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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47대왕 헌안왕 김의정

재위기간 4년 857~861년

헌안왕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름은 의정


<김부식>우정이라고도 한다


이며 신무왕의 이복(다른 어머니) 아우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조명부인이니 선강왕의 딸입니다


문성왕의 유언에 따라 왕위에 올랐습니다


(헌안왕 1년)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고

이찬(신라 2등벼슬) 김안을 상대등(신라 귀족 수장직)으로 임명했습니다.


헌안왕 2년

정월(1월) 봄

헌안왕이 직접 신궁 神宮 (시조를 제사하던 성소) 에 제사지냈습니다


4월 여름

서리가 내렸습니다


5월부터 7월 가을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당성군 唐城郡 (오늘날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남쪽 강변에서

큰 물고기가 나왔는데

길이가 40보(1보=5척, 1척 24.5cm 이니 49m )

넓이가 6척 (147cm) 이었습니다


헌안왕 3년

곡식이 귀해서 사람들이 굶주리므로

헌안왕이 특사를 보내서 구제했습니다


4월 여름

헌안왕이 교서를 내려서

제방을 축수하고(고치고 같습니다) 농사짓기를 권했습니다


(敎修完隄防勸農 교수완제방권농)


헌안왕 4년

9월 가을

헌안왕이 임해전에 여러 신하들을 모았을 때

왕족 김응렴(이후 신라 48대왕 경문왕 김응렴) 이

열 다섯 살의 나이로 이 자리에 참석했습니다


<김응렴>(◕◡◕)


<헌안왕>똑똑해 보이는군,,


헌안왕이 그(김응렴) 의 생각을 알고자 해서 갑자기 (김응렴에게)


<헌안왕>네가 상당 기간 사방을

유력(여러 고장을 두루 돌아다니다) 하며 견학한 바 있는데

착한 사람을 본 일이 없었던가 ?


라고 물었습니다


김응렴은


<김응렴>제가 일찍이 세 사람을 보았는데

그들은 착한 행동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헌안왕이


<헌안왕>어떤 행위인가 ?


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김응렴은


<김응렴>한 사람은 높은 가문의 자제로서

다른 사람과 교제함에 있어서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남의 아래에 처하였으며


한 사람은 재물이 많아 사치스러운 의복을 입을 만한데도

언제나 베옷을 입는 것으로 자족하였으며


한 사람은 세도와 영화를 누리면서

한 번도 남에게 세도를 부리지 않았습니다


제가 본 것은 이와 같았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헌안왕이 이 말을 듣고 잠자코 있다가 왕후에게 귓속말로


<헌안왕>내가 사람을 많이 겪었지만 응렴 같은 자는 없었소


라고 말하고

사위를 삼을 생각으로 응렴을 돌아 보고 말했습니다


<헌안왕>그대(김응렴)는 자중자애 (자기의 몸을 소중히 하고

제 몸을 제가 아낌) 하라

내가 딸이 있으니 사위를 삼도록 하겠다


헌안왕은 다시 술을 가져오게해서

함께 마시면서 조용히 말했습니다


<헌안왕>내가 딸이 둘 있는데

형(언니)은 금년에 스무살이요

동생은 열 아홉살인데

그대의 마음에 드는 대로 장가를 들라 !


김응렴은 사양할 수 없어

일어나 절을 하며 감사의 뜻을 표하고

곧 집으로 돌아와 부모에게 이 사실을 말했습니다


그의 부모는


<김응렴의 부모>듣건대 왕의 두 딸의 얼굴은

형 (언니인데 계속 형 兄 이라 나옵니다 자매끼리 쓰일때도

있고 그럴경우에는 연장자를 뜻한다고 합니다)

이 동생만 못하다고 하니

만약 부득이 장가를 가야 한다면

동생에게 장가를 드는 것이 좋겠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김응렴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주저하다가

흥륜사 興輪寺 (서라벌에 있던 신라 최초의 큰 절) 스님에게 물었습니다


그 스님은


<흥륜사 스님>형(언니) 에게 장가를 들면 세 가지 이익이 있을 것이요

동생에게 장가를 들면 반대로 세가지 손해를 볼 것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흥륜사 스님의 말을 들은) 김응렴이 곧 (헌안왕에게)


<김응렴>제가 감히 마음 대로 결정을 못하겠사오니

다만 왕의 명령에 따르겠나이다


라고 아뢰니

이에 헌안왕이 맏딸(언니) 을 시집 보냈습니다


헌안왕 5년

정월(1월) 봄

헌안왕이 병으로 누워 위독해지자 측근들에게 말했습니다


<헌안왕>과인이 불행하게 아들 없이 딸만 두었다

우리 나라에는 예전에 선덕(선덕여왕) ,

진덕(진덕여왕) 두 여왕이 있었지만

이는 암탉이 새벽을 알리는 것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과

비슷한 일로써

이를 본받을 수는 없다


사위인 응렴은 나이가 비록 어리지만 성숙한 덕성을 갖추고 있다

그대들이 그를 임금으로 세워 섬긴다면

반드시 조종 祖宗 (조상) 의 훌륭한 후계자를 잃지 않을 것이요

내가 죽은 이후에도 나라에 해로운 일이 없을 것이다


이 달 29일에 왕이 붕어(사망) 했습니다


시호를 헌안 憲安 (법 헌 , 편안 안) 이라 하고

공작지 孔雀趾 에 장사지냈습니다


<라봉봉>헌안왕은 재위기간도 4년이고

이전왕 문성왕은 아들이 있었는데도

아들을 제치고 문성왕의 숙부로서 왕이 된 인물이라

여러 설들이 있으나

기록상 인덕이 있어서 왕위에 오른 인물로 보이고

4년이라는 짧은 재위기간이었지만

백성들을 구제하려 하고

아들이 없어 인덕있는 인물을 후계자로 정하려는 등

훌륭한 모습을 보인 인물 같습니다


김응렴을 사위로 삼은 이야기가 기록의 절반인데

이후 경문왕이 되는 김응렴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설화의

주인공 임금님이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삼국사기 궁예 열전에는

궁예의 성은 김씨이며 (김궁예)

아버지는 신라 47대왕 헌안왕이며

어머니는 헌안왕의 후궁이었다고 나오는데

( '혹은 신라 48대왕 경문왕 김응렴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 라고도

기록됨)


보통 궁예의 아버지는

경문왕 설이 더 지지받고 있다고도하고

일단 슬슬 후삼국 시대 주역 인물들이 태어나는 시기가

펼쳐지고 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고


삼국사기 기록대로 헌안왕이 사실이라면

헌안왕은 후궁을 임신시켰고

후궁은 자신의 친정, 즉 궁예의 외가에서

김궁예를 낳았고 (보통 성을 잘 안부르는 인물로 유명합니다,,)


당시 불길한 징조가 있었다고 해석하는 일관 (천문관원)

의 말 때문에 궁예를 기르면 안된다 했고

헌안왕은 이에 궁예를 죽이려 했고

심부름꾼을 보내서 궁예를 다락 밑으로 던졌는데

밑에서 젖먹이 유모가 궁예를 받았는데

잘못해서 손으로 눈을 찔렀고

이 때부터 궁예는 애꾸로 살게 됬고

젖먹이 유모는 궁예를 안고 도망쳐서

숨어서 궁예를 키웠다고 합니다


그냥 불길한 징조만 믿고 자신의 자식을 죽이려 했기에

미친 부모라 할 수 있지만

헌안왕의 기록상 약간의 의문점도 드는데

대신 궁예가 정실부인이 아닌 후궁의 몸에서

서자로 태어났기에

가뜩이나 헌안왕 본인도 문성왕의 숙부인데

문성왕의 아들을 제치고 애매한 정통성으로

왕위에 오른 인물이라

적당히 왕을 하고 다른 이에게 넘겨야 할 판이었고

궁예는 정실부인 소생도 아니어서

왕위를 기다리는 다른 세력들, 정실부인의 압박등에

궁예를 죽이려 하게 된게 아닐까 싶고

그 결과 원망을 품고 자라난 궁예가

성장해서 신라에게 칼을 겨누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궁예는 애꾸눈에 관심법 등 기묘하며

잔학하고 폭군적 이미지가 있는 인물이지만

이는 '역사는 승자의 기록' 이라는 말처럼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 측 세력에서

물론 궁예 역시 잘못한 점이 없을 수는 없더라도

일부로 궁예를 더 폭군적 이미지를 씌운 것일 수도 있고

개인적으로는 그는 폭군이었지만

상당히 독특한 인물이며

밑바닥에서 본인의 어떤 카리스마나 매력 등으로

큰 세력을 형성해 나라를 건국해서

후삼국 시대를 열었던 인물이라 할 수 있고

독특함 + 부모에게 버림받아 성장해

인생관이나 성격등이 삐뚤어졌던 불쌍한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태조 왕건은 궁예를 밀어내고 고려의 왕이 됬지만

이후 왕건의 후손들인 왕씨들을 몰아내고 왕이 된

이성계의 조선인들은 역시 왕씨들, 고려를 부정하기 위해

곧바로 궁예를 왕건보다는 조금 못하거나 비슷비슷하다는 식의

재평가를 시작했다는 점은

역사의 아이러니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헌안왕 혹은 다음왕인 경문왕 당대에는

후삼국 시대의 주역으로서

수많은 이야기를 남긴 한국사의 기묘한 인물 김궁예가

어딘가에서 성장했었을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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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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