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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쓰기 전에>지증왕의 음경(남성의 성기)의 길이는

1자 5치 (34.5cm,,) 나 되서 마땅한 신붓감을 구하지 못했다고

하고 이에 지증왕은 자신의 음경을 감당할 처녀를 수소문했고

이에 신라 신하는 숲속에 북 만한 똥(,,)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 똥의 주인이 어느 집안의 딸이었고

그 딸 역시 키가 7자 5치 즉 172cm의 큰 키였기 때문에

지증왕은 그녀를 궁중으로 불러서 왕비로 삼았다는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나오는데 이에 지증왕은

역사계에서는 성적 유머로(특정 대상을 비하하거나

모욕감을 준다기 보다 그냥 말장난이라 보시면 됩니다)

'왕자지증왕' (자지=남성의 성기) 이라는 별명이 있고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서,,

지증왕은 체홍대 體鴻大 체격이 컸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있기에 실제로

정말 성기가 컸을 수도 있고,,

혹은 성기가 크다는 것으로 왕의 위엄을 나타내려 했다는

해석도 있다고 할 수 있다고 하는데


실제 그의 체격이 컸다면 정말 성기가 크고 했고

오늘날 기준으로도 큰 체격이었기에

마땅한 부인을 얻기 어려워 하다가 나온 이야기가 아닐까 싶고

지증왕의 음경 크기 이야기는 삼국사기가 아닌

삼국유사에 기록되있기에

이런 이야기는 이후 삼국유사 이야기를 쓸 때

자세히 하겠습니다


그러면 신라 사회에서 '불교를 공인한 왕'으로 유명한

법흥왕 이야기입니다

그의 시호중 법 法 은 불법 佛法 , 즉 불교를 상징하는 의미입니다

(흥 興 자는 일으킬,시작할자로 불교를 시작하게 한 왕이라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신라 23대왕 법흥왕 김원종

재위기간 26년 514~540년


법흥왕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름은 원종이며


<김부식>'책부원귀(중국 송나라 책)'에는

성이 '모'이며 이름은 '태'라고 기록되어 있다

('김'씨인데도 '모'라는 성이 있는 것은

당대 신라사회에 중국식 성씨제도가 잘 들어오지 않아서라고도 합니다)


지증왕의 맏(첫째)아들입니다


그(법흥왕)의 어머니는 연제부인입니다

그(법흥왕)의 왕비는 박씨이며 보도부인입니다


법흥왕은 키가 7척 (161cm으로 아버지와 어머니에 비해서는

키가 작았던거 같습니다,,) 이고

성품이 관대해서 사람 사귀기를 좋아했습니다


법흥왕 3년

정월(1월) 봄

법흥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지냈습니다


양산 우물에서 용이 나타났습니다


법흥왕 4년

4월 여름

처음으로 병부 兵部 (군사에 관한 사무를 관장한 관청, =국방부)

를 설치했습니다


(그 전까지는 대충 마을 주민들[물론 일반 마을보다는

당연히 훨씬 컸습니다,,] 모아놓고

칼과 활 등을 들고 외국에 쳐들어가는 부족적 모습의 신라였다면

지증왕 이후부터 신라는 점점 중앙집권화 되며

법흥왕대에 처음으로 군사에 대한 관청을

설치하고 군사일을 담당하게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법흥왕 5년

2월 봄

주산성을 쌓았습니다


법흥왕 7년

정월(1월) 봄

법령(율령)을 반포하고

처음으로 관리들의 공복 公服 (관원이 조정에 나아갈 때

입는 관복)을 제정했습니다

붉은 빛과 자줏빛(보라색)으로 등급을 표시했습니다


<법흥왕>이제부터 고위 관료는 자주색(보라색) 옷을 입고

그 밑 관료는 붉은색 옷을 입고 출근하도록 하여라 ~


<등급 낮은 신라 신하>후에에 ~ 저는 어제 시장에서 보라색으로

옷을 맞췄습니다 !!


<법흥왕>그게 요즘 세계적 추세다 이기야 !

왕이 하라면 하라카이 !


<등급 낮은 신라 신하>ㅠ


(역시 중앙집권화적 모습을 보여주는 기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관료들의 색을 조정한 이유는

자주색[보라색] 같은 경우는 당대 매우 비싼 염료였는데

나라에서 사치를 장려하면 안되기에 관리의 등급에 따라

의복 색을 조정하려 했던 당대인들의 의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법흥왕 8년

양나라에 사신을 파견해서

특산품을 바쳤습니다


법흥왕 9년

3월 봄

가야국왕이 사신을 보내서 혼인을 청했습니다

이찬(신라 2등벼슬) 비조부의 누이(여동생)를 보냈습니다


법흥왕 11년

9월 가을

법흥왕이 남쪽 국경을 순행하면서

국토를 개척했습니다

가야국왕이 와서 회견(만남)했습니다


(즉 가야는 신라의 성장에 큰 위협을 느끼고

신라에 가까워지려 했고 신라는 이후

대놓고 남쪽의 가야쪽에 '개척'이라는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가야국왕은 그런 신라 법흥왕과 만나서

법흥왕에게 굽히며 평화를 유지하려 했던거 같습니다)


법흥왕 12년

2월 봄

대아찬 (신라 5등 벼슬) 이등을 사벌주 군주 軍主 로 임명했습니다


<라봉봉>태어났는데 아버지가 에디슨이라던가

아인슈타인 혹은 세종대왕 이런 인류 역사상 천재라 불린

위인이었다면 단순히 그것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는

표현보다 더한 그 이상의 클래스가 있는 출생이었다고 할 수 있겠고

(솔직히 이거는 금수저들도 부러워 할 출생일 것입니다,,)

저는 한국사에서는 조명이 다른 인물들보다는 덜하지만

지증왕을 그런 위인으로 보고 있습니다


음 태어나자마자 그런 집안에서 태어났다면

아마 훌륭한 부모님을 직접 보고 자라며

'밥상머리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을 것이고

대부분 그런 부모들의 자녀 역시 부모만큼은 못하더라도

부모가 워낙 쌓아놓은 공덕이 많았기에

대부분 순탄한 인생을 사는 케이스들이라 할 수 있는것 같고

법흥왕 역시 그런 출생의 인물이었고

그런 순탄한 인생을 살았던 인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그에 비해 아마도 그의 아버지 지증왕은

왕가의 적통의 출생으로 왕이 된 인물도 아니었고

고생을 많이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어찌됬건 그,법흥왕은 지증왕의 맏아들로서

지증왕은 왕가의 적통 출생의 왕이 아니었지만

법흥왕은 지증왕의 맏아들이었기에

왕가의 적통 출생의 왕이었고 (솔직히 적통이니 방계니

하는게 사실 다 이런 식입니다,,)


지증왕이 워낙 늦은 나이에 왕위에 올랐기에


(지증왕은 왕이 된 후에 결혼했다는데

64세에 왕위에 올랐기에 이미 왕이 되기전

연제부인과의 사이에서 법흥왕을 낳은거 같고

이거는 여러 이야기들이 섞이거나 하며 생긴 오류 같습니다)


태자였던 김원종(법흥왕)은 그런 아버지를 도우며

비록 아버지가 방계 출신이었지만

워낙 능력이 출중한 인물이었기에

아버지에게 국정을 배우기도 하고 도우기도 하며

입지를 넓혀갔을 가능성이 있고

그렇게 차분,무사하게 권력승계를 해서 왕이 되게 된 거 같고


왕이 된 이후 신라는 이미 여러 개혁정책 등으로

인구는 증가하고 농,상업의 발달로 곳간은 풍요로워 지며

대국화 되고있던 시기라고 할 수 있었을 것인데


훌륭한 아버지에게 국정들을 배우며

그 역시 훌륭한 정치들을 했다고 할 수 있었고

세종대왕의 맏,첫째아들이었던

문종이 생각나고 문종 역시 아버지를 닮아

훌륭한 정치를 했던 왕이었지만 문종은 너무 일찍 사망해서

이후 조선에 대혼란이 일어나게 됬다고 할 수 있는데

법흥왕은 26년을 즉위하며 오랜기간동안

별다른 무리 없는 정치를 했다고 할 수 있고

그런 평화기에 축적된 힘 등을 바탕으로

신라인들은 가야를 합병,정복하고

이후 삼국을 통일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법흥왕 기록들을 보면

아버지 지증왕이 신라를 중앙집권화 시키며

굵직굵직한 기록들을 남긴 것과 같이

법흥왕 역시 재위 기간 내내 신라의 중앙집권화 체제를

만들어가려 했었다고 할 수 있고

병부(국방부)를 설치하고 율령을 반포해서

신라가 점점 부족국가가 아닌

제도와 법등이 있는 중앙집권화 국가로 바뀌어 갔음을 알 수 있고

(중앙집권화는 단숨에 된다기 보다 여러 왕들에 이어

차근차근 이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관리들의 관복을 정해서 계급에 따라 옷 색을 바꾸어 입게 했고

가야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점점 중앙집권화를 완성시키고

또 점점 쌓여지는 국력을 외부로 팽창해 갔던 시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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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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