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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무열왕 7년 (660년)

9월 3일

(당나라) 낭장(무관직 이름) 유인원(당나라 장수 이름)이 군사 1만명을 거느리고

사비성에 남아서 진을 쳤습니다


(태종 무열왕의) 왕자 인태(김인태)와

사찬(신라 8등벼슬) 일원과

급찬(=급벌찬, 신라 9등벼슬) 길나가

군사 7천명으로 그를 도왔습니다


소정방이 백제왕 및 왕족, 신하 93명과

백성 1만 2천명을 배에 태우고

사비(백제 마지막 수도)로부터 당나라로 돌아갔습니다


김인문(태종 무열왕의 둘째아들) 이

사찬(신라 8등벼슬) 유돈,

대내마(=대나마, 신라 10등벼슬) 중지 등과 함께 동행했습니다


9월 23일

백제의 잔적(남은 도적으로 신라 입장에서는

잔적이나 백제인들 입장에서는 백제 부흥군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들이 사비에 들어와서

항복한 사람들을 약탈하려 했습니다


유수 유인원(당나라 장수)이 당나라와 신라 사람들을 출동시켜서

이들을 격퇴했습니다


적들은 퇴각해서 사비의 남령(남쪽 고개,산 ??)에 올라가서

너댓 군데에 목책을 세우고

주둔하면서 기회를 노려서 성읍을 약탈했습니다

백제의 20여 성이 신라를 배반하고

그들(백제 부흥운동군)에게 호응했습니다


당황제가 좌위중랑장 왕문도를 웅진 도독으로 임명해서 보냈습니다


28일

왕문도가 삼년산성에 도착해서 조서를 전했습니다

왕문도는 동쪽을 향하여 서고

대왕 大王 (태종 무열왕)은 서쪽을 향해서 섰습니다


당황제의 명령을 전달한 후

왕문도가 당황제의 선물을 태종 무열왕에게 주려다가

갑자기 발병해서 사망했습니다 (,, 심장마비나 충격,스트레스 등으로

갑자기 사망한게 아닐까 싶습니다,,)


이에 따라 왕문도의 시종들이 대신해

(당황제의 선물을 주는) 의식을 마무리 했습니다


10월 9일

태종 무열왕이 태자(김법민, 훗날 문무왕)와 군사들을 거느리고

(백제는 멸망했으나 백제의 영향력이 아직 있었던) 이례성을 공격했습니다


<태종 무열왕>백제는 700년 왕조였기에

아직도 그 잔적들이 많이 남아있다 !

모두 힘내서 잔적들을 토벌하라 !


10월 18일

그 성(이례성)을 점령하고

관리를 두어서 수비하게 하자

백제의 20여 성이 두려워해서 모두 항복했습니다


10월 30일

사비 남령군의 목책을 공격해서

1천 5백명의 머리를 벴습니다


11월 1일

고구려가 칠중성을 침공했습니다

군주 필부 軍主 가 전사했습니다


11월 5일

태종 무열왕이 계탄을 건너서

왕흥사잠성을 공격했습니다


태종 무열왕은 7일만에 승리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7백명의 머리를 베었습니다


11월 22일

태종 무열왕이 백제(지역)에서 돌아와서

전공을 논하여

계금(신라 군부대 이름)의 군졸 선복을 급찬(=급벌찬, 신라 9등벼슬),

군사 軍師 (지방 실력자에게 주어진 관직 혹은 지휘관) 두질을

고간(신라 지방관직의 4등벼슬, 급벌찬급에 해당) 으로 삼았으며

전사한 유사지, 미지활, 보홍이, 설유 등 네 사람에게는

공의 정도에 따라 관직을 주었습니다


(선복이라는 군졸은 일개 병사였음에도

9등벼슬까지 간 것을 보니 상당한 공을 세운 인물로 보이고

전시에는 이런 특진 사례들이 여럿 있습니다,,)


백제 사람도 재능에 따라서 다음과 같이 임용했습니다 (유화책으로 보입니다)

좌평 충상,상영과 달솔 자간에게는 일길찬(신라 7등벼슬)의 위품과

총관의 직위를 주었으며

은솔 무수에게는 대내마(=대나마, 신라 10등벼슬)의 위품과 대감의 관직을 주었고

은솔 인수에게는 대내마의 위품과 제감의 관직을 주었습니다


(태종 무열왕은 백제 멸망 이후 논공행상을 철저히 하며

안으로는 공을 세운 신라인들에게 지위고하를 막론한 관직을,

밖으로는 새로 신라에 편입된 백제국 관리들을 포섭하기 위한

유화책을 사용해서 벼슬을 내리게 된 거 같습니다)


<태종 무열왕>올해는 정말 수많은 일이 있었고

모두 고생 많았소 편히들 쉬고 내년을 준비하시오 !

(남은 백제세력들도 있고

아직 고구려도 남았고 당나라와의 외교관계 등

앞으로도 갈길이 멀구나,,)


<라봉봉>태종 무열왕대의 기록이 거의 끝나가나

아직도 더 남아있기에 이번 이야기에서는 이정도까지만 썼고

그렇게 백제는 700년 왕조의 유구한 역사 답게,

또 한때는 고구려와 신라를 위협하고 바다에 진출한 대국이었던 나라기도 했고

하여튼 여러 대단한 면들이 있었던 백제답게

백제 마지막왕 의자왕이 항복하고 당나라에 끌려간 이후에도

백제인들은 끊임없이 백제 부흥운동을 했고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인들은 이런 백제인들에 반란을 진압하기도,

백제인들을 구슬리기도 해야 했고 이런 민족 통합적 과제등이

남아있었다고 할 수 있고 태종 무열왕 역시

이런 강경책(채찍)과 유화책(당근)을 동시에 보였다고 할 수 있고

이는 그가 유능한 정치가였음과 동시에

태종 무열왕 太宗 武烈王 이라는 이름답게

'맹렬한 무예의 왕'이라는 이름다운 행적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괜히 당대에


'그(태종 무열왕 김춘추)는 실로 세상을 다스릴

영걸(영웅호걸) 이라고 할 수 있다'


라는 말이 나온게 아니었다고 할 수 있고

당대 신라인들이 김유신 장군과 더불어

깊게 믿고 의지한 한국사의 큰 인물이라 할 수 있고

(게다가 김춘추, 김유신은 서로가 평생의 친구이자 동지였습니다)

상당히 매력적인 인물이었다고 생각되는데

한국사의 큰 흐름을 바꾼 인물이기도 했으나

또 외세였던 당나라를 끌여들였다는 점 등 때문에

비판도 많은 인물이라 할 수 있고


저도 당대 한국 삼국인들이 조금 더 서로 여유있게

외세를 끌어들이지 않고

통합을 한다거나 했으면 하는 아쉬움도 있으나

당대 신라인들이 깊게 믿고 의지한 큰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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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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