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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쓰기 전에>진흥왕 이야기를 쓰기 전에

법흥왕 이야기에서

'이차돈의 순교, 신라에 불교를 공인한 법흥왕' 이야기를 썼을 때

못 쓴 이야기가 있는데

이차돈의 목에 베어졌을 때 붉은 피가 아닌 하얀 피가 나왔는데

실제 붉은 피가 아닌 하얀피를 가진 사람이 있고

이는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현상은 아니라 하고

이차돈은 자신의 몸에 흰피가 흐른다는 것을 알고

스스로의 목을 베게 함으로서 신묘한 일이라

사람들에게 알림으로 불교를 전파하려 했다고도

해석할 수가 있다고도 합니다


그만큼 신라는 불교 수용에서 극심한 진통이 있었으나

법흥왕 바로 다음왕인 진흥왕은 불교를 매우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이후 신라는 여러 불교계 인물들이 나오며

불교 국가화 되게됬다고 할 수 있습니다,,


틈틈히 놓친 글들도 써야겠다 싶으면 앞으로도

이렇게 써야 할거 같고

다시 이번 이야기인 삼국시대 신라 최전성기 왕이라 이야기 되는 인물이자

신라 최고의 정복군주라 불리는 진흥왕 이야기입니다


<역사를 편찬한 진흥왕>


신라 24대왕 진흥왕 김삼맥종

재위기간 36년 540~576년


진흥왕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름은 삼맥종입니다


<김부식>혹은 심맥부라고도 한다


이 때 그의 나이 일곱살이었습니다


그는 법흥왕의 아우(동생) 갈문왕 입종의 아들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김씨부인이며

법흥왕의 딸입니다(근친혼,,)

왕비는 박씨 사도부인입니다

진흥왕이 (당시) 어렸으므로

왕태후(왕의 어머니)가 섭정 攝政 (임금을 대신하여 정치를 함) 했습니다


진흥왕 원년(1년)

8월

대사령(죄수를 석방하거나 하는 일)을 내렸습니다


문무관들에게 작위 한 급씩을 올려 주었습니다


10월 겨울

지진이 있었습니다

복숭아 나무와 오얏(자두)나무에 꽃이 피었습니다


진흥왕 2년

3월 봄

눈이 한 자나 쌓였습니다


이사부(이사부 장군)를 병부령(국방부 장관)으로 임명하고

중앙과 지방의 군대에 관한 업무를 맡게 했습니다


백제가 사신을 보내와서 화친을 청했습니다

진흥왕이 이를 허락했습니다


('허락' 이라는 말이 나온거로 보아서

당대 화친을 했음에도 신라가 우세한 위치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라 할 수 있는거 같습니다)


진흥왕 5년

2월 봄

흥륜사가 준공됬습니다


3월

출가해서 승려가 되어 불교를 믿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진흥왕 6년

7월 가을

이찬(신라 2등벼슬) 이사부가 진흥왕에게,,


<이사부>나라의 역사라는 것은

임금과 신하들의 선악 善惡 (착함과 악함) 을 기록하여

좋고 나쁜 것을 만대 후손들에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를 책으로 편찬해놓지 않는다면

후손들이 무엇을 보겠습니까 ?


라고 말했습니다

진흥왕이 깊이 동감하고

대아찬(신라 5등벼슬) 거칠부 등에게 명해서

선비들을 널리 모아서

그들로 하여금 역사를 편찬하게 했습니다


진흥왕 9년

2월 봄

고구려가 예와 함께 백제의 독산성을 공격하자

백제가 구원을 요청했습니다


진흥왕은 장군 주령을 보냈습니다

주령은 정병 3천을 거느리고 그들을 공격했습니다

주령은 포로를 많이 잡아 왔으며 죽인 자도 매우 많았습니다


(삼국의 중앙 집권화가 모두 완료되는 시점부터는

전투,소규모 부족적인 싸움이 아닌

수만 단위의 전쟁화 되고 기록도 거칠고 잔인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과학기술 발달,농업생산량 증가와 인구증가 등으로

각국은 더 많은 군대를 편성했고

점점 국가는 부족적인 모습이 아닌

중앙집권화 과정을 거치며 대규모화 되어

지역적 전투가 아닌 전쟁의 양상으로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진흥왕 10년

양나라가 사신과 유학승 각덕 편에

부처의 사리(석가모니,부처님 사후 화장한 뒤 나온 구슬 모양의 것)를 보내왔습니다

(뭔가 사기일거 같습니다,,)


진흥왕이 백관들로 하여금 흥륜사 앞길에서

그들을 맞이하게 했습니다


진흥왕 11년

정월(1월) 봄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을 빼앗았습니다


3월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을 점령했습니다


진흥왕은 두 나라 군사가 피로한 틈을 이용해서

이찬 이사부로 하여금 그들을 공격하게 해서

두 성을 빼앗아서 성을 증축했습니다

군사 1천명을 그곳에 머물게 해서 수비하게 했습니다


(이를 둘 사이의 다툼을 틈타 제 3자가 얻는 이익이라는

'어부지리'라고도 표현 할 수 있지만

이런 어부지리도 힘이 강성해야 가능했던 것으로

만약 신라의 국력이 약했다면 자칫 고구려,백제에게

양쪽으로 역공을 받아서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다'라는

말같이 될 수도 있었고 그만큼 신라가 당대 강성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라에 귀순한 가야인 우륵>


진흥왕 12년

정월(1월) 봄

연호를 개국 開國 으로 바꾸었습니다


3월

진흥왕이 순행중에 낭성에서 묵으며

(가야 사람) 우륵과 그의 제자인 이문이

음악을 잘한다는 소문을 듣고

특별히 그들을 초청했습니다


진흥왕은 하림궁에 머무르며

음악을 연주하게 했고

두 사람은 각각 새(새로운) 노래를 지어서 연주했습니다


이에 앞서

가야국의 가실왕이 열 두달을 음율로 상징하는

'십이현금'을 만들고 우륵으로 하여금 이에 맞는 악곡을

짓게 했습니다


그러나 가야국이 혼란스러워지자

우륵은 악기를 가지고 우리나라(신라)로 귀순해왔었습니다


이에 따라 그 악기의 이름을 '가야금'이라 했습니다


(같은달) 진흥왕이 거칠부 등에게 명해서

고구려를 공격하게 하고

이를 기회로 열 곳의 군을 빼앗았습니다


진흥왕 13년

진흥왕이 계고,법지,만덕 세 사람으로 하여금

우륵에게서 음악을 배우도록 했습니다


<진흥왕>짐도 음악이 너무 좋은데

그대같은 인재를 얻어 더욱 든든하오

한 대에서 끝나기는 너무도 아까운 노래들이니

그대는 제자들을 양성해 그것을 계승토록 하시오


<우륵>삼가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우륵은 그들의 재능을 참작해서

계고에게는 가야금을 가르치고

법지에게는 노래를 가르치고

만덕에게는 춤을 가르쳤습니다


(우륵은 한국사 위인으로 가야금을 만든 인물로 유명하나

위 기록같이 가실왕이 만들었고

우륵이 그 악기를 가지고 신라에 귀순했기에

악기의 이름이 가야금이 된 것인데

대신 우륵은 가야금의 악곡을 만들은 인물이고

한국 음악사의 중요한 위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야금을 만든 가실왕도 사실 대단해보이나

악기제작에 집중하느라 국정운영은 실패했던 인물 같습니다,,)


학업이 끝나자

진흥왕이 그들로 하여금 연주하게 하고는


<진흥왕>전일 낭성에서 (우륵이 연주해서) 듣던 소리와 다름이 없다


라고 말하며

후하게 상을 주었습니다


<라봉봉>진흥왕은 무려 일곱살에 왕위에 올랐고

당대는 아무래도 진흥왕 주도보다는

섭정했던 지소태후(왕태후)나 이사부 같은

선대의 명신들의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했을 수도 있으나

워낙 선대에 이뤄진 사업들,공덕들이 많았기에

진흥왕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음에도

그럼에도 신라 왕실의 왕권은 당대 매우 강했었을 것 같습니다


아직 본격적인 영토확장 기록은 없다해도

이미 신라의 국력은 왕성해서

고구려,백제 사이에서 강력한 힘을 내뿜고 있었고

슬슬 다음기록부터 '신라 최고의 정복군주'라고 불리는

진흥왕 답게 영토가 크게 팽창하며 모아왔던 국력이

급격하게 팽창함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이번 기록의 독산성 전투 역시 중요한 전투로

이 전투로 인해 고구려는 경기도부터 강원도까지

한강유역을 모두 백제와 신라에 내주고

전성기를 마감하게 됬다고 하고

이때부터 점점 신라인들은 더이상

백제와 동맹을 맺어야 할 만큼

약해지지 않았음을 자각하게 되는 시점이었던거 같고

이로 인해 획득한 한강유역의 땅을 두고

곧 백제와 신라는 대전투,관산성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이 전투로 인해 백제 역시 큰 쇠락의 길을 가게됬고

신라는 한강유역의 완전한 점거로 이어져

곡창지대와 중국과의 직접 교역할 수 있는 거점을

확보하게 되고 신라는 이후부터 백제와 고구려

두 대국을 상대하는 양면전을 벌이며

거의 군사국가화 되고 극도로 상무적인 기풍이 생겨나게 됩니다,,

관산성 전투 이야기는 다음 이야기때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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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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