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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란함에 빠진 진성여왕>


신라 51대왕 진성여왕 김만 (신라의 세번째 여왕이자 한국사 마지막 여왕)

재위기간 10년 887~897년


진성여왕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김만이며

헌강왕(신라 49대왕 헌강왕 김정) 의 누이동생(여동생) 입니다


<김부식>최치원 문집 제2권 사추증표에는


'신하 탄(김탄, 진성여왕의 다른 이름) 은 말합니다

삼가 하명(=어명, 임금의 명령) 을 받들어

저의 죽은 아비 응(신라 48대왕 김응렴) 을 태사로 추증하고

죽은 형인 정(신라 49대왕 김정) 을 태부로 추증하였습니다 '


라고 되어 있으며

또한 납정절표에는


'저의 맏형(형=손윗사람 , 첫째오빠) 인

국왕 정(신라 49대왕 헌강왕 김정) 이

지난 광계 3년 7월 5일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으나

저의 조카 요(헌강왕이 낳은 아들 , 훗날 신라 52대왕 효공왕 김요) 는

태어난지 아직 1년이(한살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저의 둘째 형(둘째 오빠) 인

황(신라 50대왕 정강왕 김황) 이 임시로 나라를 다스리다가

또한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라고 하였으니

이를 보면 경문왕(신라 48대왕 경문왕 김응렴) 의 이름이 응인데

본기에는 응렴이라 하였고

진성왕의 이름이 탄인데

본기에는 만이라 하였으며

또한 정강왕 황은 광계 3년에 죽었는데

본기에는 2년에 죽은 것으로 되어 있으니

모두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요약해보면,,

' 이름이랑 기록이 다르넹,, 나도 몰겠다 ㅎ ')


(진성여왕 1년)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고

모든 주와 군의 1년간의 조세를 면제했습니다


(선덕여왕도 재위 2년차에

죄수를 크게 사면하고

모든 주와 군의 1년 납세를 면제했다는 기록이 있고

이는 선덕여왕의 전례를 따라 한 것으로 보이며

선덕여왕을 닮겠다는 진성여왕의 의지를 나타내는 정책이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덕여왕대에도 조세 1년 면제는

선덕여왕의 선대에 쌓아진 국부를 바탕으로 이루어 진 것이었고

사실 전국 세금 1년면제라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인데

선덕여왕대처럼 그나마 선대에 국력이 쌓였던 것도 아니고

신라 후기에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백성들이 도적화 되는 마당에 1년 면제는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어려운 시기니까 세금을 면제해준다는 것이

옳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그런 말이 아니라

선덕여왕대처럼 나라에 돈이 많으면서

세금 1년면제를 하면 그나마 넘어갈 수 있더라도

진성여왕대처럼 나라에 돈도 없으면서

세금 1년면제라는 정책을 했다는 것은

위태위태해 보이는 기록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황룡사에 백고좌 백고좌 百高座 (사좌좌 [부처님을 모시는 자리] 백 개를 만들어서

고승들을 모셔다 설법하는 큰 법회)

를 열고 진성여왕이 직접 가서 설법을 들었습니다


(이전대 왕부터 백고좌 기록이 자주보이는데 다시금 불교를 중시하며

옛날 영광의 시대를 열고 싶었던 신라 후기 왕실의 바람으로 보입니다)


겨울에 눈이 내리지 않았습니다


진성여왕 2년

2월 봄

소양리 少梁里 에서 돌이 저절로 움직였습니다


진성여왕이 원래부터

(진성여왕의 삼촌이었던) 각간(=이벌찬, 신라 1등벼슬) 김위홍과

간통(배우자가 있는 남녀가 배우자 이외의 남녀와 성관계를 갖는 행위)

하고 있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서는 언제나 궁중에 들어 와서 일을 보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위홍)에게 명령해서

대구 화상 大矩和尙 (대구는 이름이고 화상은 수행을 많이한

고승에 대한 존칭 ) 과 함께

향가 (鄕歌 향찰 [신라 때에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국어 문장 전체를 적은 표기법]로 기록되서 전하는

신라의 노래)

를 수집하게 했는데

이를 삼대목 三代目 이라고 불렀습니다


(진성여왕의 불륜상대이자 삼촌이었던) 위홍이 죽자

혜성대왕 惠成大王 이라는 시호를 추증했습니다


(여왕과 간통에 대왕칭호까지 획득한 김위홍,,)


이후로 진성여왕은 젊은 미남자(기록에서는 미장부 美丈夫 로 나오고

잘생긴 남자를 뜻합니다) 두 세 명을

남몰래 불러들여 음란하게 지내고

그들에게 요직(중요한 직책이나 직위) 을 주어서 나라 정사를 맡겼습니다


(근친상간부터 기록들이 정말 제정신이 아닌 기록들로 보여지고

진성여왕 다다음대부터 김씨가 아닌 박씨들이 다시 신라 국왕이 되는 점을 보면

진성여왕이 여자라는 점과 진성여왕대부터 혼란의 시작이라는 점 등에

박씨 왕조나 후대에 의헤 더 폄훼됬을 가능성도 있기는 있으나

인간에게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운 권력이 주어졌을때

나타났던 광기 등 역시 배제할 수 없기에

정말 왕이 되고나서 불안감 등에 남자를 가까히 하며

안정을 찾으려 했다거나 그러면서 음탕함에 빠졌을지도

또 모르는 일입니다,,


실제로 남자 왕들 역시

정책적 자문을 신하들 뿐만 아니라 부인과 잠자리를 가지며

부인에게 조언을 얻기도 했다하고

이는 아무래도 같이 가까히서 마주치며 있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는 것으로 정책적 판단을 하는 일들이 충분히 일어날 수 있었고

이에 외척들이 발호한다거나 내시들이 왕실을 조종한다거나 하는 일들이

충분히 벌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고려 말기 명군이었던 공민왕 역시

사랑하는 부인 노국대장공주가 사망하고

절망감속에서 엽기적이고 음란한 행실을 보이며

폐인이 되었던 것을 보면

이 혈기 넘치는 20대 초반에 왕위에 오른 진성여왕 김만 역시

어려운 현실속에서 번영한 옛 여왕의 시대의 재현에 대한 기대감 등으로

왕위에 올라 그에 대한 부담감, 두려움등으로

남자들을 가까히 하며 음란과 방탕에 빠졌을 지 또 모릅니다)


이에 따라 아첨하고 (진성여왕의) 총애를 받는 자들이 방자해지고

뇌물을 주는 일이 공공연하게 행해졌으며

상벌이 공평하지 못하고 기강이 문란해졌습니다


이 때 누군가가 이름을 감추고

시정 時政 (그 당시의 정치나 행정에 관한 일) 을 비방하는 말을 만들어서

관청 거리에 방 榜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써 붙이는 글) 을 붙였습니다


<당시를 생각해보며 창작해본

관청거리에 붙은 방>여왕은 행실이 문란하고 음탕하며

관리들은 아첨하고 뇌물받고 방자해지는데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은 것인데

암탉이 우니 집안이 망하는게 아니겠는가 !!!


<관청거리에 붙은 방을 보고 화난 진성여왕>당장 방을 붙인 자를 잡아오라 !!!!!


진성여왕이 그를 수색케 하였으나 잡을 수 없었습니다


누가 왕에게 말하기를


<어떤 사람>이것은 필시 문인 文人 (교양인 , 지식인) 으로서

뜻을 펴지 못한 자의 소행이니

아마도 대야주 大耶州 (오늘날 경상남도 합천군) 에

숨어 사는 거인 巨仁 ( =왕거인 王巨仁 신라 말기의 문인) 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문제는 왕거인이 했다는 아무런 증거도 없이 그냥 '생각' 이었을 뿐입니다,,

숨어사는데 뜬금없이 지목당한 억울한 왕거인이었고 거의 궁예 관심법수준,, )


라고 했습니다

진성여왕이 명령을 내려 거인을 체포해서

서울(=수도, 서라벌) 감옥에 가두고 처벌하려 했는데

거인이 분하고 원망스러워서 감옥 벽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썼습니다


<왕거인이 감옥 벽에 쓴 글 혹은 원분시(원망스럽고 분한 시) 라 불리는 시>

우공이 통곡하니 3년이나 가물었고

추연이 슬퍼하니 5월에도 서리 왔네

지금 나의 깊은 시름 옛 일과 같건만

하늘은 말없이 푸를 뿐인가


<감옥 지키는 병사 1>에효 저분은 죄가 없어 보이시는데,,


<감옥 지키는 병사 2>나라가 망할라그러는거 같다,,


(왕거인이 시를 쓰고) 그날 저녁에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덮이고

번개가 치며 우박이 내렸습니다


진성여왕이 이를 두려워해서 거인을 석방해서 돌려 보냈습니다


(진성여왕도 일말의 양심은 있었던거 같습니다,,)


그렇게 불쌍한 왕거인은 시대를 잘못 만났음을 알고

꿈을 접은 채 초야(시골)에 묻혀서 평생을 지냈다고 합니다


(똑똑한 사람들은 점점 조정에서 이탈해 가는 신라 말기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3월 초하루(1일) 무술일

일식이 있었습니다


진성여왕이 병들어 편치 못하자

죄수들을 조사해서 사형수 이하의 죄수를 석방하고

스님 60명에게 도첩(승려 자격증) 을 주었습니다

진성여왕의 병이 곧 나았습니다


5월 여름

가뭄이 들었습니다


<후삼국 시대의 신호탄이었던 원종과 애노의 난>


진성여왕 3년

국내 여러 주와 군에서 납세를 하지 않아서 창고가 비고

국가 재정이 어려워지자

진성여왕이 사신을 파견하여 독촉했습니다


(재위 1년때에 모든 주와 군의 1년간 조세를 면제했다는데

2년만에 국가 창고가 비어서 재정이 어려워서 세금을 독촉했다는 기록을 보면

뒷일과 현실을 생각 안하고 그저 선덕여왕이 했던 정책을 따라했던

진성여왕대의 정책으로 보입니다,,)


이로 인하여 도처에서 도적이 봉기했습니다


이 때 원종 , 애노 등이

사벌주 沙伐州 (오늘날 경상북도 상주시) 에

웅거 (일정한 지역을 차지하고 굳게 막아 지킴) 해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원종과 애노>여자가 왕이 되고 곳곳에서

백성들의 울음소리가 하늘에 울려 퍼지는구나 !!!

우리 농민들이 세상한번 바꿔보자 !


진성여왕이 내마 奈麻 (=나마, 신라 11등벼슬) 영기에게 명령해서

그들을 체포하게 했으나

영기가 반도(반란을 꾀하거나 그에 가담한 무리) 의

보루(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튼튼하게 쌓은 구축물) 를 보고 두려워해서

진군하지 못하자

촌주 村主 (마을 촌장) 우연이 최선을 다해서 싸우다가 여기에서 전사했습니다

진성여왕이 칙명을 내려서 영기를 참수하고

나이가 10여 세인 우연의 아들로 하여금 아버지의 뒤를 이어 촌주가 되게 했습니다


(이 이후 원종과 애노의 난은 어떻게 종결됬는지 기록에 나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농민반란이었던 이사건은 후삼국 시대의 시작을 알린 신호탄이었고

원종과 애노의 세력들은 신라 중앙군에 토벌됬거나

후삼국시대 군벌들에게 흡수 됬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진성여왕 4년

정월(1월) 봄

햇무리(햇빛이 대기 속의 수증기에 비치어

해의 둘레에 둥글게 나타나는 빛깔이 있는 테두리)

가 다섯 겹으로 나타났습니다


15일

진성여왕이 황룡사에 행차해서

연등 행사를 구경했습니다


(원종과 애노의 난 사건 이후

불교 행사 구경을 할 정도로

다시 약간에 여유가 생겼나 봅니다,,)


<라봉봉>사실 신라가 혼란의 시기로 간 시기는

단순히 진성여왕대부터가 아니라

그 이전부터 계속 된 혼란이 차곡차곡 모여

혹은 차근차근 기울어져서

드디어 진성여왕대에 터진 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선덕여왕 ,진덕여왕의 선례를 본받아

다시 부흥을 노렸던 신라 왕실이었지만

선덕, 진덕여왕 역시 여자 왕이라는

리스크가 있었던 인물이었고

이는 당대 신라인들에게 정치적 모험이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당장 선덕여왕 당대에도

상대등(신라 귀족 수장직) 비담이

여주(=여자 주인, 여왕 = 선덕여왕) 가

정치를 잘못한다는 구실로 반역을 했고

여자가 왕이 됬다는것 자체에도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이 나온다거나 하는

부정적인 인식이 있던 옛날인데

그럼에도 새로운 변화를 위해 다시금 여자 왕을 세우는 모험을 했던

신라였다고 할 수 있고

그러나 선덕여왕, 진덕여왕대에는

그 모험을 감당할만한 여력은 됬던

당대의 신라인이었고

진성여왕대 신라는 그럴 여력이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진성여왕은 겸손하거나

올바른 자세로서 국정을 운영하기는 커녕

음란함에 빠져 국사를 돌보지 아니했고

결국 후삼국 시대라는 난세, 지옥의 문을 열었다고 할 수 있으니

후세에 상당한 비판이 있는 인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실제 남성왕이어도 여색에 빠져 국정을 놓은 경우들이 있는데

그 반대 버전이 진성여왕이었던거 같고

남녀는 차이점이 있더라도 모두가 '사람' 이라는 공통점이 있기에

남자는 어떻고 여자는 어떻고 하는게 사실상 의미는 없어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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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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