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문성왕 9년

2월 봄 평의전과 임해전을 중수(낡고 헌 것을 손질해서 고침) 했습니다


( 重修平議臨海二殿 중수평의림해이전 )


5월 여름

이찬(신라 2등벼슬) 양순과

파진찬(신라 4등벼슬) 흥종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처형 당했습니다


8월 가을

세자를 왕태자로 봉했습니다


시중(오늘날 국무총리) 김여가 사망하자

이찬(신라 2등벼슬) 위흔이 시중이 되었습니다


문성왕 10년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었습니다


시중 위흔이 퇴직하자

파진찬(신라 4등벼슬) 김계명이 시중이 되었습니다


10월 겨울

하늘에서 우레(천둥)와 같은 소리가 났습니다


문성왕 11년

정월(1월) 봄

상대등(신라 귀족 수장직) 예징이 사망하자

이찬 의정이 상대등이 되었습니다


9월 가을

이찬 김식 , 대흔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처형 당하고

대아찬(신라 5등벼슬) 흔린이

이에 연루되었으므로 역시 처벌되었습니다


(장보고 사후 계속해서 반란이 일어나는 신라 조정입니다

문성왕은 장보고를 김유신과 문무왕의 관계처럼

순망치한[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림] 의 관계같이

적극적으로 밀어줬어야 했을 것인데

자신의 아버지를 왕위에 올려준 장보고를 제거함으로서

왕권이 급속도록 약화됬고 이에 신하들이 다시 반란을

일으키게 된거 같습니다)


문성왕 12년

정월(1월) 봄

토성이 달에 들어갔습니다


서울(=수도, 서라벌) 에

흙비가 내렸으며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습니다


사형수 이하의 죄수를 석방했습니다


문성왕 13년

2월 봄

(해상왕 장보고가 세웠던) 청해진을 없애고

그 지방 사람들을 벽골군 碧骨郡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시) 으로

옮겨 살게 했습니다


<청해 군사들>청해 대사님과

바다를 누비던 것도 이제는 지나간 이야기가 되었군,,


4월 여름

서리가 내렸습니다


당나라에 갔던 사신인

아찬(신라 6등벼슬) 원홍이

불경과 부처의 치아를 가지고 왔습니다


(당연히 사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문성왕이 교외(도시의 주변지역) 로 나가서 그를 맞았습니다


문성왕 14년

2월 봄

파진찬(신라 4등벼슬) 진량이

웅주 熊州 (오늘날 충청남도 공주시) 도독이 되었습니다


조부 調府 (공물, 부역 [세금] 담당 관청) 에 불이 났습니다


7월 가을

명학루 鳴鶴樓 (서라벌에 있었던 누각) 를

중수 (낡고 헌 것을 손질하며 고침) 했습니다


11월 겨울

왕태자가 죽었습니다


문성왕 15년

6월 여름

홍수가 났습니다


8월 가을

서남 지방의 주와 군에 메뚜기 떼가 나타났습니다


문성왕 17년

정월 봄

사신을 보내 서남 지방의 백성들을 위문했습니다


12월 겨울

진각성 珍閣省 (궁중 보물 관리 관청으로 추정) 에

불이 났습니다


토성이 달에 들어 갔습니다


문성왕 19년

9월 가을

문성왕이 병환이 들자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습니다


<문성왕>과인이 미미한 자질로 높은 자리에 처하여

위로는 하늘에 죄를 짓지 않을까 두려워 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에게 실망을 주지 않을까 걱정하였으니

밤낮으로 깊은 물과 얇은 얼음을 건너는 듯 전전긍긍하면서도

세 명의 재상과 여러 신하들의 보좌에 의지하여 왕위를 유지해왔다


이제 나는 갑자기 병에 걸린지 열흘이 지났으니

정신이 혼몽(정신이 흐릿하고 가물가물함) 하여

아침 이슬 보다 빨리 세상을 떠날지도 모른다


선조로부터 내려오는 사직에는 주인이 없을 수 없으며

국가의 정치에 관한 모든 사무는 잠시라도 폐할 수 없다


돌아보건대 서불한(=각간=이벌찬, 신라 1등벼슬)

의정(이후 신라 47대왕 헌안왕 김의정) 은

선왕의 손자요

나의 숙부이다

그는 효성과 우애가 있고 명민하며

관후하고(관후하다, 마음이 너그럽고 후덕하다)

인자하여

오래도록 재상의 직에 있으면서

왕의 정사를 도왔으니


위로는 종묘를 받들 만하고

아래로는 창생 蒼生 (세상의 모든 사람) 을 기를 만하다


이에 나는 무거운 책무에서 벗어나

어질고 덕 있는 이에게 그것을 맡기려 하는 바

그것을 부탁할 적임자를 얻었으니

다시 무슨 여한이 있으랴?


살고 죽는 것과 시작하고

끝맺는 것은 만물의 위대한 기약이요

오래 살고 일찍 죽는 것은 천명이 부여하는 정해진 몫이다

세상을 뜨는 자는 하늘의 이치에 이르는 것이니

세상에 남는 자가 지나치게 슬퍼할 필요는 없다

너희 여러 신하들은 힘을 다하여 충성할 것이며

가는 사람을 장례지내고 살아있는 사람을 섬김에 있어서

혹시라도 예절을 어기지 말 것이다

나라 전체에 포고하여  나의 뜻을 분명히 알게 하라 !


(유언을 남기고) 7일 후 

문성왕이 붕어(사망) 했습니다


시호를 문성 文聖 (글월 문, 성인 성) 이라 하고

공작지 孔雀趾 에 장사지냈습니다


<라봉봉>문성왕이 장보고를 견제한 배경에는

숙부였던 김의정의 개입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고

혹은 조선시대 이순신을 견제한 선조같이

문성왕 역시 그 나름대로 왕권강화의 목적으로

장보고를 견제하다가 더 큰 문제가 생기는 결과가 된게

아닐까 싶습니다


마지막 유언은 나름 문무왕의 유언이 떠오르기도 하고

문필적 재능은 있었던 것 같아

또다시 조선 선조가 떠오르고,,

이에 문성왕이라는 시호가 생기게 된 거 같습니다


문성왕이 청해진을 없앰으로서

바다에는 다시 해적이 창궐하고

청해진이 주도하던 국제무역도 사그라드는 등

여러 문제가 있었다고 할 수 있고

이미 청해진 폐지 이전에도 혼란의 신라였지만

청해진 폐지 이후 반란이 일어나는 등

빠른 속도로 혼란기가 시작되게 된 거 같습니다


반응형
Posted by 라봉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