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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성여왕대에 시작된 후삼국시대, 궁예와 견훤의 등장>


진성여왕 5년

10월 겨울

북원 北原 (=북원경 , 오늘날 강원도 원주시) 의

도적 두목 양길이 그의 부하 궁예로 하여금

기병 백여 명을 거느리고 북원(=북원경, 오늘날 강원도 원주시) 동쪽

부락(마을) 과

명주(오늘날 강원도 강릉지역) 관내 管內 (관리하는 구역 안)

주천 酒泉 (오늘날 강원도 영월군 지역) 등 10여 군현을 습격하게 했습니다


<궁예>내가 바로 신라 왕자 출신 김궁예이다 !!


<궁예의 부하들>우리 애꾸눈의 궁예형님이 오늘도 허언증이 도지셨군,,


<궁예>잔말말고 나를 따르라 !!!!!


<궁예의 부하들>와아아 !!


(후삼국 시대의 주역이며 후고구려를 건국한 인물

궁예의 첫 등장 기록입니다

그는 신라 왕의 서자 출신이었으며

한쪽 눈이 없는 애꾸눈,

관심법 등 기이한 이미지의 인물로

여러 일화를 남긴 인물로 유명합니다

요즘식 표현으로 중2병 걸린 인물이라는 평이 있고

실제 삼국사기 열전 기록에도

궁예는 부하들과 생사고락을 같이 하며

약탈품 나누기도 공평하게 했다 하고

이에 당대의 여러 사람들이 그를 마음속으로

두려워하고 사랑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악인, 폭군으로 이야기 되는 인물이지만

궁예를 몰아냈던 왕건 , 고려 세력에 의해 더욱 폄훼됬을 가능성도 있고

오늘날 한국인들에게도 독특한 이미지로 이야기 되는

상당한 매력 캐릭터인 인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진성여왕 6년

완산 完山 (=완산주, 오늘날 전라북도 전주시) 의 도적 견훤이

주(완산주)에 웅거(일정한 지역을 차지하고 굳게 막아 지킴) 해서

후백제라고 자칭했습니다


<견훤>내가 옛날 백제 의자왕(백제 마지막왕)의 원수를 갚겠다 !! 


<완산주 사람들>견훤이 옳다 !!

원수 신라에 대항해 대백제국을 다시 세우자 !!


,,


<신라 조정 관리들>북방에서는 궁예가,

서방에서는 견훤이 일어섰군,,


(그렇게 이번에는 후백제를 건국한 후삼국 시대의 주역

견훤이 등장하고 결국 통일신라의 멸망 전 과도기 시기였던

후삼국 시대가 시작됬습니다,,)


무주 武州 (=무진주 , 오늘날 전라도 광주광역시) 동남쪽의 군현이

그(견훤) 에게 투항(항복) 했습니다


진성여왕 7년

병부(오늘날 국방부) 시랑(차관직 벼슬) 김처회를

당나라에 보내 정절 旌節 (깃발과 증표, 의장[의식]용) 을 바치게 했는데

그는 바다에 빠져 익사했습니다

(배를 타고 당에 갈때 바다에 빠져 사망한거 같습니다,,)


진성여왕 8년

2월 봄

최치원(신라 지식인)이 시국에 관한 의견

십여 조목(시무십여조, 망해가는 신라를 제대로 바로잡기 위해 해야 할

열가지 정도의 일) 을

작성해서 바쳤습니다


진성여왕이 이를 기쁘게 받아 들이고

최치원을 아찬(신라 6등벼슬) 으로 삼았습니다


(여기서 최치원은 6두품 신분이었고

그가 오를 수 있는 최대 한계 벼슬까지 받게 된 것이지만

그럼에도 6두품 세력들은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승진한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10월 겨울

궁예가 북원 北原 (=북원경 , 오늘날 강원도 원주시) 으로부터

하슬라 何瑟羅 (오늘날 강원도 강릉시) 에 들어오니

따르는 무리가 6백여 명에 달했습니다

그는 장군이라고 자칭(스스로 일컬음) 했습니다


진성여왕 9년

8월 가을

궁예가 저족 猪足 (오늘날 강원도 인제군) ,

성천 狌川 (오늘날 강원도 화천군) 의 두 군을 탈취하고

또한 한주 漢州 (=한산주, 오늘날 황해, 경기, 충청도 일부지역)

관내(관리하는 구역 안) 의 부약 夫若 (오늘날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 ,

철원 (오늘날 강원도 철원군 풍청면) 등 10여 군현을 격파했습니다


(철원은 특히 궁예의 거점지이자

궁예가 세운 나라의 수도가 되기도 했던 지역이고

점점 강원도, 신라 북부를 장악하기 시작한 궁예라 볼 수 있습니다)


10월 겨울

진성여왕은 헌강왕(신라 49대왕 헌강왕 김정) 의

서자 庶子 (혼외 자녀, 정식부인이 아닌 다른 부인에게서 난 자식)

요(이후 신라 52대왕 효공왕 김요) 를 태자로 삼았습니다


처음에 헌강왕이 사냥 구경을 하다가

길 옆에서 한 여인을 보았는데

그녀의 자태가 아름다웠습니다


헌강왕이 마음 속으로 그녀를 사랑해서 뒷수레에 태우고

행재소 (=별궁, 임금이 궁을 떠나 멀리 나들이할 때 머무르던 곳 기록에서는

유궁 帷宮 이라 나와있고 임금이 임시 거처하려 만든 장막이라고 합니다)

에 와서

야합 野合 (들 야, 합할 합자로 들에서 합친다는 뜻인데

불륜, 간통을 의미한다 할 수 있고

정치적으로는 몰래 합친다는 식의 의미로도 쓰이는데

남녀가 성관계를 집에서 하는 게 아니라 들, 밖에서 한다는 것은

곧 불륜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는 한자어라 할 수 있습니다)


했는데 바로 임신이 되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김요) 가 장성하자 체격이 크고 용모가 걸출하므로

이름을 요 嶢 (높을 요) 라고 했습니다


진성여왕이 이 말을 듣고 그(김요)를 궁에 불러들여서

손으로 그(김요)의 등을 어루만지면서

(뭔가 할머니가 아기 만지는 느낌이지만

진성여왕은 당시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 김요는 10살의 어린이)


<진성여왕>나의 형제 자매의 골격은 다른 사람들과 다른데

이 아이는 등에 두 뼈가 솟아 있으니

정말 헌강왕(진성여왕의 오빠였습니다) 의 아들이다


라고 말하고

곧 관리에게 명하여 예를 갖추어 높이 봉했습니다


진성여왕 10년

도적들이 서남쪽에서 봉기했습니다

그들은 바지를 붉게 물들여 남들과 구별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을


'붉은 바지를 입은 도적 (赤袴賊 적고적)'


이라고 불렀습니다

(적고적의 난)


그(붉은 바지 도적단) 들이 주와 현을

도륙(사람이나 짐승을 함부로 참혹하게 마구 죽임) 하고

서울(=수도, 서라벌) 의 서부

모량리 牟梁里 까지 와서 인가를 위협하고 약탈해서 돌아갔습니다


(그렇게 진성여왕대부터 시작된 후삼국 시대의

지방 봉기는 전국적으로 퍼져나갔고

수도도 결코 안전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진성여왕 11년

6월 여름

진성여왕이 측근들에게


<진성여왕>근년 近年 (최근 몇 년) 이래로 백성의 생활이 곤궁해지고

도적들이 봉기하니

이는 내가 덕이 없기 때문이다

숨어 있는 어진 자에게 왕위를 넘겨주기로

나의 뜻이 결정 되었노라


라고 말하고

왕위를 태자 요에게 선양(임금의 자리를 물려줌) 했습니다

(진성여왕은) 이에 당에 사신을 보내 표문을 올려 말했습니다


<진성여왕>신하 아무개는 아룁니다

희중의 관직에 처하는 것이 저의 본분이 아니며

연릉의 절조를 지키는 것이

제가 생각하는 좋은 방도입니다

저의 조카 요(김요)는

죽은 형(오빠) 정(신라 49대왕 헌강왕 김정)의 아들입니다

그는 나이가 열 다섯(실제로는 15살이 조금 안됬습니다)이 되었고

종실(왕실)을 흥성케할 자질이 있기에

인재를 밖에서 구하지 않고 안에서 선택하여

근일(요즘)에 이미 나라 일을 임시로 맡겨

국가의 재난을 안정시키게 하고 있습니다


(문란한 성생활, 세금탕진, 도적 봉기, 도적 진압실패 등

진성여왕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답이 없었는지

그냥 어린 조카에게 왕위를 넘기고

조용히 살려 했던 진성여왕 같습니다

나름 망칠건 다 망쳐놨어도

일말의 양심은 있었던 행보를 보인 진성여왕 같고

그로 인해 말년이 그나마 덜 추해졌다고 생각됩니다

박수칠때 떠나라도 아니고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그냥 스스로 떠난 인물 같습니다,,)


12월 겨울 을사

진성여왕이 북궁 北宮 에서 붕어(사망) 했습니다

시호를 진성 眞聖 (참, 진리 진자에 성인 성,, 인데

행적과 다르게 시호 하나는 되게 좋습니다,, ) 이라 하고

황산 黃山 에 장사지냈습니다


<라봉봉>한국사 마지막 여왕 진성여왕입니다

워낙 기록들이 엽기적이고 괴랄하며

진성여왕대부터 혼란과 난세의 시작되기에

여왕을 떠나서 암군 논란이 있는 인물이고 (사실 논란이라 하기도 어렵습니다,,)

선덕여왕 , 진덕여왕의 좋은 선례를 따르려는 기대감으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으나

본인 대에 나쁜 선례를 만들어놔서

덕분에 가뜩이나 어려웠던 여성들의 왕위 진출길은

더더욱 막힌게 아닐까 싶습니다


워낙 괴랄하고 엽기적인 기록들이라

조작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있는데

딱히 좋은 기록을 찾기가 어려워서

진실일 가능성이 있어 보이고,,


나름 지식인이었던 최치원을 등용하려 했으나

이미 기울대로 기운나라에

6두품 신분의 최치원이

신라 사회에서 굳을대로 굳어버린

골품제를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또 칼을 들고 도적들이 일어나는데

이미 국가 재정도 텅빈상태에서 진압할 여력도 없는 나라에서

약육강식의 현실 생존 게임이 시작되갔는데

그런 신라의 조정에서 지식인들이 설 자리는 더더욱 좁아졌다고 할 수 있고,,


기록 하나하나가 혼란과 혼란의 연속인

'총체적 난국' 의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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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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