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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장왕 6년

정월(1월) 봄

애장왕은 왕의 어머니 김씨를 태왕후로 봉하고

왕비 박씨를 왕후로 봉했습니다


이 해에

당나라 덕종이 사망하자

새로운 황제 당 순종이

병부낭중겸어사대부 원계방을 보내서 부고를 전하고

또한 애장왕을


개부의동삼사검교태위사지절대도독계림주제군사계림주자사겸지절충영해군사상주국신라왕


으로 책봉하고 (거의 랩수준 ;; )


그 어머니 숙씨를 대비로 책봉하고 아내 박씨를 왕비로 했습니다


<신라 귀족 1>왕께서 받으신 관작 길이가 엄청나시군,,

근데 무슨뜻이지 ?


<신라 귀족 2>대충 아주 좋다는 뜻같음 ㅇㅇ ,,


(근데 진짜 아무런 의미없이 긴 뜻이고

그냥 명예작명 같은데

저런 관작 이름이 길다는 것 = 좋은 뜻 으로 인식되서

이후에도 이렇게 긴 관작이 유행합니다)


<김부식>왕모(임금의 어머니) 의 아버지 숙명 叔明 은

내물왕의 13세손이니

곧 어머니 성은 김씨인데

아버지 이름으로서 숙씨라 한 것은 잘못이다


(중국인들이 잘 모르고 김숙명 金叔明 의

이름에서 숙명만 보고

숙씨라 생각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내 박씨를 왕비로 삼았습니다


8월 가을

공식 公式 (수학공식 할때 그공식과 같은 한자로

여기서는 공평한 법식, 나라에서 규정한 방식, 법 등을 의미한다 할 수 있습니다)

20여 조를 반포했습니다


(당시 애장왕의 나이는 17세였고

슬슬 본인의 주도로 정치를 하려고

애장왕 스스로 공식 이라는 법, 규범 같은 것을 반포해서

왕권을 강화하려 했던게 아닐가 싶습니다)


11월 겨울

지진이 있었습니다


애장왕 7년

3월 봄

일본국 사신이 오자

애장왕이 조원전 朝元殿 (신라 왕궁 건물,

왕이 새해인사를 받던 곳) 에서 접견했습니다


애장왕이 교서를 내려서

새로 절을 짓는 것을 금하고

수리하는 것만을 허락했습니다


또한 불교 행사에서 고급 비단을 사용하지 못하며

금은으로 만든 그릇을 사용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담당자로 하여금 이를 널리 알려서 시행하도록 했습니다


당나라 헌종이 숙위(황제를 모시는 일 하던 왕자 김헌충을 귀국하게 하고

그에게 시비서감의 직을 더하여 주었습니다


8월 가을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애장왕 8년

정월(1월) 봄

이찬(신라 2등벼슬) 김헌창 金憲昌 (내물왕계인 원성왕과의 왕위 다툼에서 밀려서

왕위를 양보하고 좋은 대우를 받고 살던 태종 무열왕계 김주원의 아들로

김헌창의 난을 일으킨 인물) 이


<김부식> 창 昌 을 정 貞 이라고도 한다


(김헌창 = 김헌정 金憲貞 인데 김헌정이 될 경우

신라 43대왕 희강왕의 아버지 김헌정 金憲貞 과 한자까지 이름이 같게 됩니다)


시중(오늘날 국무총리) 이 됬습니다


(원성왕이 숙부 김언승, 김수종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고

태종 무열왕계인 김헌창을 키우려 했을 수도 있습니다)


2월

애장왕이 숭례전 崇禮殿 (신라 왕궁건물, 외국 사신 접견, 연회용)

에 앉아서 음악을 감상했습니다


8월 가을

큰 눈이 내렸습니다


애장왕 9년

일본국 사신이 오자

애장왕이 후대(아주 잘 대접)했습니다


김역기를 당나라에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김역기가 당황제에게


<김역기>정원 16년에

조서로 신라의 전 임금 김준옹(소성왕) 을 신라왕으로 책봉하고

왕모(왕의 어머니) 신씨를 대비로 책봉하고

왕의 아내 숙씨를 왕비로 책봉하였는데

책봉사신 위단이 도중에 왕이 사망했다는 말(소성왕을 책봉하려

당에서 사신을 보냈는데 가는 도중에 소성왕이 사망했음) 을 듣고 돌아갔습니다


현재 그 책문이 중서성에 있사오니

청컨대 지금 제가 귀국하는 길에

그것을 가지고 돌아가도록 하여 주십시오


라고 말했습니다


당황제는


<당황제>김준옹 등의 책문은

응당 홍려시가 중서성에서 수령해와서

김역기에게 주어 그가 가지고 귀국하도록 하라


는 칙명을 내리고

이어 애장왕의 숙부 김언승과 그의 아우 김중공 등에게

문극 門戟 (위엄을 보이기 위하여문에 세우는 갈라진 창) 을 하사하고

이를 신라에서 그들의 기준과 예규에 따라 나누어 주도록 했습니다


<김부식> (소성왕의 어머니) 신씨 申氏 는

김신술 金神述 의 딸인데

신 神 자와 같은 운(소리)이기 때문에

신 申 씨라 한 것은 잘못이다


애장왕이 12도에 특사를 보내서

모든 군과 읍의 경계를 확정했습니다


7월 가을 초하루(1일) 신사일

일식이 있었습니다


애장왕 10년

정월(1월) 봄

달이 필성 성좌를 범했습니다


6월 여름

서형산성 西兄山城 (오늘날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

서도산에 있는 신라시대 산성) 소금 창고에서

소 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벽사 碧寺 에서 두꺼비가 뱀을 잡아 먹었습니다

(보통 뱀이 두꺼비를 잡아먹지만 가끔 이런일도 있다 하고

여기서는 불길함을 나타내는 기록이라 할 수 있습니다)


7월 가을

대아찬(신라 5등벼슬) 김육진을

당나라에 보내서 사은(은혜에 감사) 하고 특산물을 바쳤습니다


날씨가 크게 가물었습니다


애장왕의 숙부 김언승이 그의 아우 이찬(신라 2등벼슬) 김제옹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궁중에 들어가서 반란을 일으켜서

애장왕을 죽였습니다


애장왕의 아우 김체명이 애장왕을 시위 侍衛 (호위, 보호) 하고 있다가

함께 살해당했습니다


애장왕의 시호를 애장 哀莊 (슬플 애, 씩씩할 장)이라 했습니다


<라봉봉>13세라는 어린 나위에 왕위에 올라

숙부 김언승과 김수종의 영향속에서 자라며

성인이 된 후로부터는 나름 사치를 금하게 하는 등

본격적인 정책을 시행하려다

숙부에게 살해당한 인물로 보이고


그렇다고 숙부였던 김언승(훗날 헌덕왕)은 어린 조카 단종을 죽인 세조같이

유능한 인물이라

평가 받지도 못한 인물입니다

(보통 왕위찬탈자 = 유능함, 악독함, 카리스마 형 인물이

역사에 많다고 할 수 있는데 헌덕왕이 되는 김언승은

그렇다고 유능하거나 하다기 보다

'암군' 평이 있는 인물입니다)


왜 김언승이 굳이 왕이 어렸을 때 반란을 일으킨 것도 아니고

왕이 한창 22세의 나이가 됬을 때

반란을 일으켰냐면

처음엔 그도 딱히 왕위 욕심이 크게는 없었던 인물 같고

어린 왕도 총명함을 보여서 그냥 관망하는 입장이었던거 같습니다


그러나 애장왕이 성장하고 본격적으로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려는데

애장왕도 숙부의 영향력을 벗어나려

친당 정책보다 친일 정책을 해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려 한게 아닐까 싶고

또 후기 신라왕실에서는 왕권 강화책으로 불교보다 유교를 높이려 했던

경향이 있어보이는데

이에 불교 예식들을 축소시켜서 왕권강화를 도모하고자 했던 인물같고

또 태종 무열왕계 인물 김헌창을 등용하는 등

왕권 강화책을 적극적으로 시행하려다

이에 자극받은 김언승이 위기감을 느껴 반란을 일으킨게 아닐까 싶습니다


애장왕은 나름 총명한 기운이 있었던 인물 같고

조선의 개혁군주이자 총명함 등으로 신하들과 갈등이 있었고

죽음이 석연찮은 인물인 조선 정조 이산이 생각나기도 하고

애장왕이나 정조나

' 더 살았다면 ' 하는 아쉬움이 있는 유능한 개혁군주의

자질이 있었던 인물이라는 공통점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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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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