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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차돈의 *순교, 신라에 불교를 *공인한 법흥왕>


(*순교 殉敎 모든 압박과 박해를 물리치고

자기가 믿는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일,

넓은 뜻으로는 주의나 사상을 위하여 죽는 경우에도 쓴다


*공인 公認 국가나 공공 단체 또는 사회단체 등이

어느 행위나 물건에 대하여 인정함)


법흥왕 15년

처음으로 (신라에) 불법 佛法 (불법=불교) 이 시행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신라에 불교가 시작됬습니다)


처음 눌지왕(신라 19대왕 눌지 마립간 김눌지)때

중(승려,스님) 묵호자가 고구려로부터

(신라) 일선군(경상북도 구미시)에 왔습니다


그곳 사람 모례 毛禮 (신라 최초의 불교신도)가

집안에 굴을 파고 방을 만들어서

그를 편히 모셨습니다

(아마도 귀한 귀빈이긴 한데 묵호자는 고구려인이었고

당대 임금이었던 눌지 마립간은 반고구려 정책을 했던

인물이라 그를 숨겨 모신거 같습니다)


이 때

양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서 의복과 향을 주었으나

임금이나 신하들이 그 향의 이름과 용도를 알지 못했습니다


<눌지 마립간>(향을 들며)이것은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


<신라 신하들>음,, 아마도 음,, (아무런 생각이 안난다,,)

음,,


이렇게 되자 관리에게 향을 주어서

여러 곳을 다니며 물어보게 했습니다


묵호자가 이를 보고

그 이름을 말해주면서


<묵호자>이것을 태우면 향기가 피어나고

그 정성이 신성 神聖 (함부로 가까이 할 수 없을 만큼

고결하고 거룩함) 한 곳에 이르게 되오

소위 신성 神聖 이란 3보 三寶 (세가지 보물, 불교에서는 3가지 근본) 를

일컫는 것이니,


첫째는 불타 佛陀 (부처,깨달은 사람)요

둘째는 달마 達摩 (법)요

셋째는 승가 僧伽 (교단,스님,대중)라오


만일 이것을 태우며 원하는 바를 기원하면

반드시 영험이 있을 것이오


라고 말했습니다


<신라 관리>음,, 뭔지 잘 모르겠지만

대단한 이야기 같군,,

나중에 저에게 한번 가르침을 주십시오


<묵호자>(신라에도 불교가 슬슬 들어올 때가 되었군,,) 알겠습니다


그 때 눌지 마립간의 딸이 병으로 위독했습니다

눌지 마립간은 묵호자로 하여금 향을 태우며 서원(기도)하게했습니다

왕녀 王女(공주)의 병이 치유됬습니다


눌지 마립간이 매우 기뻐하며

묵호자에게 예물을 후하게 주었습니다

묵호자가 물러 나와서 모례를 보고 예물을 주며 말하기를


<묵호자>나는 지금 갈 데가 있어

작별코자 한다


라고 했습니다

이별의 말을 청했으나

잠시 후에 그가 간 곳을 알 수 없었습니다


비처왕(신라21대왕 소지 마립간 김소지,김비처 때가 되서

아도 화상 和尙 (화상=불교에서 선생님,지도교수를 뜻하는 말)이라는 사람이


<김부식>아도 阿道 를 아도 我道 로 쓰기도 한다


시자 侍者 (제자 승려) 세 사람과 역시

모례의 집으로 왔습니다

그의 모습이 묵호자와 비슷했습니다


(삼국유사 저자 일연 스님은

아도라는 인물은 묵호자와 동일인물이고

두 이름 중 하나는 가명 내지는 타칭일 것이라 주장했다고 합니다)


그는 몇 년 동안 살다가

아무런 병도 없이 죽었습니다

그의 시자(제자) 세 사람이 그 집에 계속 머물러 있으면서


(당대에는 신라와 고구려가

적대 관계이기도 했기에

신라인 모례의 집은 고구려 승려들의

아지트가 된 거 같습니다,,

신라는 불교 수용이 삼국중 가장 어려웠는데

이는 불교 자체의 문제라기보다

불교가 신라와 적대관계였던

'고구려에서' 전래되었기에 정치적 문제가 있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불경과 계율을 강독하니

가끔 불법(불교)을 신봉 信奉 (믿고 받듬)하는 자가 나타났습니다

이 때에 이르러 법흥왕도 역시 불교를 흥 興 (시작) 하게

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 (신라) 신하들이 불교를 믿지 않고

반대가 많았으므로

법흥왕도 난처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신라 신하 1>불교 수입 반대한다 !


<신라 신하들>반대한다 ~ ! 반대한다 ~ !


<신라 신하 1>외국 종교에 국산 종교들 다죽어난다

불교 수용 왠말이냐 ~


<신라 신하들>왠말이냐 ~ ! 왠말이냐 ~!


<합세한 신라 무당들>반대한다 ~ 작두 타자 이기야 ~


,,


<이차돈>궐밖에서 신료들이 불교 수용

반대 시위를 합니다 임금님,,


<법흥왕>(골치아프네,,) 고구려,백제도 이미 불교를 들어왔건만,,

국론을 통합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면

불교를 공식수용해야 할 것이다,,


근신 近臣 (임금을 가끼이에서 모시는 신하,

임금과 친한 신하) 이차돈 異次頓 이


<김부식>혹은 처도라고도 한다


법흥왕에게 아뢰기를


<이차돈>청컨대 소신의 목을 베어

여러 사람들의 분분한(어수선한) 견해를 하나로 모으소서


라고 했습니다


법흥왕은


<법흥왕>본래 불도를 흥(시작)하게 하려 하는 것인데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옳지 않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차돈은


<이차돈>만약 불도가 시행된다면

소신이 죽더라도 유감(마음에 차지 아니하여

섭섭하거나 불만스럽게 남아 있는 느낌)이

없을 것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법흥왕은 여러 신하들을 불러서

의견을 물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신라 신하들>요즈음 중의 무리를 보면

머리를 깎고 이상한 복장을 하였으며

말하는 것이 기괴하니 이는 영원히 진실한 도가 아닙니다


이제 만약 그들을 방치한다면

후회할 일이 생길까 염려되오니

저희들은 비록 중죄를 당할지라도

감히 명령을 받들 수 없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차돈은 홀로


<이차돈>지금 여러 신하들의 말은 옳지 않습니다

무릇 비상한 사람이 있은 후에야

비상한 일이 생기는 법입니다

이제 불교의 심오한 경지를 들어보면

이를 믿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법흥왕은


<법흥왕>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강경하여

이를 꺾지 못하겠고

너만이 혼자 견해가 다른 말을 하고 있으니

두 편을 모두 따를 수는 없다


라고 말하고


마침내 형리(형벌을 집행하는 관리)로 하여금

그의 목을 베도록 했습니다


<법흥왕>,, (차돈아 미안하구나,, [실제 이차돈의 이름은

성씨가 이도 아니고 이름도 차돈이 아닌

박씨성에 이름은 '염촉'이나

차돈으로 써보았고 이는 이후 삼국유사 이야기때 할 것입니다,,

실제 법흥왕은 이런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이차돈>,,(괜찮사옵니다)


이차돈이 죽음을 앞두고 말했습니다


<이차돈>나는 불법을 위하여 형벌을 받는다


만일 부처의 영험(신비한 효험)이 있다면

내가 죽고나서 반드시 기이한 일이 있을 것이다


이차돈의 목을 베자

목을 벤 곳에서 피가 솟아 나왔는데

그 색깔이 젖빛(젖 색깔)처럼 희었습니다



<헌덕왕 10년에 만들어진 이차돈 순교비>


사람들이 이를 괴이하게 여겨

다시는 불사 佛事 (불교 종교 활동)를 비방하거나 헐뜯지 못했습니다


<김부식>이 기록은 김대문의 '계림잡전'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이 기록은

한내마 韓奈麻 (=대나마 ,신라 10등 벼슬) 김용행이 지은

'아도 화상비'의 기록과는 현격하게 다르다


법흥왕 16년

살생을 금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법흥왕>(차돈아 너의 희생은 잊지 않을 것이다,,)

나라 안의 살생을 금하라 !



<이차돈 영정>


<라봉봉>그렇게 신라 사회에 불교가 공인된 과정에 대한 이야기로서

신라는 토착종교(무당)의 강성함과

하필 불교가 당대 적국이었던 고구려에서 들어오게 됬다는 점 등으로 인해

특히나 한국 삼국에서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불교가 가장 늦게, 가장 어렵게 공인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차돈의 순교로 불교가 공인되게 되었고

이차돈은 한국 불교사에서 정말 중요한 인물이라 할 수 있으며

한국 천주교,기독교에서 조선시대에 유교적 질서와 달랐던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있었는데

천주교 박해를 무릅쓰고 포교 활동에 전념하던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부 김대건 신부가 순교했던 것과도 비슷한 이야기라 할 수 있고

불교던 천주교(기독교)던 한국사회에 정착하는데는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어찌보면 불교도 이후

한국 사회에서 주류화되며 고려시대

유교를 받든 신진사대부 선비들을 탄압했고

그렇게 탄압받은 신진사대부들도 조선이 건국되며 주류계층이 되고

유교,성리학이 조선시대 국가적 종교로 자리잡자

기독교를 탄압했다는 점 등 자비와 인(착함), 사랑을 가르친 종교와는

여러 모순이 있는 이야기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마 이는 기존 세력들의 신 세력에 대한 거부반응,배타적 모습,이권다툼들로

일어난 사건들 같고

신라사회는 특히나 당대 전성기,번영기를 맞으며

큰 성장으로 신라인들은 자신의 나라에 

자부심이 강했을 거 같고 이에 민족종교였던 무당 등 토착 종교도

성장하며 신라 지배층들까지 외래종교였던 불교에 대한

큰 거부반응을 보이게 된게 아닐까 싶고

물론 그럼에도 불교는 당대 동아시아에 전파되고

이웃나라 고구려,백제도 이미 받아들인지 오래라


'분명 받아들이긴 해야하는데 한편으로는 국내 반발도 셌던'


그런 분위기가 감돌았을거 같고

이에 법흥왕대에 법흥왕의 근신이었던 이차돈이

'총대를 메서' 신라 사회에 일종의 충격요법을 실행했던거 같고

총대를 멨다고 표현한 이유는 이차돈의 순교를 낮춰 부르려는 의도가 아니라

당대 신라사회에 불교가 들어온 것은

조선시대 천주교가 들어온 것과는 매우 다른 점도 있었는데

신라 내부에서도 이미 들어온 불교와 이웃나라 고구려,백제가

이미 불교를 받아들인 것들을 보고 분명 수용을 해야하기는 했다는

생각들을 했다면 조선사회에서는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과

오랜 교류한 주변나라가 아닌 어디있는지도 모르는

먼 나라인 서양에서 천주교가 들어왔다는 점 등에 큰 거부반응을 보이며

탄압했던 것의 차이라 할 수 있고

이에 신라 사회는 불교를 받아들이긴 해야하는데 딱히 나서는 자도 없고,,

하며 여러 어수선한 분위기가 감돌다가

이에 이차돈이 직접 나서서 신라 사회에 '충격요법'을 사용하게 된 거 같습니다,,

즉 이미 법흥왕과 짜고 자의적 탄압을 받게 되었다고 할 수 있고

(반대로 조선시대 천주교는 조선 지배층뿐만

아니라 왕실에서도 거부감이 컸다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이차돈의 순교로 불가사의한 일이 일어나자

신라 사회는 공식적으로 불교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이차돈은 한국 불교사에서 그만큼 큰 비중이 있는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실제 불교의 가치에서 중요한 사상이 불살생,

생명존중 사상으로서 순교라는 방식이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자신의 신념을 가지고 살아갔던 수많은 위인들의 모습들이 생각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고구려,백제에 비해 우여곡절이 많았던 신라의 불교수용은

이차돈의 순교로 시작되었다 할 수 있고

통일된 종교인 불교의 수용은

고등종교로서 국론을 통합할 수 있었고

'왕이 곧 부처'라는 사상으로 왕권강화에 기여했으며

'호국불교'로 국가를 지키는 의도로도 사용되었으며

그렇게 삼국시대의 중앙집권화를 나타내는 중요한 지표라 할 수 있었고


이차돈의 순교와 법흥왕의 의지로 그렇게 신라에

불교는 공식적인 종교로 자리잡았고

이후부터 신라 왕실,사회에서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불교를 매우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됩니다

이는 분명 신라 사회 내부에서도 불교라는 새로운 사상,종교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으나 어떻게 수용해야 할 지를 몰라 머뭇거리다가

이차돈과 법흥왕의 의지로 불교 수용이 추진되어진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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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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