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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공왕대의 궁예의 고려(후고구려) 건국 ,

국토가 줄어드는 효공왕대의 신라>


신라 52대왕 효공왕 김요

재위기간 15년 897~912년


(진성여왕대부터 후삼국 시대가 시작됬고

효공왕대에는 신라 기록이라기보다

후삼국 시대의 주역인 궁예, 견훤의 활약 ?? 기록이 많습니다,,)


효공왕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의 이름은 요이며

헌강왕의 서자(정식 부인이 아닌

다른 여인에게서 낳은 자식) 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김씨였습니다


(효공왕 1년)

죄수들을 크게 사면했습니다


문무백관의 작위를 한급씩 올렸습니다


효공왕 2년

정월(1월) 봄

효공왕의 어머니 김씨를 의명 왕태후로 높히고

서불한(=이벌찬, 신라 1등벼슬) 준흥을

상대등(신라 귀족 수장직) 으로 ,

아찬(신라 6등벼슬) 계강을 시중(오늘날 국무총리)으로 삼았습니다


7월 가을

궁예가 패서도 浿西道 (패서지역, 패강=대동강이니

대동강쪽의 신라 서북방 변경) 와

한산주 漢山州 (오늘날 황해도, 경기도, 충청도 일부)

관내 管內 (관리하는 구역 안) 의 30여 성을 빼앗고

마침내 송악군 松岳郡 (오늘날 경기도 개성시 훗날 고려 수도 개경)

에 도읍을 정했습니다


(궁예의 신라 북방 점거 완료)


효공왕 3년

3월 봄

이찬(신라 2등벼슬) 예겸의 딸을 왕비로 맞았습니다


7월 가을

북원 北原 (=북원경 , 오늘날 강원도 원주시) 의

도적 두목 양길은,

궁예가 자기를 배반할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을 싫어해서

국원 등 10여 성주 城主 (성의 주인 , 지방 호족) 들과 함께

그(궁예)를 공격하기로 계획하고

비뇌성 非惱城 아래까지 진군했으나

양길의 군사가 패해서 도주했습니다

(비뇌성 전투 , 비뇌성 전투로 양길은 몰락하고

궁예는 신라 북방지역의 패권을 장악합니다)


효공왕 4년

10월 겨울

국원 國原 (오늘날 충청북도 충주시) ,

청주 菁州 (오늘날 경상남도 진주시) ,

괴양 槐壤 (오늘날 충청북도 괴산군) 의

도적 두목 청길과 신훤 등이 궁예에게 성을 바치고 투항(항복) 했습니다


(슬슬 신라 북부만이 아닌 신라 중부와

전국적으로 세력을 확장해가는 궁예 그룹입니다,, )


5년, 궁예가 왕을 자칭(스스로 칭함) 했습니다


<궁예>짐은 그 옛날의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로

국호를 고려로 하겠도다 !!


<옛 북방의 고구려 유민들>궁예가 옳다 !

천하대국 天下大國 고구려를 다시 세우자 !!


(오늘날 '후고구려' 로 알려진 궁예의 고려 건국인데

실제 후고구려라는 명칭은 궁예가 있던 당시에는 쓰이지 않았고

이후 시작되는 왕건의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 쓰이는 명칭입니다

그렇게 한국 韓國 의 천하 天下 는 옛날 고구려, 백제 , 신라가

솥발처럼 맞섰던 삼국시대같이 세개의 나라로 나뉘었고

이에 오늘날 경상도 지역으로 쪼그라든 신라와 북방의 후고구려 ,

서방의 후백제 세 나라로 본격적인 후삼국 시대가 시작됬다고 할 수 있습니다)


8월 가을

후백제왕 견훤이

대야성 大耶城 (오늘날 경상남도 합천군) 을 공격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고

금성 錦城 (오늘날 전라남도 나주시) 남쪽으로 군사를 옮기면서

부근의 부락(마을) 을 약탈하고 돌아갔습니다


(대야성은 천혜의 요새이자

백제 지역에서 신라 수도로 들어갈 때의 관문이었기에

이전 삼국시대부터

백제와 신라의 격전지였는데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이 대야성을 공격했다는 것은

옛 백제를 계승해 신라를 공격하겠다는 의미를 보여줬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미 맛탱이가 간,, 신라였지만

그래도 난공불락의 요새 이미지의 대야성답게

아직까지는 견훤에게 방어에 성공한 모습입니다)


효공왕 6년

3월 봄

서리가 내렸습니다


대아찬(신라 5등벼슬) 효종을 시중(오늘날 국무총리) 으로 임명했습니다


효공왕 7년

궁예가 도읍을 옮기기 위하여

철원과 부양에 와서 산수를 둘러 보았습니다


효공왕 8년

궁예가 백관 百官 (모든 벼슬아치, 관리) 을 두어서

신라의 제도를 따랐습니다


<김부식>제정한 관직 칭호는 비록 신라 제도를 모방하였으나

신라의 제도와 다른 것도 많이 있었다


국호를 마진 摩震

연호를 무태 원년이라 했습니다

패서도 浿西道 (패서지역, 패강=대동강이니

대동강쪽의 신라 서북방 변경) 의 10여 주현이 궁예에게 투항(항복) 했습니다


효공왕 9년

2월 봄

별이 비 오듯 떨어졌습니다


4월 여름

서리가 내렸습니다


7월 가을

궁예가 철원 鐵圓 (오늘날 강원도 철원군 풍천면)으로 도읍을 옮겼습니다


8월

궁예가 군사를 동원해서

우리(신라) 의 변방 고을을 침략하면서

죽령 竹嶺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과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에 사이에 있는 고개.) 동북 지역까지 이르렀습니다


(궁예가 죽령지역까지 진출했다는 것은

곧 신라 수도 서라벌이 위협받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효공왕이 국토가 나날이 줄어든다는 말을 듣고 매우 근심하였으나

방어할 능력이 없으므로

모든 성주 城主 (성의 주인, 지방 세력) 들에게 명령해서

함부로 나가서 싸우지 말고

성벽을 굳게 수비하도록 했습니다


(기록 자체에서 당대 신라 조정도

어찌할 답이 없는 무력감이 느껴집니다,,)


<라봉봉>신라가 상당히 빠른 속도로 무너져가고 있습니다,,

풍선에 바람빠지듯이 영토가 빠르게 쪼그라들고 있고,,

계속해서 궁예나 견훤 세력에 급속도로 지방민들이 붙어간 것을 보면

지방에서도 여러 차별, 골품제 등으로 인해

이미 신라 조정에 대한 원망, 불만이 상당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당대 신라 조정도 '방어할 능력이 없었다' 는 말처럼

바람앞의 등불이 되버린 오랜 사직의 신라로

더럽고 추악했던 신라 말기의 왕위 쟁탈전, 골품제로 인한 폐혜등이 있었으나

막상 영광스럽고 긴 역사를 가졌던 신라가

힘없이 무너지는 모습에 안타까움도 공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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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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