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당나라의 야심이 드러났던 취리산 *회맹>


(*회맹 會盟 모여서 맹세함)


문무왕 5년

2월 봄

중시(시중, 왕의 직속신하적 성격으로

오늘날 국무총리격) 문훈이 은퇴하자

이찬(신라 2등벼슬) 진복을 중시로 임명했습니다


이찬 문왕이 사망하자 왕자의 예식으로 장례 지냈습니다


당황제가 사신을 보내서 조문하고

동시에 자주색옷 한 벌과 허리띠 한 벌,

채색 능직(아랑무늬,비스듬한 무늬) 비단 1백필,

생초(생사 = [삶아서 익히지 않은 명주실)로

생초는 생사로 얆게 짠 사[비단]붙이의 하나) 2백필을 보내왔습니다


문무왕이 당나라 사자에게

황금과 비단을 더욱 후하게 주었습니다


8월 가을

문무왕이 칙사 유인원(당나라 장수), 웅진도독 부여융과 함께

웅진 취리산에서 화친을 맹서했습니다


이보다 앞서 백제의 부여장(백제 30대왕 무왕)이

고구려와 화친을 맺으면서부터

자주 우리(신라)의 국토를 침범했습니다


이에 따라 우리(신라)는 연이어서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서

구원을 요청하고

구원병이 옥를 애타게 기다렸었습니다


또한 소정방이 이미 백제를 평정하고 당으로 돌아가자

백제의 잔당(남은 도적, 즉 신라입장에서는 잔당,

멸망한 백제의 유민들 입장에서는 백제 부흥군)들은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문무왕이 진수사 유인원, 유인궤

(유인원과 유인궤 = 당나라 장수) 등과 함께

수년간 이들을 정벌하여

점점 평정해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되자 당고종은

부여융(백제 31대왕 의자왕의 장남이자 태자였던 인물)에게

조서를 내려서

그로 하여금 신라로 오게해서 잔당들을 무마하고

그들로 하여금 우리와 화친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이 때 흰 말을 잡아서 맹세했는데

먼저 하늘과 땅의 신, 그리고 강과 계곡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그 다음 순서로 입에 피를 발랐습니다


그 서약문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서약문>지난날 백제의 전 임금이

역리와 순리를 분간하지 못하고

이웃나라와 좋게 지낼 줄 모르고

인척(혼인에 의하여 맺어진 친척)간에 화목하지 못하면서

고구려와 결탁하고 왜국과 내통하여

그들과 함께 포악한 행동으로 신라를 침략하여 성읍을 약탈하니

편안한 해가 거의 없었다


천자는 물건 하나라도 제자리를 잃는 것을 가슴아프게 여기고

죄 없는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

화친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지리가 험하여 거리가 먼 것을 믿고

하늘의 법칙을 업신여기므로

황제가 대노하여

백성들을 위로하는 토벌을 결행하였으니

군사들의 깃발이 향하는 곳은

한 번의 전투로 완전히 평정되었다


사정이 이러한 즉 마땅히 궁실과 집터를 연못으로 만들어

이후의 세대에 경계심을 주고

이러한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뿌리를 뽑아

자손들에게 교훈으로 보여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유순한 자를 받아들이고

배반하는 자를 치는 것은

선왕의 아름다운 법도이며


망한 것을 다시 일으켜 주고

끊어진 대를 잇게 하는 것은

지난 날 성인들의 공통된 규범이었다


'모든 일은 옛날의 교훈에서 배워야 한다'


라는 말이 역사서에 전해져 온다


이에 따라 전 백제의 대사가정경 부여융을 웅진 도독으로 삼아

조상의 제사를 모시게 하고

그의 옛 고장을 보전케 할 것이니


신라에 의지하여

길이 우방이 되어야 할 것이며

각각의 묵은 감정을 버리고

우호를 맺어 서로 화친하여

모두가 당의 조칙을 받들고

영원히 당의 번방으로 복종해야 할 것이다


이에 사신 우위위장군노성현공 유인원(당나라 장수)을 보내

직접 권유하고

황제의 뜻을 상세하게 선포한다


두 나라(신라와 백제)는 혼인으로써 약조를 맺어

맹세를 다졌으며


짐승을 잡아 피를 머금었으니

언제나 함께 화목하며

재난을 함께 극복하고 환난을 구제하며

형제와 같이 사랑하여야 할 것이다


황제의 말씀을 삼가 받들어

어기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며

맹세를 마친 뒤에는

모두 함께 약속을 지켜야 할 것이다다


만일 맹세를 저버리고

그 덕성이 변하여 군사를 일으키거나 무리를 움직이거나

변경을 침범하는 일이 발생한다면

신명이 굽어 볼 것이요

수 없는 재앙이 내릴 것이며

자손을 기르지 못할 것이요

나라를 보전하지 못할 것이며

제사가 끊어질 것이요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금서철권(금으로 새기고 무쇠로 만든 책)을 만들어

종묘에 간직해 두고

자손 만대를 통하여 감히 어기거나 범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신령이시여 이를 들으시고

흠향(신명이 제물을 받아서 먹음)하시고 복을 베푸소서


<김부식>이 맹약문은 당나라 장수 유인궤의 글이다


그렇게 신라대왕 문무왕과

멸망한 백제국의 대표 자격으로 나온

백제 마지막왕(풍왕 제외시) 의자왕의 맏아들 부여융은

입에 피를 바르는 절차를 마치고

제물은 북쪽 땅에 묻었으며

문서는 우리(신라) 종묘(왕실 사당)에 보관했습니다


,,,


<신라 신하들>당나라인들이 모두 떠났군요

그러나 이 맹세들은 당나라가 우리를 속국취급한다는 것의

의미가 있지 않습니까 ?


<문무왕>맞다, 모두 침착함을 잃지 말고

백제를 흡수하는 것에 집중하고

고구려 원정은 최대한 소극적으로 치루도록 하라 !


이 때

당나라 장수 유인궤는 우리(신라) 사신과

백제, 탐라, 왜 등의 네 나라 사신을 거느리고

뱃길로 서쪽에 돌아가서

태산에 모여서 제사를 지냈습니다


왕자 정명(문무왕의 첫째아들 김정명, 훗날 신라 31대왕 신문왕)을

태자로 삼고 죄수를 크게 사면했습니다


겨울에

일선, 거열 2주의 백성들을 동원해서

군수품을 하서주로 운반햇습니다


예전에는 명주와 베 열 발을 한 필이라고 했는데

이를 고쳐서 길이 일곱 보 넓이 두 자를 한 필로 정했습니다


<라봉봉>백제 이야기를 쓸 때에는

당시 백제의 항복의식이 백마를 잡아 항복한다는 의식이 있었다고

글을 봤기에 백마의 맹세 = 백제의 항복맹세로 생각해서 글을 썼는데,,

문무왕 기록을 쓰면서 자세히 보니 당의 강요로 이루어진 회맹이었고

또 백마를 잡아 '삽혈'하는게 중국 봉건제때 이루어진 주술의식이었다고 하고

이에 백제 이야기 글은 수정했습니다,,

저도 방대하고 방대한 역사를 완벽하게 알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정직하게 자료들을 모아서 글을 쓰고 있고

부족한 점이나 틀린점은 인정하겠습니다


이후 나올 기록으로 보아서는

이는 당나라의 강요로 이루어진 맹약이었고

그러나 이는 이미 멸망한 백제세력을 또다시 데려와

신라 문무왕과 맹세를 시킨 사건이기에 당나라의 백제와 신라에 대한 영향력 확대와

자신의 행정구역으로 취급했음을 알 수 있어

당나라의 신라에 대한 야심이

노골화 되었던 사건이라고도 할 수 있기에

이때부터는 언젠간 당나라와도 대결해야 한다는 점을

인지해가던 신라인이었다고 합니다


당나라는 백제를 흡수하려했던 신라와 달리

백제의 세력을 인정함으로서 두 나라를 이간하며

한국에 대한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사실상 이미 사라지다 싶이한 백제가 아무리 신라와 화친한다고 한들

이미 신라의 세력권으로 편입되어 갔다고 할 수 있고

당나라 역시 아직 고구려도 남았기에 일단 찔러보기식으로

신라를 당 세력으로 편입시켜보려 했던 시도들의 일환으로 보여지나

말그대로 찔러보기 식이지 신라에 위협을 느낀 부여융도 당나라로 도망쳤고,,

이후 문무왕 기록에는

이때 백제와 신라 두나라의 영역을 갈랐다고 하나 이미 사실상

신라의 영향권 아래의 백제 지역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당나라의 야심적 태도가 드러났던 사건이라 할 수 있고

이후부터 신라는 고구려 원정에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며

백제 세력 흡수에 집중했고

그 결과 신라인들은 이후 나당전쟁을 대비해 힘을 아껴둘 수가 있었고

고구려 멸망이후 고구려인들의 원한을 덜 사서

나당전쟁 당시 신라인들은 고구려인들의 협력을 받을 수 있게 됬다고 하고

당대 당나라의 신라에 대한 야심, 기만정책과

여러 이해관계가 얽히고 얽힌 삼국통일전쟁 시기를

기민하고 영민하게 이끌어 가던 문무왕의 모습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응형
Posted by 라봉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