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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성왕 2년

4월 여름

동쪽 지방에 우박이 내려서

뽕과 보리가 모두 상했습니다


원성왕은 김원전을 당에 파견해서

특산품을 바치자

당의 덕종은 조서를 내려서 말하기를


<당덕종>신라왕 김경신(원성왕의 이름) 에게 말한다

김원전이 이르러

표문과 진봉 進奉 (진상) 하는 것을 잘 살펴보았는데

경의 나라 풍속은 신의를 중시하고

지조는 바르며 일찍부터 중국의 번방으로서

교시를 잘 받들었다


또한 변방에 속한 무리들을 훌륭하게 진무하였으며

유교의 풍습을 받들어 예법이 성행하고

나라가 평안하게 다스려졌으며

중국에 정성을 다하고

천자에게 직무를 보고하지 않는 일이 없었다


또한 자주 사신을 보내

조공과 진상을 계속하였고

비록 바닷길이 멀고 육로로도 먼 곳에 떨어져 있지만

폐백(공물)의 왕래가 옛 법을 따르고

충성은 더욱 드러나니

더없이 가상하고 감탄할 일이다


나는 만방에 백성의 부모로 군림하였으니

안으로부터 중외(나라 안팎)에 이르기까지

법도에 맞게하며 문화를 공유하고

태평화락을 이루어서

모두와 함께 안락장수의 경계에 오르고자 한다


그대는 마땅히 국내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열성으로 구휼하며

길이 변방의 신하가 되어

바다 변방의 백성들을 평안케 하라


이제 그대에게 비단,

능직(비스듬한 문양 비단), 채단(온갖 비단) 등

30필과 옷 한 벌, 은합 銀榼 (은으로 된 용기 or 통,

요강같은 ?? ) 한개를 주노니

이들이 도착하면 받을 것이며


왕비에게는 비단, 채단, 능직 등

20필과 금실로 수놓은 비단 치마 한 벌과

은쟁반 한 개를,


가장 높은 재상 한 사람에게

옷 한벌과 은합 한 개를,


다음 지위 재상 두 사람에게

각각 옷 한 벌과 은쟁반 한 개를 준다


그대는 이를 받아서 나누어주라


여름이 깊어 날씨가 더워지는데

그대는 내내 평안하기 바라며

재상 이하 모두에게도 안부를 뭇는다

글월로는 나의 뜻을 다 싣지 못하노라


라고 했습니다


7월 가을

가뭄이 들었습니다


9월

서울(=수도, 서라벌)에 기근이 들어서

곡식 3만 3천 2백 40석을 내어서 구제했습니다

10월 겨울에도

곡식 3만 3천 석을 나누어주었습니다


대사 大舍 (신라 12등 벼슬) 무오가 병법 15권과

화령도 花鈴圖 (신라 후기의 병법서) 2권을 바쳤으므로

굴압 屈押 (황해도 강음현[금천군] 쪽) 현령으로 임명했습니다


원성왕 3년

2월 봄

서울에 지진이 있었습니다


원성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지내고

죄수들을 크게 사면했습니다


5월 여름

금성이 낮에 나타났습니다


7월 가을

메뚜기 떼가 나타나서 곡식을 해쳤습니다


8월 초하루(1일) 신사일

일식이 있었습니다


<라봉봉>무난무난한 신라와 당의 관계를 보여주며

딱히 해설해야 하는 이야기는 없어 보입니다


굳이 생각나는 이야기를 쓰자면

새 왕이 재위하거나 정권이 교체됬을때

숙청, 찬탈 등 비정상적으로 이루어 진다면

외국과의 외교관계에서 굽히고 나갈 수 밖에 없어

외교적으로 큰 손실이 있었다고 할 수 있었고


일단 급하게 정권을 잡을 경우

빠른 기간 내에 성과를 내야하거나 외국의 인정을

받아야 하기에 각종 이권을들 외국에 넘기거나 하는

불리한 입장에서 외교를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원성왕의 경우 딱히 그런 기록은 없어보이고

당에서도 신라 내부 사정까지 어찌할 여력도 없었고

만약 원성왕이 대놓고 칼부림을 하며 왕위에 올라서

신하들을 숙청했다면 당과의 관계에서도 불리한 위치에서

외교관계를 맺었을 것인데 그런것도 없고

당과의 무난무난한 관계를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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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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