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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50대왕 정강왕 김황

재위기간 886~887년 1년


정강왕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의 이름은 황이며

경문왕(신라 48대왕 경문왕 김응렴) 의 둘째 아들입니다


(정강왕 1년)

8월

이찬(신라 2등벼슬) 준흥을 시중(오늘날 국무총리) 으로 임명했습니다

서쪽 지방에 가뭄이 들어 황폐했습니다


정강왕 2년

정월(1월) 봄

황룡사에 백고좌 百高座 (사좌좌 [부처님을 모시는 자리] 백 개를 만들어서

고승들을 모셔다 설법하는 큰 법회)

를 열고 정강왕이 직접 가서 강론을 들었습니다


한주 漢州 (=한산주 , 오늘날 황해도와 경기도 ,

충청도 일부지역) 이찬(신라 2등벼슬) 김요가 모반하므로

군사를 보내 그를 처형했습니다


(모반, 반역이 국가적으로 심각한 것인데

신라 하대에 있어서는 이벤트처럼,,

꾸준히 벌어지고 있고

그만큼 왕권이 약화되었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5월 여름

정강왕이 병들자 시중 준흥에게 말했습니다


<정강왕>나의 병이 위급하니 다시 회복되지 못할 것이다

불행히 뒤를 이을 자식은 없으나

누이동생(여동생) 만(이후 신라 51대왕 김만) 은

천성이 명민하고 체격이 남자와 같으니

그대들이 선덕왕(선덕여왕)과 진덕왕(진덕여왕)의

옛 일을 본받아 그녀를 왕위에 세우는 것이 좋을 것이다


,,


<신라 신하 1>근데 선덕왕과 진덕왕 시기에는

태종 무열왕과 김유신 장군이 계셨잖아,,


<신라 신하 2>현재 나라도 엉망인데

그래도 그때는 잘됬으니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여왕을 다시 세워보는 수밖에,,


<신라 신하 1>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데 ㅡ_ㅡ 엣헴


<신라 신하 2>그건 그렇지 엣헴 엣헴


7월 5일 가을

정강왕이 붕어(사망) 했습니다

시호를 정강 定康 (정할 정 혹은 편안할 정 , 편안 강) 이라 하고

보리사 菩提寺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남산 미륵골에 있는 사찰)

동남쪽에 장사지냈습니다


<라봉봉>신라 49대왕 헌강왕에게는 아들이 있기는 있었는데

정실부인의 아들이 아니라

헌강왕이 사냥 구경중에 자태가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서

뒷수레에 태우고 임시 천막 혹은 임시 궁궐에서

야합 野合 (정식 부부가 아닌 사이 혹은 불륜의 성관계) 을 했는데

정식 부인의 아들이 아니기도 했고 당시 거의 1살의 갓난아기라

헌강왕의 동생 김황이 왕위를 이어서

신라 50대왕 정강왕 김황이 됬는데

정강왕 역시 매우 짧은 기록을 남기고

재위 1년만에 사망했습니다,,


신라 조정에서는 계속 이어지는 반란과

점차 신라에 등을 돌려가는 백성들에 불안을 느껴서

옛날 선덕여왕 , 진덕여왕 시대처럼

영광의 시대를 재현해보려고

결국 정강왕의 젊은 여동생 김만을

왕위에 잇는 시도를 했고


사실 선덕여왕이나 진덕여왕도 딱히 잘한 왕들은 아니고

당시에는 김춘추, 김유신이 두 여왕의 적극적인 비호아래서

자신의 세력을 키워가던 시기라 할 수 있었기에

신라인들에게는 전설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고


정강왕은 그런 점은 생각하지 못하고

단순히 

' 또다시 여왕이 들어서면 나라가 좋아질까 ? '

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여동생을 왕위로 민거 같습니다


여왕이 나오는게 처음이 어렵지

이전에 선덕,진성여왕으로 두번째 까지

여왕이 나오기도 했고

이에 한국사 최후의 여왕 진성여왕이 등극했고

진성여왕도 선덕,진덕여왕같이

딱히 잘하지는 못한 인물이라기보다

삼촌과 간통(불륜)도 하고

아예 미남자 두 세명을 몰래 불러들여 음란하게 지내며

요직을 주어서 나라 정사를 맡기며 기강이 문란해졌고,,

(그나마 선덕,진덕여왕도 김춘추와 김유신의 적극적인

보호가 있었고 선덕,진덕여왕도 김춘추와 김유신을

적극적으로 밀어줬기에

그나마 중간이나 중간이상은 했다 평을

받을 수 있었다고 봅니다)


결국 신라 붕괴의 신호탄이면서 농민반란이었던 

'원종과 애노의 난' 을 시작으로 (+궁예와 견훤 등장)

진성여왕대부터 약육강식의 난세

'후삼국 시대' 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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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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