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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46대왕 문성왕 김경응

재위기간 18년 839~857년


문성왕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의 이름은 경응입니다


그는 신무왕의 태자이며

그의 어머니는 정계부인입니다


<김부식>정종 태후라고도 한다


(문성왕 1년)

8월

문성왕이 죄수들을 크게 사면했습니다


문성왕이


<문성왕>청해진 대사 궁복(장보고)이 일찍이 군사를 거느리고

아버지 신무왕을 도와

선왕의 대적을 격멸하였으니 (선대의 큰 도둑을 멸했으니)

그의 공로를 잊을 수 있겠는가?


라는 교서를 내리며

곧 궁복(장보고) 을 진해 장군으로 임명하고

동시에 장복 章服 (관복)을 하사했습니다


문성왕 2년

정월 봄

예징을 상대등(신라 귀족 수장직)

의종을 시중(오늘날 국무총리)

양순을 이찬(신라 2등벼슬) 으로 임명했습니다


여름 4월부터 6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당문종이 홍려시 鴻臚寺 (국가 의식, 의례 담당 관청) 에 조서를 내려서

인질 및 기한이 되어 귀국하게 된

(신라) 학생 총 105명을 돌려 보내도록 했습니다


겨울에 기근이 들었습니다


문성왕 3년

서울(=수도, 서라벌) 에 전염병이 돌았습니다


일길찬(신라 7등벼슬) 홍필이 반역을 도모했습니다

그는 일이 발각되자 섬으로 도주했습니다

이에 따라 그를 체포하지 못했습니다


(실제로 홍필도 당대 동아시아 바다는 장보고가 관리하고 있었기에

일부로 신라 중앙정부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는

섬으로 피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7월 가을

당 무종(당문종 다음 황제) 이 신라에 귀국할 관리를 선발하는데

이전에 신라에 갔던

선위부사충연주도독부사마사비어대 김운경으로 결정했습니다

당무종은 그에게 치주 장사의 직위를 주어서 사신으로 임명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신라의 왕을


개부의동삼사검교태위사지절대도독계림주제군사겸지절충녕해제군사상주국신라왕


으로 책봉하고

아내 박씨를 왕비로 책봉하는 칙명(황제의 명) 을 전하도록 했습니다


문성왕 4년

3월 봄

문성왕은 이찬(신라 2등벼슬) 위흔의 딸을 왕비로 맞았습니다


문성왕 5년

정월 봄

시중(오늘날 국무총리) 의종이 병으로 사직하자

이찬 양순이 시중이 됬습니다


7월 가을

호랑이 다섯 마리가 신궁 神宮 (시조에 제사하던 성소) 의 정원에 들어 왔습니다


문성왕 6년

2월 초하루(1일) 갑인일 봄에 일식이 있었습니다


금성이 토성을 범했습니다


3월

서울에 우박이 내렸습니다


시중 양순이 퇴직하자

대아찬(신라 5등벼슬) 김여가 시중이 됬습니다.


8월 가을

혈구진 穴口鎭 (오늘날 강화도에 설치된

신라시대 군진으로 커져가는 오늘날 전라남도 완도지역의 청해진을

견제하려 문성왕이 세운 것일 수도 있고

혈구진의 군사세력은 훗날 고려 태조 왕건 세력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을 설치하고

아찬 계홍을 진두 鎭頭 (지방의 각 진에 두었던 장관) 로 임명했습니다


문성왕 7년

3월 봄

문성왕이 청해진 대사 궁복(장보고)의 딸을

둘째 왕비로 삼고자 했습니다

이에 조정 신하들이 간하여 말하기를


<신라 조정 신하들>부부간의 도는 사람이 지켜야할 큰 질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라는 도산을 얻어 흥성하였고

은나라는 신씨를 얻어 번창하였으며

주나라는 포사로 인하여 멸망하였고

진나라는 여희로 인하여 혼란하였습니다


나라의 존망은 여기에 달려있는 것이니

어찌 신중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지금 궁복(장보고) 은 섬 사람인데

그의 딸을 어떻게 왕실의 배필로 정할 수 있겠습니까 ?


라고 했습니다

문성왕이 이 말을 따랐습니다


11월 겨울

우레(천둥) 가 있었고 눈이 내리지 않았습니다

.

12월 초하루 (1일)

해(태양) 세 개가 나란히 나타났습니다


문성왕 8년

청해진의 궁복(장보고) 이 자신의 딸을 왕비로 삼지 않는다고 해서

문성왕을 원망하며

청해진에 웅거(일정한 지역을 차지하고 굳게 막아 지킴) 하여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조정 신하들>장보고의 청해 군사들은 저번에도 5천 군사로

10만 조정군을 격파한 군사들인데

장보고를 어떻게 이김 ?? ;;


조정에서는 이들를 토벌하자니 예기하지 못한 후환이 발생할 것이 염려되고

그대로 두자니 그 죄를 용서할 수 없기에

처리할 바를 몰라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당대 조정도 대책이 없었을 정도로 커져있던 장보고와 청해진입니다)


그 때 무주 사람 염장이 용감하고 힘이 세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그가 와서


<염장>조정에서 다행히 저의 청을 들어 주신다면

저는 군사 한 명도 필요없이 빈 주먹만 가지고

궁복(장보고) 의 목을 베어 바치겠습니다


라고 말하니

문성왕이 이 말을 따랐습니다


염장은 거짓으로 나라를 배반한 척하고 청해진에 투항했습니다

궁복(장보고) 은 평소 힘센 사람을 좋아하였기 때문에

아무런 의심도 없이 그를 귀한 손님으로 대접하면서

함께 술을 마시고 매우 기뻐했습니다


<장보고>그대가 힘이 쎄고 용감하다는 소문은 익히 들었소

이제 나에게 왔으니

힘센 사람을 좋아하는 나의 기쁨이오 허허


<염장>하하 왕이 답이 없어서 도망쳐왔는데

이렇게 맞아주셔서 감사할 뿐이옵니다


<장보고>음 취기가 올라오는군,,


그(장보고) 가 술에 취하자

염장은 궁복(장보고) 의 칼을 빼앗아서

목을 벤 후에

그의 무리를 불러 사유를 설명하니

그들은 엎드려 감히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염장>궁복은 자신의 딸이 왕비가 되지 못했다는 이유로

나라에 반란을 일으켰다

청해진의 그대들은 궁복의 군사인가

신라의 군사인가 ?


<청해 군사들> ,, (아무말도 할 수 없겠군,,)


<라봉봉>문성왕이 왕위에 오른데 가장 크게 기여한 인물은

다름아닌 장보고라 할 수 있습니다


장보고 역시 바다를 수호하며 해적들에게 납치되어 팔려가던

신라인들을 구원한 영웅이었지만

딸을 왕비로 앉히려 한다는 등

그 역시 권력욕이 없다고는 할 수 없는 인물이었고

(역사에서 영웅이라 불러지는 인물들의 빛과 그림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성왕은 즉위했을 때 이미 조정을 크게 위협할 정도의 크기로 커져버린

장보고에 대한 두려움과 견제를 하려는 마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홍필이 반란을 일으키고 섬으로 도망가자 잡지 못했다는 기록은

만약 당대 바다를 관리하고 있었던 장보고에게 부탁하면

금방 처리될 일임에도 그러지 못했다고 할 수 있기에

이미 문성왕과 장보고의 불신과 갈등이 커져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문성왕은 강화도 지역에 혈구진을 설치해서

완도 지역의 장보고의 사병화되가는 청해진을

군사적으로도 견제하려고도 했던 것으로도 보이고


또 이미 서라벌의 신라 귀족들은 너무도 커져버린 장보고에 대한 두려움이

컸던 것으로 보이고

장보고가 섬사람이라는 이유로 그의 딸을 왕비로 맞는 것을

반대했다는 것은 아무리 골품제, 신분제가 강했던 신라사회였지만

단순히 출신때문만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이유 들이나

자신에 대한 견제 등에 불만을 가진 장보고의 반란이었다고 할 수 있고

당대의 영웅이었으나 치밀함 보다는 호탕함, 사람 사귀기를 좋아해

의심없이 염장을 귀한 손님으로 대접하다가

염장에게 허무하게 사망한 것으로 보이고


빛났던 그의 일대기와 달리 끝이 너무 허무하기에

그가 반란을 일으킨것도

옛날 김우징(신무왕) 에게 군사 5천을 줬던 것같은

치밀한 계획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자신의 견제, 차별에 대한 시위성 목적의 우발적인 반란을

일으키다가 살해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역시 여러 의문적인 모습을 남기는 인물이기는 하나

당대, 후대에는 나라와 백성을 지키고 자국 문화,사상 발달에 기여한

영웅적 인식이 강했기에 오늘날에도 한국사 위인으로 이야기 되는 인물이고

어떻게 보면 신라 왕실,귀족들이 장보고 죽이기를 기획해

충직하며 우둔하게 용맹했던 장보고를 자극해서

반란을 유도한 것일 수도 있고 미스터리한 일이라 할 수 있지만

일단 망해가던 신라가 그런 인물을 담기에는

그릇이 너무 작아 그릇이 깨질뻔하다가

아예 장보고를 제거하게 된 거 같고

결과적으로 시대의 영웅에 대한 질투심과 견제 등으로

아예 장보고를 제거해버려서 이에 바다에는 다시 구멍이 생기게 됬고

없어졌던 해적들이 다시 생겨나고

다시 난세가 시작되며 신라 멸망이 가속화 된 거 같습니다


장보고 역시 딸을 왕비로 앉히려는 등

분명 사리사욕이 없었던 인물이라 할 수는 없지만

시대의 영웅을 대한 당대 신라인들의 모습은

'왜 신라가(혹은 멸망 직전의 나라가) 멸망할 수밖에 없었는가'

를 생각해 볼 수있게 하는 기록이라고도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미천한 출생으로 태어났지만

자신의 능력으로 장군이 되어 나라와 백성들을 수호하며

바다의 질서를 주도했던

해상왕 海上王 혹은 바다의 왕자라고 불린

청해진 대사 장보고 ,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한국의 위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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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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