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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22대왕 지증 마립간 이전 이야기에서 못썼던 이야기를 더 하자면,,

그렇게


'담력이 뛰어났다'


는 지증 마립간은 신라 사회에서 번번히 행해졌던

순장(죽은 지배자의 무덤에 그를 모시던 사람들을

같이 죽이거나 생매장 하는 악습)을 담대하게,용기있게 금지시켰고

(그 전까지는 신라인들도 그냥 눈치껏

두려움속에 살아왔을 것입니다,,)


악습이었던 순장을 폐지한 지증 마립간은

같은달에 소를 이용하여 밭을 갈기 시작하게 했고

이를 '우경' 이라 하는데

그 전까지는 밭을 사람이 직접 괭이질을 하며 갈았을 것인데

소에게 장비를 달아서 더 빠른 속도와 강한 힘으로

밭을 갈을 수 있었기에 이는 농업 생산량 증가로 이어졌고

결국 신라의 인구 증가로 이어졌을 것이고

늘어난 거대한 인구와 커진 국력 바탕으로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게 되는거 같습니다,,


또 우경에 대해 이야기 할 점은

우경은 철기 농기구가 보편화 된

철기시대 혹은 중국에서는 '춘추전국시대' 부터 보편화 됬는데

춘추전국시대는 기원전 8세기 ~ 기원전 3세기인데

신라에서는 지증왕 3년인 502년에


'처음으로 소를 이용하여 밭을 갈기 시작하였다'


라는 기록이 나오기 때문에

그만큼 안습(안구에 습기차는, 눈물나는)하고 후진적이고

열악했던 한국 동남쪽 구석에 자리잡고 있었던

신라 내부의 상황을 보여주는 기록이라고도 할 수 있고

중국에 비해 거의 천년 가까히 뛰떨어졌다는 의미인데

오늘날에는 통신,교통의 발달로 세계간의 격차가

이렇게 천년이상 차이가 나지는 않지만

옛날같은 경우에는 이런 일들이 여럿 있었다고 할 수 있고

그러나 신라는 이렇게 늦게 문물이나 과학 기술을 받아들였음에도

지증왕이라는 현명하고 훌륭한 임금이 나와서

여러 개혁들을 '제대로' 이루어냈기 때문에

이후부터는 빠른 속도로 발전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고

한국 동남쪽에 자리잡고 있어서 넓은 영토의 고구려와

풍요로운 백제에 비해 온갖 제약이란 제약이 있었던 신라는

이후부터 매우 큰 성장을 하게 됬습니다


당대 신라인들에게도 우경이 이미 들어왔을 지도 모르지만

그것을 국가적으로 장려하고 보급한 것은

지증왕의 업적으로 보이고

지증왕은 그렇게 첫 업적인 순장을 금지시킨 이후부터

14년이라는 당대기준으로 짧다면 짧은 재위기간동안

굵직굵직한 개혁들을 계속 시행하고 성공시키게 됩니다,,


그렇게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서,,


지증 마립간 4년

10월 겨울

여러 신하들이 지증 마립간에게 말했습니다


<신라 신하들>시조(신라 1대왕 혁겨세 거서간 박혁거세)가

나라를 창건한 이래로

나라 이름을 아직 정하지 못한채 (,, 쿨한 신라인들은 건국 이후 500년동안

나라 이름을 정하지 않았던거 같습니다,,)

사라라고 부르기도 하고,

사로라고 부르기도 하였으며

또는 신라 新羅 (새[새로울] 신 新 , 망라할,그물 라 羅)라고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저희들은

신 新 은 덕업 德業 (어질고 착한 업적이나 사업) 이

나날이 새로워진다는 뜻이요


라 羅 는 사방을 모두 덮는다는 뜻이므로


신라 新羅 를 나라 이름으로 삼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예로부터 나라의 군주를 살펴보면


모두 제 帝 나 왕 王 으로 칭호를 삼았는데

우리 시조가 나라를 창건하고

지금까지 22대가 되도록

오직 방언(고유어)으로 왕호를 삼았을 뿐

아직도 존귀한 칭호를 정하지 못했으니


이제 여러 신하들이 한 뜻으로

삼가 신라국왕 新羅國王 이라는 칭호를 올립니다


지증 마립간이 이를 따랐습니다


<지증왕> 왕 王 은 맨 윗 글자가 하늘, 맨 아랫 글자가

땅을 나타낸다면 곧 왕은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 세상을

잇는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겠구나


마립간이 말뚝이라는 의미로 권위를 상징한다면

왕은 하늘의 뜻을 따르고 백성들을 위하는 자리라고 할 수 있겠지

좋은 칭호로다


<신라 신하들>(역시 똑똑하시군,,) 좋은 해석이시옵니다 ~


<라봉봉>지증 마립간은 그렇게 신라의 마지막 마립간으로

비록 저는 한국인이 한국 고유어를 쓰지 않고

결국 중국식 왕호를 따라갔다는 점에서

안타까운 면도 있으나

당대 중국은 선진국이었기에 선진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 했던 신라인들의 노력이라고도 볼 수 있는거 같고


지증 마립간이 신라 마지막 '마립간'이라는 면에서

마립간이 옛,구,old 라는 의미라면

왕은 새,신,new 라는 해석이 가능할 거 같고

그동안 옛 시대인 마립간의 시대였다면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겠다는 지증왕대 신라인들의

다짐이라고도 생각되고


오늘날 혈연으로 상속되는 왕정국가의 '왕' 이라는 지위와

국민들이 투표로 선출하는 민주국가의 '대통령'이라는 지위가 다르듯이

나름 지증왕은 마지막 마립간이기도 했으나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가겠다는 의미로 '왕'이라는 용어를

왕호로 삼았던거 같고


공산주의 체제의 원조국가였던 소비에트 연방,

소련에서는 지도자를 서기장이라고 했는데

서기장 書記長 은 이름만 글을 맡아보는 사람이지

매우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고 자유주의 체제에서는

대통령이라고 보면 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소련 마지막 서기장은 고르바초프였는데

사실상 서기장 직은 차르,황제에 비유됬고

냉전체제가 끝나가고 소련에서 러시아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시기의 인물이었기에

지증 마립간이 지증왕이 된 것은

그런 소련이 생각나기도 하고


즉 신라 사회가 새로운 시대의 변화속에서

탈바꿈을 했던 모습들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지증왕(이제 마립간이 아닌 왕이라 쓰겠습니다) 5년

4월 여름

상복법 喪服法 을 제정해서 반포, 시행했습니다


(상복법은 상복 喪服 은 장례때 쓰는 예복인데

아마 저생각에는 지증왕은 악습이었던 순장을 폐지하기도 했기에

미국 링컨 대통령이나 인도 지도자 간디 같이

종교형 위인이었던거 같고 그런 성향답게

백성들이 장례때 쓰는 상복에 대한 법을 제정하게 된거 같습니다

장례는 가장 기초적인 문화였는데

이런 것에 대해서도 신라 정부가 주도적으로 정리했다는 것은

국가의 지배력이 백성들의 가정생활에 영향을 끼칠 만큼

강대해졌음을 뜻하고 신라 사회의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졌다고도

해석할 수 있으며 백성들의 기초적인 삶까지 살폈던

지증왕의 기록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9월 가을

일할 사람을 징발해서

파리, 미실, 진덕, 골화 등의 열 두개 성을 쌓았습니다


(이 역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만들었던

지증왕대의 기록이라 할 수 있고

한번에 12개 성을 쌓을 수 있던 경제력은

우경과 여러 개혁정책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지증왕 6년

2월 봄

지증왕이 직접 국내의 주와 군과 현을 정했습니다

실직주를 설치하고

이사부(한국사 위인 이사부 장군으로 우산국[독도]을

정복합니다) 군주 軍主 로 임명했습니다

군주라는 칭호는 이에서 시작됬습니다


<라봉봉>이사부 장군 역시 뛰어난 재능이 있던 장군이었고

그러나 신라 김유신 장군이나 조선 이순신 장군 같이

삼국통일전쟁기나 임진왜란같은 대전쟁기의 인물은 아니었고

세종대왕대의 북방을 개척한 김종서 장군같은

평화기의 장군 포지션이라 할 수 있겠고

역시 유능한 임금이었던 지증왕은

이사부의 재능이 있음을 알고 그에게

신라 군권을 맡기게 된거 같고

이사부 장군 역시 충성스러운 신하로서

우산국 정복 등 신라의 영역을 넓혀나간 한국사의 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임금에 그 신하' 혹은

'임금이 밝으면 신하는 곧다' 라는 말들이 생각나고


이사부 장군은 우산국 정복으로 신라의 제해권,

해상 영역을 넓혔을 뿐만 아니라

이후 진흥왕대에 대가야 병합에도 백전노장으로 활약하는

신라 천년사직 최고의 명장중 한명이며

저는 개인적으로

신라 초기 석우로,중기 이사부,삼국통일기 김유신, 통일신라 장보고

(+신라 말기, 후삼국 시대 왕건도 있으나 왕건은

신라인물이라기보다 고려 태조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4명의 신라 장군을 신라 최고의 명장이라 보고 있고

신라에 인물이 많았음을 알 수 있는 인물들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사부 장군은 지증왕이 발굴한 인물이었고

지증왕 사후에도 진흥왕대 까지도 신라 영토확장의

아주 중요한 역활을 했던 인물이고

그 역활을 이후 김유신 장군이 이어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행인것은 세종대왕 사후

세종대왕의 인재들이 수양대군,세조의 집권 이후

반토막 난것과 다르게

신라는 나름 지증왕의 태자였던 법흥왕이 재위를 오래 해서였는지

인재풀이 조선시대같이 '리셋(초기화)'되는 꼴까지는 가지 않았던거 같고

물론 법흥왕이나 진흥왕 역시

자신에게 맞는 신하들 위주로 국정을 운영했겠으나

이사부 장군은 수양대군에게 숙청된 김종서 장군과는 다르게

진흥왕대에도 백전노장으로서 활약하게 되었던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11월 겨울

처음으로 소관 부서에 명해서 얼음을 저장하게 하고

또한 선박의 이용을 제도화 했습니다


(얼음 저장까지 할 정도로 선진적이어던 그의 정책을 보여주고

선박의 이용을 제도화 함으로서 신라는 해상력까지 갖추게 되고

이후 백제를 제치고 해양대국이 되는 기틀을 마련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라인들이 이후 나당전쟁 당시 기벌포 전투[해전]에서

초강대국이었던 당나라군을

해전에서 제압할 수 있었던 이유 혹은

통일신라때 장보고가 동아시아 바다의 제해권을 장악한 이유는

이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여집니다)


지증왕 7년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어서 백성들이 굶주리자

창고를 풀어서 구제했습니다


지증왕 10년

정월(1월) 봄

서울(수도)에 동시장 東市 (동시, 지증왕 10년에 경주 동쪽에 설치한 시장)

을 설치했습니다


3월

나무 울타리와 함정을 만들어서

맹수의 피해를 없애도록 했습니다


(당대 한국은 오늘날 한국이라기 보다

조선시대까지 호랑이들이 매우 많았는데

그 이전의 신라시대에는 말할것도 없이

여러 맹수들이 한국에 많이 서식했을 것이고

이에 지증왕은 맹수의 피해를 없애려 명을 내리게 된 거 같고

보통 국가 말기에 맹수의 피해가 많다는 기록들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서는

그만큼 국가 행정력이 부족했음을 의미한 다고 할 수 있는데

반대로 지증왕대에는 맹수의 피해를 없애려한 정책을 시행했기에

그만큼 국가의 행정력이 넓고 강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라 할 수 있습니다)


7월 가을

서리가 내려서 콩이 죽었습니다


지증왕 11년

5월 여름

지진이 발생해서

민가가 쓰러지고

사람이 죽었습니다


10월 겨울

우레(천둥)가 있었습니다


<라봉봉>하나같이 굵직굵직하고 제대로 된 개혁으로

기록으로 보아 신라는 막힘없이 선진적인 개혁을 이뤄냈고

'암이 낫는다'라는 말이 이런 느낌인거 같습니다


기록 하나하나가 크고 굵직하고

가히 대인 大人 이었고 신라의 어질고 큰 임금이었던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설명들은 틈틈히 썼고

또 당시에는 외부의 침략이 없었다고 할 수 있는데

아마도 이는 당대 주변국가에서도

신라에 빈틈이 없음을 알고 조용히 관망하는

모습을 보였던거 같고

그런 평화기동안 신라인들은 개혁에 집중해서

신라 사회가 크게 발전하던 시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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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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