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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증왕 13년

6월 여름

우산국(울릉도와 독도)이 귀순해서

매년 토산물을 공물로 바치기로 했습니다


<김부식>우산국은 명주의 정동쪽 바다에 있는 섬인데

울릉도라고도 한다


그 섬(우산국)은 사방이 1백리 인데

그들은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항복하지 않았었습니다


이찬(신라 2등벼슬) 이사부가 하슬라주(강원도 강릉쪽)의 군주가 되었을 때

우산 사람들이 우둔하고도 사나우므로

위세로는 다루기는 어려우며

계략으로 항복시켜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곧 나무로 허수아비 사자


(사자는 호랑이와 달리

한국에 자생하지 않았지만 중국과 인도의 불교 등이 들어오며

서역의 문화,동물들이 신라 사회에 들어 왔을 수가 있다고 합니다)


를 만들어서

병선에 나누어 싣고

우산국의 해안에 도착했습니다


이사부 장군은 거짓말로


<이사부>너희들이 만약 항복하지 않는다면

이 맹수를 풀어 너희들을 밟아 죽이도록 하겠다


우산국의 백성들이 두려워해서 곧 항복했습니다


<라봉봉>아무리 우산국 사람들이 '우둔하고 사나웠다' 고 해도

정말 나무 사자를 두려워 했다기 보다

이미 지증왕대에 이르러 신라의 국력은

농업생산량 증가,시장 발달 등

점점 강하게 팽창하고 있었고

그만큼 군사력도 강해져 있었을 상태였을 것이고

지증왕이 발굴한 인물인 이사부 장군의 지휘에서

병선들과 군사들의 훈련상태도 우수했을 것입니다


섬 지역은 특히 옛날의 경우에는 고립된 지형이었기에

외부로부터 문물 발달이 늦고 또 대신 그만큼

침입이 적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로 인해 우산국 사람들이 '우둔하고 사나웠다' 고

기록되있었던 것 같고

그런 우산국 사람들도

단순히 허수아비 사자만을 두려워했다기 보다

우수한 병기와 군선, 무기로 무장한 신라 군사들이

우산국 해안에 도착하자 그 군세의 위압감에

항복하게 되었던 것 같고


나름 우산국 역시 섬이었고 외부와의 교류는 필수적이었기에

한국 동쪽 지방들과 교류하며 그 나라의 명맥을 유지하다가

신라 지증왕대에 이사부 장군에게 신라에 편입되게 된 것 같고


또 한국에서 이 기록이 중요한 것은

우산국은 울릉도 뿐만 아니라 독도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어느날부터 뜬금없이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하며

일본 영토라고 우기기 시작했는데(억지를 부린다는 '우기다' 라는

말이 정확합니다)

울릉도에서는 독도가 육안으로 보이고

한국 기록에 세종실록지리지나 여러 기록에서도 독도가

한국 고유의 영토임이 나오는데

우리가 일본 수도 도쿄가 한국 고유의 영토임을 우기면 안되듯이

또 일본에서 도쿄를 굳이 한국땅이 아니라고 증명할 가치가 없듯이

독도 역시 마찬가지라 할 수 있고

독도는 변방의 섬이었기에 도쿄와는 다른 지정학적 위치라 할 수 있어도

충분히 일본의 억지,거짓 주장에 반박할 사료가 이미 충분하며

일본인들은 독도를 일본땅이라 우기려 여러 자료들을 찾아봐도

점점 수많은 사료들이 한국땅이라고 진실을 말하는 것에

자기모순에 빠질 것입니다 실제로 그들의 심리는

그냥 변방에 있으니 한번 찔러보자는 마인드고

우리가 이것에 크게 휘말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독도는 수많은 기록,자료와 지증왕대 기록 등

엄연히 대한민국 고유의 영토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지증왕 15년

정월(봄)

아시촌에 소경 小京 을 설치하고

7월 가을에 6부와 남쪽 지방의 주민들을 옮겨 살게해서

이 곳에 도시의 면모를 갖추었습니다


(경주가 농업,상업의 발달로 점점 인구가 늘며 팽창하자

경상남도 함안의 옛 이름이라는 아시촌에 신도시를 건설해서

경주 여섯마을과 신라 남쪽 지방의 백성들을 이주시킨 것 같습니다)


지증왕이 붕어,사망했습니다


시호를 지증 智證 (슬기,지혜 지 智 증거,깨달음 증 證 )

이라 했습니다


<신라 신하들>아아 ! 임금께서는 지혜로웠으며 智 깨우친 證 임금이었기에

시호 諡號 (왕이나 사대부들이 죽은 뒤에 그 공덕을 찬양하며 추증하는 호)를

지증이라 올리겠습니다


신라의 시호법이 이때부터 시작됬습니다


<라봉봉>신라를 크게 발전시키며 대국의 초석을 닦은 지증왕은

저가 세종대왕 만큼이나 훌륭하다 생각하는 위인인데

저 생각에는 갑자기 나타나서 수많은 개혁들을 이뤄냈다기 보다

64세에 늦은 나이에 왕위에 올랐고

세종대왕이 22살에 젊은 나이에 왕위에 오른 것과는 달리

또 그만큼 젊은 나이에 왕위에 올라서 여러 시행착오를 겪은 것과는 달리

64세에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단기간의 재위기간동안 굵직굵직한 사업들을 이뤄냈다고 할 수 있고

실제 지증왕 기록 자체는 삼국사기에서 소략한 편이지만

매우 중요한 업적들이 다 적혀있다고 합니다

또 우산국 정벌 기사는 독도라는 한국 고유의 소중한 영토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기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단순히 어느날 갑자기 등장한 인물이라기 보다

오랜 기다림과 준비가 있었던 인물로 보이고

또 책을 매우 많이 읽은 인물 같습니다

저는 공부를 매우매우 중요하다 생각하고 있고

실제로 책을 1000권 읽은 사람과 3000권 읽은 사람의 미래는

30년뒤에 큰 차이가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지증왕이 수많은 개혁정책을 성공시킬 수 있었던 것도

책을 통해 옛 성인들의 지혜를 얻었던 것이라 생각하고

또 64세의 경험,연륜 역시 크게 작용했을 것이며

재위 첫기록부터 바로 악습이었던 순장을 폐지한 것도

나름 늙은 나이기에 급한 것도 있고

그만큼 신하들을 통솔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이 있었다는 것이라 할 수 있고

단기간의 즉위였지만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라는 말처럼

굵직굵직한 기록과 업적을 남기며 신라를 개혁시켰고

오늘날 한국인들의 근본,주류가 삼국을 통일한 신라라고 할 수 있는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지증왕대에 여러 개혁들로 신라 사회가 큰 성장을 했던 것으로 보고 있고

비록 지증왕이 다음 왕인 법흥왕이나 진흥왕에 비해 이미지 면에서는

밀리는 왕이지만 법흥왕이나 신라 최대 정복군주 진흥왕이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며

영토를 크게 확장할 수 있었던

그 배경에는 지증왕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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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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