지 보자


조금 후에 대세의 잎사귀가 앞서자

대세가 웃으면서


<대세>내가 먼저 간다 이기야 ~ !


라고 말했습니다


구칠은 불끈 성을 내며


<구칠>나도 또한 사나이이다

어찌 갈 수 없으리 !


라고 말했습니다


대세는 구칠이야말로 같이 행동을 할만한 사람임을 알고

은근히 자신의 뜻을 말했습니다


구칠은


<구칠>그것이 바로 내 소원이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들은 마침내 서로 친구가 되서

배를 타고 남해를 떠났습니다


그 후로 그들이 간 곳을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


<라봉봉>개인적으로 외국이 잘살면 동경하는 것 또한

옳지 못하다고 할 수 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조국이나 고향을 낮추어 생각하고

외국만을 높게 생각한다면 그것 역시 옳지 않은

일 같고

내정,내수가 안정된 신라인들이

점점 눈을 외국으로 돌리며 외국으로

나갔다는 이야기로 해석하면 될 거 같습니다


물론 대세와 구칠은 패기는 있었으나

그후로 그들이 간곳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기에,,

준비 부족등으로 풍랑이나 해적을 만나 사망하거나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진평왕은 재위기간도 길고

기록도 긴데 진평왕 이후 부터는

삼국통일기라 점점 기록들이 길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진평왕은 '오래 즉위했다' 는 점이 인상적인 왕 같고,,

오랜 시기동안 나름 어려운 국제 정세속에서

안정적으로 신라 내치를 다진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이때부터 점점 김유신,김춘추같은 전설적인 인물들이

등장하고 딸부잣집 임금님인데,,

공주들도 각각 한자리씩 했던 인물이 되기에

나름 보통 동화속에 나올거 같은 왕국의

'임금님' 이미지와 적합하기도 하고

신라가 내부적으로 큰 혼란은 없던 시기기에

나름 이때 안정적인 치세 등으로

이후 신라인들은 위기도 겪었지만

삼국통일을 시작해 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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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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