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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왕대에 시작된 화랑도, 말년에 불교에 심취한 진흥왕(진흥태왕)>


진흥왕 25년

사신을 북제에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진흐왕 26년

2월 봄

북제 무성황제가 조서를 내려서

진흥왕을 '사지절동이교위낙랑군공신라왕' 으로 봉했습니다


8월 가을

아찬(신라 6등벼슬) 춘부로 하여금 국원(충청북도 충주시)을

지키게 했습니다


9월

완산주를 없애고 대야주를 설치했습니다


진나라에서 사신 유사와 승려 명관을 보내와서 예방(예의차 방문)하고

불경 1천 7백여 권을 보내왔습니다


진흥왕 27년

2월 봄

지원사와 실제사 두 절이 준공되었습니다


왕자 동륜을 왕태자로 봉했습니다


(동륜 銅輪 의 이름은 동 바퀴, 구리 바퀴라는 뜻으로

불교에서는 전륜성왕 사상이 있는데

수레바퀴를 타고 다니며 세상을 교화,정복하는 왕으로

금륜,은륜,동륜,철륜 이렇게 금,은,동,철 바퀴의 급이 나뉘는데

오늘날 수저 계급론의 금수저,은수저,동수저,철수저와 비슷하고

실제 계급상에도 금륜이 가장 쎄고 수저계급론과 거의 똑같습니다,,


어쨋든 진흥왕은 자신을 전륜성왕과 동일시 했고

그런 전륜성왕 사상의 영향을 받아

두 아들 이름도 동륜과 사륜(혹은 금륜으로 진지왕)이라 했고

당대 백제 성왕도 전륜성왕의 영향을 받아 '성왕'이라는 칭호를

했기에 신라나 백제 할 거 없이 당대에는

대형 절 건립들이 유행하고 전륜성왕 사상이 삼국에 유행하며

삼국 불교계가 크게 성장하던 시기라 볼 수 있습니다)


사신을 진나라에 보내서

특산물을 바쳤습니다

황룡사가 준공됬습니다


진흥왕 28년

3월 봄

사신을 진나라에 보내서

특산물을 바쳤습니다


진흥왕 29년

연호를 대창으로 고쳤습니다


6월 여름

사시늘 진나라에 보내서 특산물을 바쳤습니다


10월 겨울

북한산주를 없애고

남천주를 설치했습니다

또한 비열홀주를 없애고

달홀주를 설치했습니다


진흥왕 31년

6월 여름

사신을 진나라에 보내서 특산물을 바쳤습니다


진흥왕 32년

사신을 진나라에 보내서 특산물을 바쳤습니다


(점점 재위 말년으로 갈수록 영토확장보다는

외국과의 외교를 하며 넓어진 영토를 관리하는

방식을 택한거 같습니다)


진흥왕 33년

정월(1월) 봄

연호를 홍제로 고쳤습니다


3월

왕태자 동륜이 사망했습니다


사신을 북제에 보내서 특산물을 바쳤습니다


겨울 10월 20일

전사한 사졸을 위해서

지방에 있는 절에서 팔관(불교 의식,행사) 연회를 열어서

7일만에 끝냈습니다


<신라 신하 1>대왕께서는 왜이리 불교에 열심이실까 ?


<신라 신하 2>그동안 죽어간 병사들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시겠지,,


진흥왕 35년

3월 봄

황룡사의 장육상(장육존상)의 주조가 끝났습니다

(장육상에 사용된) 구리의 중량이 3만 5천 70근이었으며

도금한 금의 중량이 1만 1백 9십 8 푼 이었습니다


(황룡사는 신라 불교계를 대표하는 초대형 절로

이렇게 매우 큰 불상과 황룡사 9층 목탑등 여러 유물들이

신라시대때 건립됬으나 고려시대때 몽골의 침입으로

불타서 소실됬고 장육상은 그래도 목탑같은 재질은 아니었기에

불타지는 않았고 황룡사가 불타서 없어진 이후에도

조선시대까지 남아있었지만

조선시대 어느때부터 사라졌다고 합니다,,)


진흥왕 36년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었습니다


황룡사의 장육상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눈물은 발꿈치까지 내려왔습니다


<신라 신한들>폐하 ! 장육상에 눈물이,,


<진흥왕>알고 있다.

이는 짐이 과거에 너무 많은 살생을 한 업보일 것이다,,


진흥왕 37년

처음으로 원화 源花 (직역하면 근원,시작 꽃으로

화랑제도의 시초) 제도를 두었습니다

초기에 임금과 신하들이 인재를 알아 낼 수 없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따라 친구들끼리 여럿이 모여서 서로 어울리도록 하고

그들의 행동거지를 살펴 본 후에

적절한 자를 천거해서 임용하도록 했습니다

이리해서 마침내 미녀 두 사람을 선발했고

그녀들의 이름은

남모와 준정이었습니다


그녀들을 중심으로 3백여 명의 무리를 모았습니다

그런데 두 여자가 미모를 다투어 서로 질투하다가

준정이 남모를 자기 집으로 유인해서

술을 강제로 권했습니다

준정은 남모가 취한 후에

그녀를 끌어 내서 강물에 던져 죽였습니다,,


준정은 사형에 처해졌고

모인 무리들은 화목하지 못해서 해산했습니다


그 후

다시 얼굴이 잘생긴 남자를 뽑아서

곱게 단장시켜

'화랑 花郞 (직역하면 꽃 사내, 꽃 남자)' 이라는 명칭으로 부르게 하고

그를 떠받들게 했습니다


그러자 무리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습니다


(진흥왕때 시작된 화랑도, 화랑제도는

일종의 신라사회의 '청춘스타', '아이돌'같은 제도였다고 할 수 있고

[왜냐하면 특히나 '잘생긴' 남자를 뽑았다고 하니

예체능에 능한 인물로 구성되었을거 같습니다]


고려시대에 '귀족','무인'

조선시대에 '선비','양반'이 그 시대의 지배층을 대표하는

계급이라 할 수 있다면 신라는 '화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신라 화랑은 고려,조선시대 과거제로 뽑는

사대부들과 달리 잘생기거나 하는 외모로 뽑았다는 것으로

보아서는 관료적,문벌사회적 모습보다는

삼국시대,고대사회가 그랬듯이 상무적 사회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잘생겼음은

곧 신체가 건장함을 나타내는 징표라 할 수도 있겠고

신체가 건강해야 군대에 동원되서

곧 장군역활을 할 수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더러는 도의를 서로 연마하고

더러는 노래와 음악을 서로 즐기면서

산수를 찾아 유람하며

먼 곳이라도 그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인품의 옳고 그름을 알게 되었으니

그 중에서 선량한 인물을 택해서

조정에 추천했습니다


(신라 화랑들은 그렇게 무리지어 몰려다니며

풍류를 즐기며 산과 동굴,강,계곡들을 탐험했을 것이고

근데 오늘날 보기에는 그냥 몰려다니는 청년 패거리로

보일 수도 있으나 당대에는 산과 강,계곡들에는

호랑이 같은 맹수들이 우글우글됬던 시대라 할 수 있기에,,

혼자서 산을 다니는거는 상당한 위험을 요구하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고

나름 어린 소년,청년들이 호연지기[바르고 큰 마음,용기]를

기르는 모습으로 비춰졌던 시대였음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김부식>김대문의 '화랑세기'에는


'어진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이(화랑도)에서 나왔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사가

이(화랑도)에서 생겼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최치원의 난랑비 서문에는


'우리나라에는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를 풍류 風流 (속사를 떠나 풍치가 있고

멋들어지게 노는 일) 라고 한다


이 교를 창설한 내력은

선사 仙史 (직역하면 신선의 역사인데

화랑의 역사를 가르키는 말이라고 합니다)에 자세히 밝혀져 있는데

실제적으로는 유불선(유교,불교,도교)의 세가지 교를 포괄하여

중생을 교화하자는 것이다


이를테면 집에서는 효도하고

집 밖에 나아가서는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공자의 뜻이요


무위 無爲 (자연 그대로 되있고 사람이 힘들여 함이 없음)의 일에 처하며

말하지 않는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은

노자의 뜻이요


모든 악행을 하지 않고

모든 선행을 실천하는 것은

석가(부처)의 교화와 같은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당나라 영고징의 '신라국기'에는


'귀인(부유한,신분 높은 집)의 자제 중에서 훌륭한 자를 선발하여

곱게 꾸민 다음

이름을 화랑이라 하여 백성들이 모두 떠받들어 섬겼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안홍 법사( 법사 = 불교의 교법을 전하는 사람,승려)가

수나라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고

서역의 중 비마라 등 두명의 중과 함께 돌아와

'능가승만경'과 부처의 사리를 바쳤습니다


8월 가을

진흥왕이 붕어(사망)했습니다


시호를 진흥 眞興 (참 진, 일으킬 흥 ) 이라하고

애공사 북쪽 봉우리에 장사지냈습니다


진흥왕은 어려서 왕위에 올랐고

그는 독실하게 불도를 신봉했습니다


말년 末年 (일생의 말기)에 와서는 삭발을 하고

가사를 입고

법운이라는 법명을 스스로 지어 부르며

생애를 마쳤습니다


(진흥왕은 신라 최대 정복군주로서

그만큼 전쟁으로 많은 살상을 했기에

죄책감때문에 말년에 승려가 된 인물 같습니다

세종대왕도 성리학의 나라 조선의 왕이었지만

성리학 사대부들의 반발에도 불교에 심취했는데

그 이유는 자식과 부인을

잃고 불교에 그들의 명복을 빌었다고도 할 수 있으나

일단 왕이라는 자리가 형벌과 사형 등 여러 일도 주관하게 되고

세종대왕 역시 언어학자적 이미지와는

다르게 4군 6진을 개척한 '조선시대 최대 정복군주'였기에

수많은 살생을 했기에 말년에 그런 죄책감등에

성리학 사대부,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불살생과 평화를 중시한 사상이었던 불교에 심취했던거 같습니다)


(진흥왕의) 왕비도 역시 이를 본받아서 중이 되서

영흥사에서 살았습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자

백성들이 예를 갖추어 장사지냈습니다


<라봉봉>그렇게 진흥왕은 재위 말년에

불교에 심취하게 되었고 불교적 기록이 많습니다

이는 당대 삼국 불교들이 점점 대형화되며

크게 유행한 것도 있고

당대 진흥왕은 자신의 롤모델을

인도의 '아소카왕'으로 삼았던거 같습니다


아소카왕은 인도 정복군주로

칼링가국을 점령하려 보병 60만 ,기병 10만, 코끼리 9천마리를 이끌고

쳐들어가서 10만이 넘는 인명을 죽이고 칼링가를 폐허로 만들었는데

칼링가 수도를 직접 둘러보다가 자신의 야심으로

칼링가국 사람들의 피가 발목까지 차오를 정도로

무수한 인명이 죽고 고아가 된 아이들 모습과

미쳐버린 사람들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후부터는 다른나라 침략을 그만두고

공공사업을 후원해 병원,고아원,양로원 등을 세워

전쟁으로 떠돌던 이를 치료하고 돌보게 했다고 하고


전쟁에 대한 참회와 반성의 의미로

불교를 열성적으로 신봉해서 불탑을 세우고

불교를 퍼트린 인물이라 할 수 있고

'전륜성왕'의 모델이라고도 한데


'전륜성왕'사상의 영향을 크게 받은 당대

진흥왕의 행보와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롤모델,스승이 중요한게 조선 이방원 태종이나

수양대군,세조는 중국 명군 당태종을 롤모델로 삼아서

유능한 정치를 하기도 했으나 왕위를 차지하려

당태종같이 집안을 박살내기도 했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진흥왕은 아소카왕을 롤모델로 했다 할 수 있습니다)


실제 진흥왕이 불상인 장육상을 제작할때

쓰인 원료는 아소카왕이 철 57000근과

금 3만분으로 석가삼존 불상을 만들려다 실패하자

혼자 힘으로는 안될 것임을 깨닫고

금과 철,그리고 삼존불상 모형을 배에 실어 보냈는데

이게 신라 땅에 닿게 되었으며

진흥왕은 이 금과 철을 가지고 황룡사의 장육존상을

주조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아소카왕은 시대가 진흥왕과 800년 차이가 나는 인물로

정말 800년동안 바다에 금과 철을 실은

유령선이 떠돈것도 아니고 말도 안되는데,,

즉 불교적 정통성을 위한 신라사회의 조작이라 할 수 있고


대신 진흥왕 당대 신라 사회에서

인도 아소카왕의 존재를 인식했다는 것은

진흥왕이 아소카왕을 롤모델로 삼았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고

실제 진흥왕의 행보는 조선 태종 이방원이 롤모델이었던

당태종 이세민과 비슷한

행보를 보인것과 마찬가지로 거의 똑같다고 보면 됩니다,,


진흥왕도 재위 초기에 빠른 속도로 국토를 팽창시켰는데

그로 인해 여러 사람들이 죽었고

이에 느끼는 것이 많았는지 불교에 심취하게 된 거 같고

그렇게 점점 신라 사회에는 불교는 법흥왕때

격렬한 반발음과 이로 인해 이차돈의 순교를 불러왔음에도

바로 다음왕인 진흥왕때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기는 했냐는 것처럼

빠른 속도로 주류 종교로 자리잡게 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다른 진흥왕의 이야기로는 삼국사기나 금석문(비석)에

써여져 있는 짐, 선황 先皇 ,황왕 皇王 같은 표현 등으로

신라는 적어도 법흥왕때부터 외왕내제, 외부적으로는

왕을 칭하나 내부적으로는 황제를 칭하는 외왕내제적

모습을 보였다고 이야기 되고 있고

실제 신라인들은 당대 삼국중 자신감이 가장 최고조에

달할 때였고 이에 진흥왕을 보통의 왕 이상으로

높여 불렀다고 할 수 있으며

실제 마운령비 등 비석에서 진흥왕은

'진흥태왕 眞興太王' 이라고 기록되 있습니다

즉 실제 진흥왕의 당대 신라인들이 부른 공식 명칭은

진흥태왕이 맞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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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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