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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하대의 *중시조 원성왕>


(*중시조 中時調 가문을 일으킨 시조,조상)


원성왕 6년

정월(1월) 봄

종기를 시중(오늘날 국무총리)에 임명했습니다


벽골제 碧骨堤 (오늘날 전라북도 김제시)를

증축(늘려 지음)했습니다

전주 全州 등 일곱 주의 사람들을 징발해서

이 공사를 했습니다


웅천주 熊川州 (오늘날 충청남도 공주시 )에서

붉은 까마귀를 바쳤습니다


3월

일길찬(신라 7등벼슬) 백어를

북국 北國 (발해) 에 사신으로 보냈습니다


(신라가 발해를 발해나 고려[고구려]라 하지 않고

북국 이라 했다는 것은

신라는 남국에 포함되고 같은 한민족임으로

생각해서 있을 수도 있고

이에 이후 역사학자들의 의견에 의해

이당시 시기를 '통일신라' 라고 하지 않고

'남북국 시대' 라고도 합니다)


큰 가뭄이 들었습니다


4월 여름

금성과 진성 辰星 (=수성) 이 동정성좌에 모였습니다


5월

한산(오늘날 황해,경기,충청도 지역),

웅천(오늘날 충청남도 공주시) 두 주의 굶주리는 백성들에게

곡식을 주어서 구제했습니다


원성왕 7년

정월(1월) 봄

왕태자가 사망하자

시호를 혜충이라 했습니다


이찬(신라 2등벼슬) 제공이 반역했다가

처형당했습니다


웅천주(오늘날 충청남도 공주시)

대사 大舍 (신라 12등벼슬) 향성의 아내가

한꺼번에 아들 셋을 낳았습니다


<웅천주 신라 백성들>워메,,,,, 시방,,,,, 향성의 ,,,, 아내가 ,,,,

아들을 ,,,, 한번에 ,,,, 셋이나 ,,,, 낳았디야 ↗ ~


<웅천주 관리>오오 역사에 기록해야 겠군,,


10월 겨울

서울에 눈이 석 자 ( 73.5cm) 나 내리고

사람이 얼어 죽었습니다


시중 종기가 퇴직하자

대아찬(신라 5등벼슬) 준옹(원성왕의 손자로

원성왕은 왕족을 시중에 임명해

 고위직을 독점하려했던 것으로 보입니다)이 시중이 됬습니다


11월

서울에 지진이 있었습니다


내성 시랑 김언이 3중 아찬(아찬은 6두품으로

진골 귀족(왕족)들이 아니면 더이상 6두품 이상으로 못올라가서

대신 중아찬, 2둥아찬 3중아찬 이런식으로

나누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 됬습니다


원성왕 8년

7월 가을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서

미녀 美女 (아름다운 여자) 김정란을 바쳤습니다

그녀는 국색(나라에사 첫째가는 미인) 으로서 몸에서 향내가 났습니다


8월

왕자 김의영을 태자로 봉했습니다


상대등(신라 귀족 수장직) 충렴이 죽자

이찬(신라 2등벼슬) 세강을 상대등으로 삼았습니다


시중 준옹이 병으로 사직하자

이찬 숭빈을 시중으로 삼았습니다


11월 초하루(1일) 임자일 겨울

일식이 있었습니다


원성왕 9년

8월 가을

큰 바람이 불어와서 나무가 꺾이고

벼가 쓰러졌습니다


내마 奈麻 (=나마 신라 11등벼슬) 김뇌가 흰 꿩을 바쳤습니다


원성왕 10년

2월 봄

지진이 있었습니다

태자 의영이 사망하자

시호를 헌평이라 했습니다


(태자로 봉했던 첫째아들, 둘째아들을 모두 잃은

원성왕입니다)


시중 숭빈이 사직하자

잡찬(신라 3등벼슬) 언승을 시중으로 삼았습니다


7월 가을

봉은사 奉恩寺 (서울 강남구 수도산에 있는 절) 를 창건했습니다


한산주에서 흰 까마귀를 진상했습니다


망은루 望恩樓 를 대궐 서쪽에 세웠습니다


원성왕 11년

정월(1월) 봄

혜충 태자(김인겸)의 아들

김준옹(훗날 신라 39대왕 김준옹)을

태자(아들이 아니라 손자니까

세손, 태손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로 봉했습니다


4월 여름

가뭄이 들자

원성왕이 직접 죄수를 재심사해서

형량을 낮추어 주었습니다

6월에 이르러 비가 내렸습니다


8월 가을

서리가 내려서 곡식을 해쳤습니다


원성왕 12년

서울(=수도, 서라벌) 에 기근이 들고

전염병이 돌았습니다

원성왕이 창고를 풀어서 구제했습니다


4월 여름

시중 언승이 병부령(오늘날 국방부 장관) 이 되고

이찬 지원이 시중이 됬습니다


원성왕 13년

9월 가을

동쪽 지방에 메뚜기 떼가 나타나서 곡식을 해치고

홍수가 발생해서 산이 무너졌습니다


시중 지원이 사직했습니다


아찬(신라 6등벼슬) 김삼조가 시중이 됬습니다


원성왕 14년

3월 봄

대궐 남쪽의 누교 樓橋 에 화재가 났습니다


망덕사의 두 탑이 서로 부딪혔습니다


6월 여름

가뭄이 들었습니다


굴자군 屈自郡 (오늘날 경상남도 창원시)

대사 大舍 (신라 12등벼슬) 석남오의 아내가

한번에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낳았습니다


12월 29일 겨울

원성왕이 붕어(사망) 했습니다


시호를 원성 元聖 (직역하면 으뜸 성인) 이라 하고

유언에 따라 관을 봉덕사 남쪽에 옮겨서 화장했습니다


<김부식> '당서' 에는

' 정원 14년에 경신(=김경신, 원성왕의 이름) 이

죽었다 '  라고 기록되어 있고


'통감' 에는

' 정원 16년에 경신이 죽었다 ' 라고 기록되어 있다


본 사기를 기준으로 고찰하면

'통감'이 틀린 것이다


<라봉봉>그렇게 신라 37대왕 선덕왕대부터 시작된 신라 하대는

신라 38대왕 원성왕대부터 본격적으로 내물왕계의 시대가 시작됬다고

할 수 있고 원성왕은 자신대부터 자신들의 후손이

왕위를 잇게 하기 위해

자신의 조상과 왕권을 높이기 위해 여러 노력들을 했던 인물이고

가장 유명한 것은 이전에 쓴 한국사 최초의 관리시험선발제도

원성왕의 '독서삼품과' 시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외에는 원성왕은 왕족들을 주요 직책에 임명해

주요 직책을 독점했다고 하고

이는 귀족들에 대한 불신도 있겠으나

능력이 아닌 혈연위주의 좁은 인사 등으로

결과적으로는 국기가 문란해지는

결과를 낳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름 강력한 왕권을 추구하려 했던 원성왕대를 기점으로

원성왕계(내물왕계)의 시대가 시작되고

잠시 신라 멸망 전 박씨왕조가 들어서기도 했지만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 역시 원성왕의 후손이기에

원성왕은 신라 말기의 중시조(가문을 일으킨 시조) 라

할 수 있는 신라 후기의 비중있는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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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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