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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40대왕 애장왕 김청명

재위기간 9년 800~809년


애장왕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의 이름은 김청명이며

소성왕이 태자였습니다


어머니는 김씨 계화부인입니다


왕위에 오를 때 나이가 13세였으므로

아찬 병부령 언승이 섭정습니다


앞서 원성왕이 붕어(사망) 했을 때

당나라 덕종이 사봉낭중겸어사중승 위단을

지절사로 보내서 조문하게 하고

또한 소성왕 김준옹을

개부의동삼사검교태위신라왕으로 책봉하려 했는데

위단이 운주에 도착했을 때 (당나라 수도 장안에서 떠나서 신라 가는 길에)

새로운 왕(소성왕)이 또 붕어(사망, 소성왕 재위기간은 1년 5개월이었음,,)

했다는 말을 듣고 돌아갔습니다


(즉 당나라에서는 원성왕을 조문하러 사신을 보냈는데

보내는 도중에 원성왕 다음왕 소성왕 역시 짧은 재위로 사망해버리자

사신들은 돌아가게 됬습니다,,)


애장왕 1년

7월 가을

애장왕 김청명이 이름을 김중희로 고쳤습니다


8월

당나라에 가서 숙위(황제를 모시는 직)했던

학생 양열에게 두힐소수 豆肹小守 벼슬을 주었습니다


예전에 당나라 덕종이 봉천으로 피난갔을 때

양열이 난리 중에 공을 세웠다고 하여서

당황제가 우찬선대부 벼슬을 주어서 귀국시켰기 때문에

애장왕이 그를 발탁한 것이었습니다


애장왕 2년

2월 봄

애장왕이 시조묘에 참배했습니다


태종대왕(태종 무열왕)과 문무대왕(문무왕) 의

두 묘는 별도로 세우고


시조대왕(미추 이사금 김미추, 최초의 김씨왕)

및 애장왕의 고조부 명덕대왕, 증조부 원성대왕(원성왕)

조부(할아버지) 혜충대왕(김인겸) ,

아버지 소성대왕(소성왕) 을 5묘로 정했습니다


병부령(오늘날 국방부 장관) 김언승(훗날 신라 41대왕 헌덕왕 김언승으로

애장왕의 숙부[삼촌])을

어룡성 御龍省 (국왕을 가까히서 모시는 조직을 통할하는 관청)

사신으로 임명했다가

얼마 되지 않아 상대등(신라 귀족 수장직) 으로 임명했습니다


<애장왕>저는 아직 어리니까 삼촌만 믿어요 ㅎ


<김언승>허허허 (이참에 나도 한번 왕이나 해볼까 ?)


<라봉봉>5묘제 재편은 당대 애장왕의 나이가 어렸으므로

애장왕의 숙부 김언승과 김수종의 영향에서

행해진 정책이라 하고

일단 태종 무열왕과 문무대왕은 삼국통일의 주역으로서

전설적인 인물들이기에 태종 무열왕계가 아니었던

이후 신라왕들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불천위(고조할아버지인

4대조까지만 제사를 지내는게 일반적이고 이게 넘어가면

더이상 제사를 지내지 않았는데 너무 훌륭한 조상이 있을 경우

예외로 계속 제사지내는 것으로 예외급, 특급이라 해석가능) '


의 인물들이었기에  이후의 원성왕계 왕들도

태종 무열왕계(후손들)를 견제했더라도

태종 무열왕과 문무왕 자체는 성역으로 냅두게 된 거 같습니다


그런데 결국 애장왕대 있었던 5묘제 재편은

원성왕대의 5묘제 편성과 마찬가지로

딱히 이렇다 할 업적도 없는 인물들을

단순히 원성왕계가 왕위를 잇게하기 위한 수단으로

높이게 된 감이 있고

신라 내에서도 여러 불만이 생겨났을 가능성이 있씁니다


죽은사람 제사지내는게 사실 무엇이 중요하냐 해도

굳이 이런식으로 개편해서

진짜 신라인들에게 반발을 받지 않았으려면

시조 박혁거세(혁거세 거서간)와  신라 초,중기의 유명한 국왕들의

이름을 올렸어야 할 것인데

그냥 애장왕의 조상들, 김씨 세력을 높인 것에 불과하고

이는 원성왕계의 왕위 독점계획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기에

오히려 안하는것만 못한 정책이었던거 같습니다


또 애장왕의 숙부 김언승은 훗날 반란을 일으켜

애장왕을 살해하고 왕이되는데

이렇게 왕실에서는 어린 왕의 숙부들이 왕위를 찬탈한

전례들이 여럿 있었고

이에 조선시대에서야 왕족들의 명예직을 제외한

관직 진출이 금지됬다 할 수 있는데

(그렇지만 이는 또 왕실 혈통이라는 이유로 견제와

역차별을 받기에 현대 기준으로 생각해보면 또 문제가 있습니다)


아직 신라시대였고 이런 문제들은 한국사에서 계속되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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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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