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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 원년(1년)

6월

당나라에 들어가서 숙위하던 김인문(태종 무열왕의 둘째아들,

문무왕 김법민의 동생)과 유돈 등이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문무왕에게


<김인문, 유돈>당황제가 이미 소정방(당나라 장수)으로 하여금

35도의 수륙군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게 하면서

마침내 왕께도 군사를 파견하여 응원하라고 하였습니다

비록 상중일지라도 황제의 칙명을 어기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문무왕>드디어 고구려를 칠때가 됬구나,,

나는 아버지의 명을 받들어

삼한 三韓 (고구려, 백제, 신라)을

하나로 만들겠다 !


7월 17일 가을

김유신을 대장군,

김인문, 진주, 흠돌(김흠돌로 문무왕 다음왕 신문왕때

'김흠돌의 난'을 일으킨 인물로 유명합니다,,) 을 대당장군


천존, 죽지, 천품을 귀당 총관

품일, 충상, 의복을 상주 총관

진흠, 중신, 자간을 하주 총관

군관, 수세, 고순을 남천주 총관,

술실, 달관, 문명을 수약주 총관,

문훈, 진순을 하서주 총관,

진복을 서당 총관,

의광을 낭당 총관,

위지를 계금 대감으로 임명했습니다


8월

대왕(문무왕 김법민)이 모든 장수를 거느리고

시이곡에 도착해서 머물렀습니다


(삼국사기 1글자 손실) 어떤 사람이 와서


<어떤 사람>백제의 잔적(남은 도적이라는 뜻인데

신라 입장에서는 잔적이나 멸망한 백제 유민들 입장에서는

백제 부흥군입니다)이

옹산성에 웅거하여 길을 막고 있으니

앞으로 전진하면 안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따라 문무왕이 먼저 사람을 보내서

그들을 타일렀으나

그들은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옹산성의 백제 부흥군>우리는 결코 항복하지 않는다 !

대백제국 大百濟國 만세 !


<신라 장군들>백제의 잔적들의 기세가 매섭습니다 !!


9월 19일

대왕(문무왕)이 웅현정에 진주해서

모든 총관과 대감들을 모아 놓고

직접 훈계했습니다


25일

군사를 진군시켜서 옹산성을 포위했습니다


27일

먼저 큰 목책을 불사르고

수천 명을 목베어 죽이고 마침내 그들을 항복시켰습니다


문무왕이 공로를 평가해서

각간(=이벌찬, 신라 1등벼슬)이나 이찬(신라 2등벼슬)으로서

총관이 된 자에게는 칼을 주고

잡찬(신라 3등벼슬)이나 파진찬(신라 4등벼슬 또는

대아찬(신라 5등벼슬)으로서

총관이 된 자에게는 창을 주고

그 이하에게는 각각 위 1품씩을 올려주었습니다


웅현성을 쌓았습니다

상주 총관 품일이

일모산군 태수 대당과

사시산군 태수 철천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우술성을 공격했습니다

그들은 1천명의 머리를 벴습니다


백제의 달솔 조복과 은솔 파가가 백성들과 함께 항복했습니다

조복에게는 급찬의 위를 주어서 고타야군 태수로 삼고

파가에게는 급찬(=급벌찬, 신라 9등벼슬)을 주고

그들 둘 모두에게 밭과 집과 옷을 주었습니다


10월 29일 겨울

대왕(문무왕)이 당황제의 사신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당나라 사신이 조의와 위로의 뜻을 표하고

동시에 황제의 조칙에 따라 이전 임금에게 제사를 지냈으며

채색 비단 5백필을 부조했습니다


<당나라 사신>아아 ! 신라왕 김춘추의 죽음을 애도하오

우리 황제께서도 그를 특히나 좋아하셨지,,


김유신 등은 군사를 쉬게 하면서

다음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함자도 총관 유덕민이 와서

평양으로 군량을 수송하라는

당황제의 칙지(칙명, 임금이 내린 명령)를 전했습니다


문무왕 2년

정월 봄

당나라 사신이 객사에 머물고 있다가

이 때에 이르러

문무왕을 '개부의동삼사 상주국낙랑군공신라왕' 으로 책봉했습니다


이찬(신라 2등벼슬) 문훈을 중시로 임명했습니다


(신라 초기 최고벼슬은 '이벌찬'이고

이벌찬은 왕이 임명하는 재상직 성격이고

그러다 점점 귀족권이 강화대며 귀족들의 대표이자

신라 최교벼슬이라 할 수 있는 '상대등'이

중요시되다가 이에 왕권 강화 목적으로

왕이 임명하는 재상격인 '중시(시중)'가 중요시 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원래 중시는 왕의 직속부하 성격이나 삼국통일전쟁을 겪으며

점차 왕권이 강해지자 중시의 권한도 자연스럽게 강화됩니다


그러나 이후 왕권이 약화되자 또다시 귀족 대표인 상대등 권한이

강화되기에 신라 정치에 중시,시중이 나타나면 왕권이 강했다고보면 되고

상대등이 나타나면 왕권이 약했다고 보면 됩니다)


문무왕이 유신(물론 당대 김유신 장군에게

중시니 이벌찬이니 상대등이니 하는

벼슬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가히 신라,한국사의 전설적 인물이고

아예 이후 이례적으로 왕[흥무대왕]으로 추증됩니다,,)

, 인문, 양도 등 아홉 장군에게

수레 2천여 량(량= 수레 1대)에

쌀 4천석과 벼 2만 2천여 석을 싣고 평양으로 가도록 명령했습니다


1월 18일

풍수촌에 머무르게 됬는데

길이 얼어서 미끄럽고 길이 험해서

수레가 갈 수 없으므로 군량을 모두 소와 말에 실었습니다


1월 23일

칠중하를 건너 산양에 이르렀습니다

귀당, 제감, 성천과 군사 술천 등이 이현에서 적병을 만나서

이들을 죽였습니다


2월 1일

김유신 장군 등이 장새에 도착했는데

이곳에서 평양까지는 3만 6천보 거리였습니다


먼저 보기감 열기 등 15인을 당나라 군영에 보냈습니다

이날은 바람과 눈으로 날씨가 몹시 추워서

사람과 말이 다수 얼어 죽었습니다


6일

양오에 도착해서 기미유신이 아찬(신라 6등벼슬) 양도와

대감 인선 등을 보내서 군량을 전달하고

당나라 장수 소정방에게는 은 5천 7백 푼, 가는 베 30필,

머리털 30량, 우황 19량을 선물했습니다


소정방은 군량을 얻고는 곧 전투를 그만두고 돌아갔습니다

김유신 등은 당의 군사가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역시 군사를 되돌려 과천을 건넜습니다


이 때 고구려 군사가 추격해오자

군사를 되돌려 대적해서

만여 명의 머리를 베고

소형 아달혜 등을 사로잡고

병기를 무수히 노획(전장에서 적군의 물품을 빼앗음) 했습니다


전공을 평가하면서

본피궁의 재물과 전장과 노복을 절반으로 나누어서

김유신과 김인문에게 주었습니다


영묘사에 불이 났습니다


탐라(제주도)국주 좌평 도동음률이


<김부식>'률'을 '진'이라고도 한다


항복해왔습니다


탐라국은 무덕 이래로 백제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좌평으로 관직명을 삼았었는데

이 때 신라에 항복해서 속국이 됬습니다


3월

대사령(죄수들을 감형하거나 풀어줌)을 내렸습니다


이미 백제를 평정했으므로

문무왕은 해당 관청으로 하여금 큰 연회를 베풀게 했습니다


7월 가을

이찬(신라 2등벼슬) 김인문(태종 무열왕의 둘째아들, 문무왕의 동생)을

당나라에 보내서 토산물을 바쳤습니다


<김인문>당황제 만나고 올게 형도 잘지내 ~


<문무왕>오 내동생 인문아 잘다녀 오라 !


8월

백제의 잔적(남은 도적)이 내사지성에 모여 반란을 도모하자

흠순 등 19명의 장군을 보내서 이들을 토벌했습니다


대당 총관 진주와 남천주 총관 진흠이

거짓으로 병을 핑계대고 방탕해서

국사를 돌보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들의 목을 베고

동시의 그 일족을 모두 처형했습니다


<문무왕>너희들이 놀라고 백성들이 고생해서

조세를 바치는 것이 아닌데

어찌 감히 방만하여 나랏일을 그르치려느냐 !


<신라 신하들>예,, 예,, (으으 왕께서도 열심히신데

열심히 안하면 죽겠다,,)


사찬(신라 8등벼슬) 여동이 그의 어머니를 때리자

하늘에서 천둥이 울리고 비가 내리다가

벼락이 그에게 떨어져서 사망했습니다

그의 몸에 수주당 須Ꞿ(ㅁ)堂,  須 O 堂 (모름지기 수, ???  , 집 당)

이라는 세 글자가 쓰여 있었습니다


<김부식>Ꞿ 자는 미상(확실하거나 분명하지 않음)


남천주에서 흰 까치를 바쳤습니다


<라봉봉>이때의 기록은 왕권이 매우 강했기도 했는데

또 '삼국통일전쟁' 시기로 상당히 강력한 카리스마가 필요하기도 했고

이런 전시체제 상황과 선대로부터 이어진 강력한 왕권

그리고 문무왕의 외삼촌이자 신라의 영웅 김유신 장군의 존재 등

왕권이 매우매우매우 강력했던 시기였고

일단 백제 부흥군이나 고구려 등은 당대 군사력도 강했던 신라라

금방 제압이 가능했던 시기였고


당대 부지런하고 영민했던 문무왕은

나태했던 신하들을 바로 처형시켜버렸고,,

이에 당대 신라 관료들은

강력한 왕권+전시체제의 상황에 뭐라 반항도 못하고

무조건적으로 열심히 일하는 분위기가 조성된거 같습니다

이는 왕권을 공고히하고 군기를 잡기위한 문무왕의

시범 케이스적 사형이었다고 하고,,

가히 문 文 왕적 모습만이 아닌 아버지 태종 무 武 열왕 김춘추와

외삼촌 김유신 장군의 영향을 받은 것같이

무 武 적인 그의 모습이라 할 수 있고

당대 신라신하들도 그런 그의 모습과 아주 강력한 뒷배경등에

아무말도 못하고 조용히 숨죽이며 일하던 상황이 생겨낫던거 같습니다,,


대신 이런 일로 인해 사형당한 김진주의 아들 김풍훈은

원한을 품고 나당전쟁 당시 당나라군 앞잡이로 붙어버렸다고 하고

그 외에는 중시 임명 등 꾸준히 귀족들을 견제하며

왕권을 강화, 공고히하고 남은 백제 부흥세력과 고구려를

제압하려 했던 당대의 모습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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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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