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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왕 14년

2월 봄

진흥왕이 해당 관청으로 하여금 월성(신라 왕궁) 동쪽에

새 궁궐을 짓게 했는데

그 터에서 황색의 용이 나타났습니다


진흥왕이 이를 기이하게 여겨서

궁궐을 고쳐서 절을 짓고

황룡이라는 이름을 하사했습니다 (황룡사)


7월 가을

백제의 동북 변경을 빼앗아서

신주를 설치했습니다

아찬 무력을 그곳의 군주로 임명했습니다


10월 겨울

진흥왕이 백제의 왕녀를 맞아서

소비로 삼았습니다

(당대에 백제 성왕의 딸이 신라 진흥왕에게 시집갔습니다)


진흥왕 15년

7월 가을

명활성을 수축(고쳐 지음,고쳐 쌓음)했습니다


백제왕 명농(백제 27대왕 성왕 부여명농)이

가량과 함께 와서 관산성을 공격했습니다


군주 각간(=이벌찬, 신라 1등벼슬)인 우덕과

이찬(신라 2등벼슬) 탐지 등이 이들(백제군)과 싸웠으나

불리하게 됬습니다


신주의 군주 김무력(이전 법흥왕때 항복한

금관가야왕의 셋째아들이자

신라 삼국통일의 주역 김유신 장군의 할아버지)

이 주병 州兵 (주,지역의 군사)을 이끌고 와서

이들과 교전했는데

비장(참모,부하장수)인 삼년산군의 고간 도도가

재빨리 공격해서 백제왕(성왕)을 죽였습니다


당대 관상성 전투에 대해 일본서기 기록을 참고하자면,,


고도(도도)는 명왕(성왕)을 사로잡아 두 번 절하고


<고도>왕의 머리를 베기를 청합니다


이에 명왕이


<명왕>왕의 머리를 노비의 손에 줄 수 없다


<고도>우리의 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기면

비록 국왕이라 하더라도 노비의 손에 죽습니다


(이에 대해 신라시대 사회의 법적인 해석도 있으나

쉽게도 생각해보거나 백제인들의 정서로서도 생각해보면


성왕이


'너같은 천한놈한테 귀한 내가 죽을 수는 없음'


이러자 화난 고도가


'그래 천한 노비인 내가 왕인 너를 죽여줄게'


이런 뜻이 아닐까도 싶습니다,,

또 실제 고도는 노비가 아닌 장군이었기에

그냥 모욕적으로 한 말에 모욕적으로 되받아 친 것 일 수도 있습니다)


이에 명왕은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하고

눈물흘리며 허락하기를


<명왕>과인이 생각할 때마다

늘 고통이 골수에 사무쳤다


돌이켜 생각해보아도 구차히 살 수는 없다


라 하고 머리를 내밀어 참수당했다고 기록되있습니다,,


(당대 백제인들에게는 조금 잔인한 해석일 수도 있지만,,

아마 성왕이 고통이 골수에 사무쳤다,

구차히 살 수는 없다라고 한 말들은

아마 당대에 백제인들은 강성하며 발전하는

신라인들에 여러 열등감등을 느끼고 있었던거 같고

그런 백제인들의 대표였던 성왕은 강대했던 자신의 나라가

한때는 약소국이었던 신라에게

압도적으로 처참하게 패배하는 것을 보고

어이없음, 고통, 열등감 등이 한꺼번에 작용했던 것으로 보이고

이에 그런 말을 한게 아닐까 싶습니다,,)


이때 모든 (신라) 군사들이 승세를 타고 싸워서

대승했습니다

이 싸움에서 좌평 네 사람과

장병 2만 9천 6백명을 참살했습니다


(백제 정예군이 대규모로 몰살됬다 보면 됩니다,,

즉 이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는 왕과 재상[재상급] 4명이 죽고

3만여 명의 대군이 몰살되고

이후부터 백제는 점점 기울기 시작합니다,,)


백제군은 말 한 필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라봉봉>그렇게 관산성 전투로 신라와 백제 양국은

120여년동안 유지된 오랜 '나제동맹'을 끝내게 됬고

오랫동안 조용히 움추려있었던 신라는

그동안 모아온 힘들을 폭발시키며(다소 속된 표현일지라도

폭발이 맞는 표현 같습니다) 굴기 倔起 (몸을 일으킴) 하게 됬고

백제는 저무는 해같이 점점 쇠약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이미 관산성 전투 이전

독산성 전투로 나제동맹은 고구려 군을 압도하며 물리쳤고

이 전투이후 고구려는 타격이 커서 얼마 후

나제동맹군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한강유역을

빼앗기게 되고 신라는 한강 상류,

백제는 한강 하류를 차지하게 됬습니다

당대 고구려는 북방의 돌궐도 막아내야 했고

남쪽의 신라 역시 강성했기에

남쪽 방어라인들은 크게 신경쓰지 못했던 시기였고

그렇게 나제동맹 특히 백제는 오랫동안 숙원이자

옛 거의 500년간의 수도였던 한강지역을 탈환했다고 할 수 있는데


(저는 옛날에 상류를 북부로 착각해서

신라가 한강 북쪽지방을 가져갔다고 생각했는데

한강은 강원도에서 시작되는 긴 강으로

한강 동부쪽을 신라가 가져갔다고 보면 됩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위축되었던 백제의 국력으로는

한강을 탈환하는데는 성공했으나

강성했던 신라에 지켜낼 수는 없었던거 같고

신라인들도 점점 나제동맹을 굳이 안하고도

단독으로 행동해도 될 정도의 국력을 갖췄다고

자각하는 시기였던거 같고 이에

한강 하류까지 내려와서 모두 차지해 버린거 같고


그럼에도 백제인들에게 한강유역은 매우 중요한

땅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에 백제인들은 수만의 군대를 모으며

한번 신라를 제대로 칠 준비를 하고 있었고

그 전에 성왕이 진흥왕에게 딸을 시집보내서

신라를 공격하기 전에 방심시키려 했던거 같습니다,,


그러다 결국 관산성 전투가 시작됬고

오랫동안 국력을 축적한 신라앞에

백제군은 왕실이 직접 나서는

대정예군이었음에도 국력차 등으로

사실상 학살당한 것으로 보이며

이로 인해 신라는 한강유역을 완전히 굳히게 되고

새로운 동아시아의 강국으로 일어서게 시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한국 동남쪽에 위치해서

문물의 발달도 늦고 그렇다고 딱히

백제같이 부유하거나 고구려같이 영토가 넓지도 않았던

신라는 오랜 기다림,인내,내부개혁 등으로

국력을 크게 키우게 됬고

혼자서 백제,고구려 두 대국을 상대할 정도의 국력을

갖추게 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진흥왕대는 그렇게 급격히 영토가 팽창하며

삼국시대 신라의 최전성기라 불리는 시기로 이야기 됩니다


그러나 저의 생각에는 영토가 넓어진 것은 맞지만

신라는 원래부터 한국 동쪽지방에 영향력을 행사했던 나라였고

도중에 고구려가 강성할때에 잠시 동북부 지역이

고구려 영역으로 넘어가기도 했으나 원래부터

신라는 초기부터 한국 동쪽은 서쪽과 달리 구불거림이 없고

매끈하게(흠이나 거친데가 없이 부드럽고 반드럽다)

형성되있고 고구려같이 산맥을 넘어야

한국 동부로 진출하는게 아니었기에

신라인들은 초기부터 쉽게 해안가 북상할 수가 있었기에

함경도나 강원도 일대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도중에 위축되었다가 진흥왕때 힘이 강해지자

다시 옛 영역들을 회복한거 같고


실제 신라 영토가 진흥왕때 무슨 폭발적으로

동남쪽 경주일대에서 한강과 강원도,함경도 일대를

가져갔다기 보다 원래부터 꾸준히 강원도,함경도 일대는

영향력을 행사하다가 한강영역까지 진출한것으로 보이고

어찌됬건 당대 신라는 하여튼 매우 강했고

당대 한강 지역을 모두 차지함으로서

백제와 고구려의 접촉을 차단하고

중국과 바다로 직접 교역할 수 있는 교통로를 얻게 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직 함경도 진출 기록까지는 안썼지만

관산성 전투 2년후 신라는 함경도까지 진출하고

하여튼 매우 빠른 속도로 국토가 팽창하던 시기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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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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