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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흥왕 18년

3월 봄

유사(관리)에게 명해서 제방을 수리했습니다


4월 여름

이찬 철부를 상대등 上大等 (신라 귀족권력을 대표하는 최고 관직으로

신라 1등벼슬이 이벌찬이라면 상대등은 이벌찬과는 다른

귀족들의 대표격으로서 국회의장과 같은 개념이라 볼 수 있습니다)에

임명하고

국사를 총괄하게 했습니다


<김부식>상대등이라는 벼슬이 이 때부터 시작되었으니

이는 지금의 재상과 같다


법흥왕 19년

금관국주 金官國主 (국주 國主 =나라의 주인=왕) 김구해가

왕비 및 그의 세 아들인

맏아들 노종,

둘째아들 무덕,

셋째아들 무력(김무력, 신라 삼국통일의 주역 김유신 장군의 할아버지)

과 함께 금관국(금관가야)의 보물을 가지고 항복하여 왔습니다


<금관가야 국왕 김구해>(이미 신라와 우리 가야의 격차는

너무나도 크게 벌어졌다,, 이럴바에는

신라에 기대는 것이 옳을 것이겠지,,)삼가 금관국주 김구해는

신라국왕께 항복하려 하옵니다


<법흥왕>(음,, 이게 왠 떡이냐,,) 아아 ! 잘 오셨소 !


법흥왕이 예에 맞게 그를 대우하여

상등 직위를 주고

금관국을 그의 식읍으로 주었습니다

아들 무력 (김무력 金武力)은

벼슬이 각간(=이벌찬, 신라 1등벼슬)에 이르렀습니다


<라봉봉>금관가야가 법흥왕에게 항복한 배경에는

이미 신라는 강대해지며 가야를 크게 위협하고 있었고

삼국사기에서는 그냥 항복한거로 나오나

삼국유사에서는 신라가 쳐들어오자 병력차이가 너무 커서

어쩔 수 없이 항복했다고 나오고

일본서기에는 예상못한 습격에 당했다는 식으로 나온다고 합니다


공통적인 사실은 이미 신라와 가야의 국력차는

이미 크게 벌어져 있었고

금관가야 국왕은 어떠한 수도 쓸 수 없었기에

신라에게 항복을 하기로 했던거 같습니다,,


비교적 평화적으로 신라는 금관가야를 '흡수' 했고

또 구형왕(김구해)의 셋째아들 김무력은 진흥왕대에 신라 장군으로

활동하고 또 김무력의 손자는

신라 삼국통일의 주역이자 한국사의 위인 김유신 장군이 되어서

신라와 당대 동아시아를 호령하는 인물이 되었으니

아이러니 한 일이기도 합니다


또 다른 저의 해석,생각으로는

이러한 이야기 말고도 당대 가야 민초,백성들의 삶에는

가야에서는 지배자가 죽을 때 사람들을 묻는 악습인

'순장'과 두개골이 굳기 전인 어린 아이시절

머리를 납작하게 눌러서 납작하게 성형시키는 '편두'라는

악습이 있었는데

편두는 어느 때인지는 몰라도 점점 사라져 갔겠으나

순장은 일단 신라에서는

지증왕때 확실히 없어졌다고 할 수 있는데

가야는 멸망 전까지 순장을 유지했고

이에 가야 백성들은 이웃나라 신라가

그런 악습을 폐하고 빠르게 성장하는 모습들을 보며

가야 정부에 대한 환멸을 느꼈을 수도 있고

계속 유지했다가는 자신들도 언제 순장되서 죽을지 모르기에

민심과 백성들이 점점 가야를 이탈하게 된게 아닐까 싶고

바로 이웃나라 신라는 크게 발전하고 있었고

그런 도피의 아주 좋은 장소였기에 점점 신라쪽으로

민심이 기울다가 결국 금관가야 왕이 어쩔 수 없이

신라에 자진해서 항복하게 된게 아닐까도 싶습니다


법흥왕 22년

상대등 철부가 사망했습니다


법흥왕 23년

처음으로 연호 年號 (왕이 재위기간동안 붙이는

칭호라 할 수 있습니다)를 정해서

건원 원년(1년)이라 했습니다


법흥왕 25년

정월(1월) 봄

외관 外官 (지방 관리)들이 가족을 데리고 부임해도 좋다는

교서를 내렸습니다


법흥왕 27년

7울 가을

법흥왕이 붕어했습니다


시호를 법흥 法興 이라 했습니다


<신라 신하들>임금님께서는 불교 法 를  시작 興 하셨으니

법흥이라는 시호를 올리겠사옵니다


애공사 북쪽 봉우리에 장사지냈습니다


<라봉봉>그렇게 법흥왕은

'신라의 중앙집권화를 완성시킨 왕'

으로 이야기 되고 있으며

훌륭한 아버지의 국정을 이어 훌륭한 정치를 했고

나름 당대 신라 사회가 안정된 모습을 보이며

큰 성장을 이루었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가 있습니다


그런 개혁 정책들은 이전 이야기에서 했다고 할 수 있고,,

이번 이야기인 금관국(금관가야) 병합은

당대에 신라의 국력은 커져가는 상황이었고

이에 부담을 느낀 금관가야에서

스스로 항복을 청해왔다고 할 수 있고

점점 가야는 힘을 잃고 쇠락의 길을 걷다가

법흥왕 다음왕인 진흥왕대에 이르러

신라에게 가야의 맹주였던 대가야가 정복됨으로서

완전히 가야는 멸망하게 됬고

금관가야던 대가야던 당대 강성해가던 신라에

이미 큰 격차가 벌어졌고 당대 가야를 기록한 역사서마다

이야기는 다를 지언정

가야는 중앙집권화 국가로 발전하지 못했고

내정도 열악하고 후진적이었기에 이미 국운이 다해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야 역시 한국의 고대국가이자

영광의 시기 역시 있었기에 이후 삼국유사 이야기를 할 때

자세히 이야기 하도록 하겠고

하여튼 당대 가야는 점점 쇠락하고 있었고

신라는 점점 강성해지며 슬슬 전통적 강국이었던

백제나 고구려에서도 신라에 대한 위기감등이

생겨났었을 시기로 보여집니다

그렇게 불교를 공인했으며 신라 중앙집권화를 강화한

법흥왕에 대한 이야기였고

다음 이야기는 신라 최대의 정복군주이자

'삼국시대 신라 최전성기의 왕'으로 유명한

진흥왕의 이야기로

진흥왕은 고구려 광개토대왕,

백제 근초고왕과 더불어

신라의 '최고 정복군주' 위치에 있는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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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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