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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성왕 4년 봄

처음으로 독서 삼품 讀書三品 과


(독서삼품과 讀書三品科 관리 채용시험으로

원래 신라는 '화랑도' 시스템 같이

청소년기부터 무예를 갈고 닦아

성인이 되면 전쟁터에 나가게 하는

무예를 중시하는 풍토였는데

삼국통일 이후부터는 전쟁이 사라지자

이때부터 왕실에서는 귀족들을

견제하고 귀족들 역시 반란을 일으키고 하는 것이

반복됬고 이에 원성왕때부터 중국 수나라, 당나라에서

시험을 쳐서 관리를 뽑는 '과거 제도' 를 신라에 도입하고자 했고

귀족이 아닌 골품제로 6두품 이상 되지 못해

신분적 한계에 부딪힌 6두품을 등용하려 했고

이에 과거제도의 원형인 '독서삼품과' 를 실시하게 됩니다


물론 신라시대는 귀족의 영향력이 강해서

영향력이 강하지는 못했고

대신 집안, 혈통으로 관직에 진출하는 것이 아닌

시험을 통해 개인의 능력으로 관직에 진출할 수 있게 됬다는

의의가 있다하고 이런 시험제도는 훗날 과거제도로 이어져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를 설치해서

벼슬을 주었습니다


'춘추좌씨전' '예기' '문선' 을 읽어서

그 뜻을 능히 알고

이와 동시에 '논어' 와 '효경' 에 밝은 자를 상등으로 하고


'곡례' , '논어' , '효경' 을 읽은 자를 중등으로 하고


'곡례' 와 '효경' 을 읽은 자를 하등으로 했습니다


5경과 3사, 제자백가서에 모두 능통한 자는

절차를 밟지 않고 등용했습니다


예전에 활 쏘기(무예 능력) 만으로 인물을 선발하던 것을

이 때에 와서 (문과 능력으로) 바꾼 것이었습니다


<원성왕>얘들아 평화시대니깐 칼 잡고 활쏘는 것보다는

'독서 삼품과' 로

글 읽고 공부를 많이 하는 자들을 위주로 관리를 뽑을겡 ~_~


<신라 고위 귀족들>아놔 책읽기 시른뎅 ;;


<신라 하급귀족, 6두품 세력들>와우 드디어 출세길이 열렸구나 ~~


가을

서쪽 지방에 가뭄이 들고

메뚜기 떼가 나타나고

도적이 많이 일어났으므로

원성왕이 사신을 보내서 위문했습니다


<라봉봉>원성왕의 중국 수, 당나라의 과거제도를 모방한

독서삼품과의 시행으로 나름 귀족 견제 +

혈통이나 무예 실력만으로 이어지던 신라 기득권에

새로운 집단 '지식인 집단' 이라고도 불리는

'6두품 세력' 이 등장하는 계기를 트게 됬다고 할 수 있으며

시험 역시 암기공부 위주의 폐단이 없다 할 수는 없지만

혈통, 무예만으로 뽑던 당시에는 새로운 선진시스템이

신라에 도입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화랑의 나라' 신라답게

'양반 나라' 조선같이 시험 관리 선발제의 힘이 크지는 못했고

신라 - 고려 - 조선으로 넘어오며 점차 문관 시험 선발제도의

중요성이 커졌다고 할 수 있고


단순히 6두품 등용이나 귀족견제, 선진문물 도입이라는 면

이외로 보더라도 삼국통일전쟁기간동안 극도로

상무(무예)적인 기풍이 강했던 신라에서 점차 평화기가 시작되고

넓어진 영토를 관리하려 지방 행정구역 정비등

여러 행정정책을 폈는데

더불어 문관의 수요가 높아졌다 할 수 있겠고

이에 독서삼품과가 시행되어 그 수요를 충당할 수 있게

된 거 같습니다


독서 삼품과는

신라 후기에는 그냥 당나라로 유학가는게 유행이 되서

당나라의 외국인 전용 과거시험제도인 '빈공과' 에

응시하는 경우가 생겨나 (당나라는 국제적 국가여서

외국인에게도 이런 관리 등용문을 열어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라 시험제도 '독서 삼품과' 의

영향이 줄어들었다고도 합ㄴ다


원성왕의 '독서 삼품과' 시행은

한국사에서 최초의 관리 선발 시험제도라

중요한 사건으로 취급되기도 하고

원성왕의 대표적인 업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다른 이야기를 해보면

과연 시험 선발제가 그렇다고

개인의 능력을 중시하는 합리적이기만

했던 제도였는가라는 점인데


시험선발제의 문제점은 이런 시험이 시행될때부터

학문의 진정한 가치의 공부가 아니라

시험 합격을 위한 암기(외우기) 위주라는 것

그리고 시험 합격이 공부를 했던 사람이라고

착각하게 만들어 합격후 관리들이 공부를 놓는다는 점

(결국 평안하고 유복한 환경에서

더 많은 것을 암기하는게 가능하고

학문적 능력보다는 집안의 재력과 암기력으로

결정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시험 내용과 실제 관료 업무 내용, 현실의 차이 ,

시험 낭인(불합격 하는데 계속 출세를

위해 시험을 놓지 못하는 사람들) 의 증가 등

시험 선발 채용제도는 한국 뿐만 아니라

원조 시행 국가 중국에서도 이런 여러 폐단과 문제가 있었던 제도고


시험 선발제가 개인의 능력을 중시한다는데

개인의 능력은 유교사상, 시험범위내 지식 이외에도

여러 능력이 있기에 시험만으로 평가를 할 수 없고


(사실상 암기, 시험합격도 넉넉한 환경의 사람이

더 유리하기에 과거제 역시 조선의 넉넉한 양반 명문가에서나

준비할 수 있고 평민들은 쳐다보기도 어려운 제도였고

결국 집안의 힘, 혈통으로 세습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오히려 암기 위주로 세월을 허비하게 되

개인의 발전과 능력을 저하시킨다고도 할 수 있기에


개인적으로

원성왕의 독서삼품과 실시는 당대 선진 시스템인

관리 시험선발제도의 도입을 했다는 것을 보되

시험 선발제가 과연 개인의 능력을 보는

합리적인 시스템이었냐는 것에 대한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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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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