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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최초의 여왕 선덕여왕, 어질고 명민했던 선덕여왕>


신라 27대왕 선덕왕 善德王 김덕만 (한국사 최초의 여성 왕이어서

선덕 여자 女 왕, 선덕여왕이라 부르나 공식 이름은

선덕왕입니다)


선덕왕 善德王 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덕만 德曼 이며

진평왕의 맏(첫째) 딸 입니다


어머니는 김씨 마야부인입니다

덕만은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고 명민했습니다


진평왕이 붕어했으나

아들이 없었으므로

백성들이 덕만을 왕위에 오르게 하고

성조황고 聖祖皇姑 라는 칭호를 올렸습니다


<라봉봉>성조황고를 해석해보면 성스러운 조상의 황녀라는

뜻이 아닐까 싶습니다 기존 신라 왕실 라인이

매우 강력한 지증왕-법흥왕-진흥왕 라인으로 최전성기

시절이 있었고 진평왕 역시 오래 즉위하며

내실을 다진 임금이었기에 백성들도

김덕만이 여성이었음에도

진평왕의 직계혈통이었기에

김덕만을 왕위에 옹립한거 같고


'조상이 훌륭하니 그래도 딸이어도

잘하겠지 ?'


이런 심정으로 김덕만을 왕위에

옹립한게 아닐까 싶습니다,,



전 임금(진평왕) 때 당나라에서 온 모란꽃 그림과 꽃씨를 얻어서

덕만에게 보인 적이 있었습니다


덕만은


<김덕만>이 꽃이 비록 곱기는 하지만

틀림없이 향기가 없을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딸바보) 진평왕은 웃으면서


<진평왕>허허 네가 어떻게 그것을 아느냐 ?


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김덕만>꽃을 그렸으나 나비가 없기에

이를 알았습니다


무릇 여자로서 국색 國色 (나라 안에서 첫째가는 미인) 을

갖추고 있으면 남자가 따르는 법이고,

꽃에 향기가 있으면 벌과 나비가 따르는 법입니다


(페미니즘쪽에서는 이런거를 불편하게 여길지도 모르지만

여성이었던 김덕만의 발언이고

성상품화나 그런거는 사실 여성 스스로 만드는거 같습니다

사실 선덕여왕은 최초의 여성왕이었지만

한국 최초의 여성임금이라는 점 말고는

딱히 잘한것도 없는 왕이어서,,

[여성인권이 낮았던 전근대에는 그냥 여성이어서 혹평했다면

현대 학계에서도 정책적으로도 논란이 있는 인물입니다,,

물론 그가 남성왕이었다면

그냥 크게 잘한것도,크게 못한것도 없는 평범한 군주로 남았겠으나

아무래도 최초의 여성왕이었기에 더 그런 조명을

받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 논란이 있고 또 페미니즘,여성계에서 불편한 말들도

나올지도 모르지만 일단 역사기록 그대로 쓰겠습니다)


이 꽃이 무척 고운데도

그림에 벌과 나비가 없으니

이는 틀림없이 향기가 없는 꽃일 것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진평왕>음,, 한번 심어보자꾸나


 그 씨앗을 심었는데

과연 그녀가 말한 것과 같았습니다

(실제 모란꽃은 향기가 있으나

품종에 따라 향기가 없는 꽃도 있다고 합니다)


<진평왕>(사위 김용수[김용춘으로 김춘추의 아버지]에게

왕위를 주기는 싫은데,,)

덕만이가 내 딸이지만 아들과 다를게 무엇인가 ?

지혜가 뛰어난 공주로다 !


그녀의 앞을 내다보는 식견이 이와 같았습니다


선덕여왕 원년(1년)

2월

대신 을제로 하여금 국정을 총괄하게 했습니다


5월 여름

가뭄이 들었는데

6월이 되자 비가 왔습니다


10월 겨울

특사를 보내서

국내의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노인으로서

자신의 힘으로 살아갈 수 없는 자들에게

곡식을 주어서 구제했습니다


12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선덕여왕 2년

정월(1월) 봄

선덕여왕이 직접 신궁(시조의 사당)에 제사지내고

대사령(죄수를 감형하거나 풀어주는 명)을 내렸습니다


<신라 신하 1>여성이시지만 

기존 남성 임금들과도 다를바 없는데 ?


<신라 신하 2>엣헴,, 좀더 지켜봐야겠지,,


모든 주와 군의 1년 납세를 면제했습니다


(이는 선덕여왕 나름의 선정을 베풀겠다는

의지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전국의 1년 세금면제는 보통일은 아니라고

생각되고,, 이는 진평왕이 나름

사위였던 김용수[김용춘]에게 왕위를 넘기기

싫어서인지 재위 말년에 국부를 쌓아올리며

딸을 위한 최후의 노력을 했다고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근데 진평왕이 딸부잣집 아빠이고

딸들을 극진히 사랑했다고도 생각되기는 하는데

그 딸들이 그런 사랑과 진평왕에 노력에 대한

기대에까지는 크게 미치지 못한 것 같고,,

한명[선화공주]은 적국인 백제 국왕에 시집가서

그 국왕인 백제 무왕은 신라를 위기에 몰고가는 등,,

때문에 '딸바보' 라는 이미지에 적합한

인물이 진평왕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진평왕같은 모습이

오늘날 여러 아버지들의 모습 같기도 한데

자신의 인생을 잃어가며 자식들을 위하는 아버지들의

최후가 대부분 안좋은 경우들을 많이 본거 같고

또 자신의 능력과 도덕성 부족에 대한 것에대한

도피처로 자식에게 의존하는거 같고

자식을 어찌보면 쉽고 이기적인 방법으로

'사랑'한다고 포장하는 말 같기에

'아들바보', '딸바보' 라는 말이 좋은 말은 아닌거 같습니다)


2월

서울에 지진이 있었습니다


7월 가을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8월

백제가 서쪽 변경을 침범했습니다


선덕여왕 3년

정월(1월) 봄

연호를 인평으로 고쳤습니다

분황사가 낙성됬습니다


3월

크기가 밤알정도 되는 우박이 내렸습니다


선덕여왕 4년

당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서

황제의 신임표를 가지고 와서

선덕여왕을 '주국 낙랑군공 신라왕' 으로 책봉해서

아버지의 봉작을 잇게했습니다


<당나라 사신>음,, 여자가 왕이라니 신기하군,,


<신라 신하들>남자면 어떻고 여자면 어떻겠습니까 

것보다 우리 잘지내 봅시다


<당나라 사신>알겠소 !


영묘사가 낙성됬습니다


10월 겨울

이찬(신라 2등벼슬) 수품과

용수(김용수=김용춘,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아버지)를 보내서


<김부식>(김용수는) 용춘이라고도 한다


주와 현을 순행하며 백성들을 위로하게 했습니다


선덕여왕 5년

이찬 수품을 상대등(신라 귀족의 수장직, 최고위직)으로 임명했습니다


3월

선덕여왕에게 병환이 났는데

약과 기도가 모두 효험이 없었으므로

황룡사에서 백고좌(신라의 국가적 불교행사)를 열고

승려들을 모아서 인왕경을 강의하고

승려 1백명에게 도첩(임명장)을 허락했습니다


(기도로 병을 치료하려했던

선덕여왕의 모습인데,,

이런 모습들은 재위기간 내내있어서

선덕여왕은 혼란한 시대를 극복하거나

하려는 모습보다는 불교에 집착하며

현실도피의 목적으로 불교에 치중한 암군으로도

이야기 됩니다,,)


5월 여름

개구리 떼가 대궐 서쪽 옥문지에 많이 모였습니다


선덕여왕이 이를 듣고

좌우 측근들에게


<선덕여왕>개구리의 성난 눈은 병사의 모습이다


내가 일찍이 서남쪽 변경에 옥문곡이라는 지명을

가진 곳이 있다고 들었다


이웃나라 군사가 혹시 이 골짜기에 잠입한 것이 아닌가 싶구나


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곧 장군과 알천과 필탄으로 하여금 그곳에 가서

수색하게 했습니다

그 곳에는 과연 백제 장군 우소가 독산성을 습격하기 위해서

군사 5백명을 이끌고 와서 숨어있었습니다


알천이 이를 습격해서 모두 죽였습니다


자장법사가 불법을 탐구하기 위해서 당나라에 갔습니다


<라봉봉>선덕여왕은 한국사 최초의 여왕으로

여자가 왕이 되었다는 점은 신라 정치의

오늘날 민주정과도 비슷한 형태를 보인

열린 모습이라 해석할 수 있고

실제 신라는 박씨,석씨,김씨가 왕위에 올라서

한 성이 고정되게 이어지지 않았기에

상당히 오늘날 보기에도 당대에는 정말 민주적이고

선진적인 정치시스템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남자라고,여자라고

성별을 우대하거나 차별하는 인물이 아니며

선덕여왕은 최초의 여성왕이었다는 의의와

별개로 암군적 모습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서,,

선덕여왕의 모란꽃 일화와

개구리떼의 울음소리로 백제 군사의 공격을 알아차렸다는 일화는

선덕여왕의 지혜를 이야기 하는 이야기로 유명하나

솔직하게 과학적으로 해석해 보면 상당히 두루뭉술하고

추상적인 이야기로

화가가 굳이 벌레를 그리지 않고 모란꽃만 그렸을 수도 있고

또 개구리 울음소리로 과연 백제군의 병사를 알아차렸다는 것은

곧이곧대로 들을 수 없는데

선덕여왕도 나름 아버지의 국정들을 배우며

익힌 감각도 있을 것이고 나름 감각에서 나온 

정책이었고

실제로 다른 것에대한 비유라고 생각하더라도

상당히 추상적인 일화의 지혜이야기라 할 수 있고

(그녀가 여자라서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다는게 아니라

이런 글을 읽었던 옛날부터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실제 그녀의 정책,그녀의 신라는 이렇게

위기상황을 두루뭉술하게,추상적으로 넘어가려했던 일들이

많았고 실제로 그녀는


'위기를 마주할때 그것을

조금이라도 해소하기는 커녕 본인이 더 스스로 키워갔다'


는 평도 있고 나름 착한 마음씨도 있는

'소녀감성'의 그녀였던거 같은데

소녀감성의 그녀가 진평왕의 귀여움,사랑을 받는 '딸'이 아닌

'신라 국왕'으로서 신라를 이끌기에는 신라는 너무도

커져있었고 주변국들도 신라를 크게 견제하고 있었다 할 수 있고


실제 당대 신라는 최전성기를 거치며

백제,고구려도 큰 위기감을 느낄만큼 강성하며

커져있었던 상황인데 이런 강국의 왕이었던 선덕여왕인데

그런 훌륭한 선조들이 일구어낸

거대하고 선진적인 시스템의 신라를 이어받은

'(회사말아먹는) 무능한 재벌 2세' 이런 이미지 같고

실제로 자수성가한 부모나 재벌 1세라 불리는 인물들은

되게 밑바닥부터 노력하거나

비범한 카리스마형 인물들이 많았는데

2세대, 재벌 2세는 1세대같이 고생을 해보고 성장한 인물들은

아니고 집단,회사를 이어받게 된 명분이

사실상 핏줄이기 때문에

특히나 옛 왕실에서는 이러한 일들이 자주 일어났고

단순히 그녀가 여성이어서 문제가 있었다기 보다

단순히 능력 부족과 중앙집권화 이후부터의

고질적 문제인 부자상속,직계상속이 한편으로는

안정적인 시스템을 이끈다는 이미지도 있으나

한편으로는 혈연적 직계상속은 능력위주가 아닌

단순한 핏줄로 인한 상속이기 때문에 여러 부작용과

문제들을 가져왔다고 할 수 있고

지증왕대부터 중앙집권화가 시작된 신라는

실제 이후부터 거대한 국력을 가지게 되었으나

또 그로 인해 여러 조직의 비대화,귀족들의 성장,

직계상속의 고질적 문제점 등 여러 위기등도 있었을 것이고

굉장히 커져있고 확장되어 있는 신라는

그녀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컸던거 같고

이에 점점 주변 세력들은 그녀와 신라를 공격해가며

불안은 점점 커졌다고 했던 시기라 할 수 있는데

아무리 재벌2세가 무능해도 재벌은 재벌이듯이

당장 망하지는 않았으며 당대 하락세의 신라였음에도

워낙 선대에 방어시스템이 탄탄하게 구축되있어서

방어력이 컸던 신라였고,,

만약 신라에 김춘추,김유신 같은 대체인물이 없이

계속 하락세가 계속되갔다면

삼국의 운명은 또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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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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