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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53대왕 신덕왕 박경휘

재위기간 5년 912~917년


신덕왕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의 성은 박씨이며 (마지막 박씨왕 아달라 이사금 박아달라

사후 728년만에 등장한 박씨왕입니다)

이름은 경휘이고

아달라왕 (신라 8대왕 아달라 이사금 박아달라) 의 먼 후손입니다


(모처럼만에 등장한 박씨 임금이었고

728년만에 등장인데

이는 조선, 고려 왕조 존속기간보다 긴 기간이라

당대 망해가던 신라의 마지막 발악 격으로

어떠한 새로운 변화를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박씨를 왕위에 옹립해본거 같고

뜬금없는 박씨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라 사회는 오랫동안 사실상 김씨왕조나 다름없었는데

이는 신라 후기 왕위쟁탈전을 겪으며 또 후삼국시대 시작으로

김씨들의 권위가 크게 흔들렸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고

오랫동안 신라 사화에서 조용히 지내왔던 박씨가 왕위에

앉아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자거나,,

옛날 혁거세 거서간 박혁거세 시대같은 평화기를

재현해 보려는 신라인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아버지는 예겸 乂兼


<김부식>예겸 銳謙 이라는 주장도 있다


입니다


그(신덕왕 박경휘) 는

정강대왕(신라 50대왕 정강왕 김황) 을 섬겨서

대아찬(신라 5등벼슬) 이 되었었습니다


어머니는 정화부인입니다


왕비는 김씨이니

헌강대왕(신라 49대왕 헌강왕 김정) 의 딸입니다

효공왕(신라 52대왕 효공왕 김요) 이 붕어(사망) 했으나

아들이 없었으므로

백성들이 그(박경휘)를 추대하여 왕위에 오르게 했습니다


(물론 신라 백성들도 대부분 신라를 이탈해서

궁예나 견훤세력에게 붙었지만

그나마 남은 신라 백성들도 이미 김씨들에게 답이 없었음을

직감하고 한번 박씨에게 맡겨보게 된거 같습니다)


신덕왕 원년(1년)

5월

선친(자신의 돌아가신 아버지) 을 선성대왕으로 추존하고

어머니를 정화 태후 ,

왕비를 의성왕후라 하고

아들 승영(이후 신라 54대왕 경명왕 김승영) 을 왕태자로 삼았습니다


이찬(신라 2등벼슬) 계강을 상대등(신라 귀족 수장직)으로 임명했습니다


신덕왕 2년

4월 여름

서리가 내렸습니다


지진이 있었습니다


신덕왕 3년

3월 봄

서리가 내렸습니다


궁예가 연호 수덕만세 水德萬歲 를

정개 政開 로 고쳤습니다

이 해가 정개 원년입니다


신덕왕 4년

6월 여름

참포 槧浦 (오늘날 경상북도 포항시 곡강천으로 추정) 의 물과

동해 東海 의 물이 맞부딪쳐서

물결 높이가 20장 (1장=10척, 1척 24.5cm  , 4.9m ) 가량 솟았다가

3일이 지나서야 멈추었습니다


신덕왕 5년

8월 가을

견훤이 대야성을 공격했으니 승리하지 못했습니다


(나라가 망해가는 와중에도 아직은 방어에 성공했던

천혜의 요새 대야성으로 이곳이 뚫리면

곧 수도 서라벌이 위험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그래도 신라도 아직은

견훤에 맞설 정도의 군사력이 어느정도는

남아있었음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10월 겨울

지진이 있었는데 우레(천둥) 같은 소리가 났습니다


신덕왕 6년

정월(1월) 봄

금성이 달을 범했습니다


7월 가을

신덕왕이 붕어(사망) 했습니다


시호를 신덕 神德 (신 신 , 덕 덕) 이라 하고

죽성 竹城 에 장사지냈습니다


<라봉봉>초기를 제외하고 신라는

사실상 김씨왕조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상황에서 박씨왕이 나왔다는 것은

이미 김씨왕조, 세력들에 민심이 이탈하고

김씨 왕조가 붕괴해갔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박씨나 김씨들은 오랜 근친혼으로 서로 섞여

사실상 같은 핏줄이었다고도 하고

음,, 신라가 망한 이유가

지배층들이 권력유지를 위해 잦은

근친혼으로 점점 정신병이 걸린다거나

몸이 쇠약해져 올바른 국정운영에서 멀어지기도 한 것도

숨은 원인이 아닐까 싶습니다


가히 요즘말로 '고인물' 화 된 신라라 할 수 있으며

'고인 물은 썪는다' 라는 속담이 있듯이

썩어가는 신라였고

그런 상황에서 신라인들도 고인 물에서 탈피하기 위해

박씨를 왕위에 앉히는 몸부림을 치게 된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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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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