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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영토를 크게 넓힌 정복군주 진흥왕>


진흥왕 16년

비사벌(경상남도 창녕)에 완산주를 신설했습니다


10월 겨울

진흥왕이 북한산(오늘날 서울)을 순행해서

국경을 정했습니다


11월

진흥왕이 북한산에서 돌아와서

교서를 내려서 순행했던 주와 군에

1년간의 납세를 면제해주고

해당 지방 죄수 가운데 두 종류의 사형수를 제외하고

나머지를 모두 석방하게 했습니다


진흥왕 17년

7월 가을

비열홀주(함경남도)를 설치했습니다

사찬 성종을 그곳의 군주 軍主 로 임명했습니다


진흥왕 18년

국원(충청북도 충주시)을 소경(작은 수도)으로 만들었습니다

사벌주를 없애고 감문주를 설치했습니다

사찬 기종을 그곳의 군주로 임명했습니다

신주를 없애고 북한산주를 설치했습니다


진흥왕 19년

2월 봄

귀족의 자제들과 6부의 호민들을 국원 國原 (충청북도 충주)으로

이사하게 해서 국원을 충실하게 했습니다


(충청북도는 당대 한강유역으로 가는 교통의 요지였고

신라 입장에서는 경주와 한강유역을 연결해주는

주요 통로였기에 귀족 자제들과

수도 여섯마을 부유한,뛰어난 백성들을 충주로 보내서

그곳을 발전시키려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충주를 소경, 작은 수도로 삼았음은 그만큼

중요한 자리라 할 수 있고 충주를 키워서

한강유역을 튼튼히 하려는 의도도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실제 이후 백제 무왕,의자왕에게 경상남도까지

공격받았던 신라는 당시에도 경주에서 먼 한강유역은

뺏기지 않았고 신라인들은 한강, 충주, 경주를 연결하는

방어라인은 튼튼히 구축해 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후 백제는 그런 주요 방어지역보다는

약점이었던 다른 방향들을

공격하며 수도 경주를 위협했고 이에 신라인들은

큰 위기의식을 느끼고 중국 당나라와 나당동맹으로

삼국통일을 시작하게 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내마(=나마, 신라 11등 벼슬) 신득이 포와 노를 만들어

(혹은 포노라고 하는데 포노가 정확한 해석 같고

포노는 삼국시대 원거리 발사무기로 성안에 고정시켜서

수성전에 쓴 노로 노는 석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쳤으므로 이를 성 위에 설치했습니다


<신라의 가야 흡수>


진흥왕 23년 (별개로 진흥왕 기록은 되게 깁니다,,)

7월 가을

백제가 변경의 주민들을 침탈했습니다


진흥왕은 군사를 보내 싸워서

1천여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습니다


9월

가야가 모반했습니다


진흥왕은 이사부(지증왕때 우산국[독도]을 정복하신 인물로

진흥왕까지 활약한 당대 신라의 백전노장이었습니다

당대 신라인들은 이.사.부 이름 석자만 들어도

든든했을 것입니다)로

하여금 그들을 토벌케 하고

사다함으로 하여금 이사부를 돕게 했습니다


사다함이 기병 5천을 거느리고 먼저 전단문으로 들어가서

흰 기를 세우자

성 사람들 전체가 둘여워해서

어찌 할 줄을 몰랐습니다


이사부가 군사를 인솔하고 그 곳에 도착하니

그들이 일시에 모두 항복했습니다


(가야가 말년에 한번 신라의 영향에서 벗어나려다

곧바로 이사부 장군이 출동하자

곧 두려워 항복하게 된 거 같습니다,,

그렇게 가야[대가야]는 진흥왕대에 이르러

완전히 멸망했고 모든 가야 세력은 완전히

신라에 흡수되 경상도 지역 전체는

신라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됬습니다

또 이사부 장군의 기록은 여기까지가 끝입니다)


공로를 평가했는데

사다함이 으뜸이었기에

진흥왕이 좋은 밭과 포로 2백명을 상으로 주었습니다


사다함은 세 번이나 사양했으나

진흥왕이 강력히 권했으므로

포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사다함은 이들을 풀어주어

양민(평민)으로 만들고 밭은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사다함>이미 나라잃은 백성들을

또다시 노예로 만들 수는 없는 법이다

신라와 가야는 예로부터 원래 같은 겨레(민족)였기에

또한 그럴 수가 없는 법이다


그대들은 앞으로 신라의 백성으로 살아라


백성들이 이를 훌륭하게 여겼습니다


<라봉봉>진흥왕은 그렇게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며

넓어진 영토를 관리하기 시작했고

신라인들은 강력한 방어라인을 구축하며

이후 삼국통일 전쟁기에도 수도 경주에서 멀었던 한강유역만큼은

결코 뺏기지 않았고 그로 인해 교통이 편리한 한강유역으로

주변국과의 외교에서 우위에 설 수 있었고

풍요로운 곡창지대를 얻어 풍요의 기반을 마련할 수가 있었습니다


특히나 한강유역은 한국 삼국시대 역사에서 각 삼국이

한번씩 차지한 적이 있는 영역으로

삼국의 각축장(서로 이기려고 다투고 있는 곳)이 된 지역이었으며

고려시대에도 남경으로 불리며 중요시 됬고

조선시대 조선의 500년 수도 한양이었고

오늘날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 특별시가 자리잡은

입지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곳인데

이 유역을 차지한 나라의 당대를 '전성기' 라고 부르는

중요한 지표가 되었고

신라의 한강유역의 완전한 차지와 그에 대한 굳히기가 시작되었고

신라는 이후에도 백제,고구려와 달리 한강유역을 결코 빼앗기지 않으며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진흥왕은 대가야를 정복해서

신라의 영토로 만들었고

이로인해 가야는 역사에서 막을 내리고

가야인들은 신라로 완전히 흡수되서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게 된 것이며

이후부터는 가야계 출신의 인물들이 나타나고

삼국통일의 주역이자 한국사 위인인 김유신 장군 역시

가야계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야는 오랫동안 신라와 교류했던 나라였고

나름 평화적으로 신라에 흡수됬기에

역시 신라계 출신에 비해 차별은 있었지만

신라 중앙 관직에 진출하는 등 나름 좋은 대우를 받았던 거 같고

김유신 장군이 그 정점에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 최대 성씨가 가야계 성씨인 김해 김씨입니다,,


또 가야의 멸망의 원인으로는

저 생각에는 이미 신라는 폐지했던 악습인

지배층이 죽으면 그를 모시던 사람을 같이 묻는

악습이었던 '순장'이 멸망때까지 유지됬고

이에 가야 지배층,피지배층 할 거없이

언제 자신들도 매장당할지 몰랐기에

서로 불신하기도 했을 것이고

가야 지식인들도 그런 악습이 없던 신라로 도피하거나 하며

점점 가야를 이탈하고 이로 인해 가야와 신라의 국력차는

더 크게 벌어지다가 신라에 흡수되게 된거 같기도 합니다


악습이 법적으로 금지됬던 신라는 진흥왕때

신라가 가야를 완전히 흡수함으로서

순장은 한국역사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고 하고

(다만 발해에서는 순장이 남아 있었다고도 합니다)

중국에서는 명나라때까지도 순장이 있었던 거로 보아서

그래도 한국인들은 신라인들의 덕으로

수많은 희생을 막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다시 진흥왕 이야기로 가면,,

진흥왕때 신라인들은 동쪽은 아무래도 이미 신라가

동쪽으로 자리잡아있었기에 제외하더라도

서,남,북 으로 영토를 크게 팽창하던 시기였고

당대 신라인들은 백전백승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고 할 수 있으며

당대 신라인들의 국력과 자신감은

삼국중 최고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 이야기때 쓸 것인 진흥왕 말년의 이야기는

진흥왕은 점점 즉위 후반기로 갈수록

인도 아소카왕이 그랬듯이

초기에 수많은 정복전쟁을 하며 영토를 확장한

진흥왕은 점점 전쟁으로 인한 죽음 등을 보고

불교에 심취하게 되었고

말년의 진흥왕은 불교에 심취하며

그런 전쟁으로 인한 죄책감을 떨쳐내려 했던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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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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