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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명왕대에 건국된 고려 (궁예의 죽음) ,

점점 왕건에게 기우는 신라의 민심>


신라 54대왕 경명왕 박승영

재위기간 7년 917~924년


경명왕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의 이름은 승영이며

신덕왕(신라 53대왕 신덕왕 박경휘) 의 태자입니다

(역시 박씨왕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의성왕후입니다


경명왕 원년(1년)

8월

경명왕의 아우 이찬(신라 2등벼슬) 위응을

상대등(신라 귀족 수장직) 으로 임명하고

대아찬(신라 5등벼슬) 유렴을 시중(오늘날 국무총리) 으로 임명했습니다


경명왕 2년

2월 봄

일길찬(신라 7등벼슬) 현승이 모반하다가 처형됬습니다


6월 여름

궁예의 부하들의 인심이 갑자기 변해서

태조(고려 태조 왕건)를 추대하자

궁예가 도주하다가 부하에게 피살되었습니다


<왕건의 부하들>왕건 장군 만세 !


태조(왕건) 가 즉위해서 연호를 새로 정하고

이 해를 원년으로 했습니다


<고려 1대왕 태조 왕건>우리는 천하대국 天下大國 이자

대륙을 호령했던 고구려의 후예,,

옛날 고구려를 계승하는 의미로

나라 이름을 고려 高麗 라고 하겠다 !


<고려 백성들>아아 ! 고려 만세 !


,,


<신라 백성들>고려의 왕건이 그렇게 인품이 훌륭하다는데,,

우리도 고려로 갈까 ?? ,,


7월 가을

상주 尙州 (오늘날 경상북도 상주시) 의 도적 두목

아자개(성은 이씨이며 견훤의 아버지입니다) 가

사신을 보내 태조에게 항복했습니다


<고려 태조 왕건>아아 !

견훤의 아버지가 내게 왔다는 것은

분명 고려에게 좋은 징조이다,,


짐은 아자개를 짐의 아버지처럼 모시겠노라 !


경명왕 3년

사천왕사 四天王寺 (문무왕때 나당전쟁

당시에 부처님의 힘으로 당을 물리치려 서라벌에 세워진 사찰)


소상 塑像 (조각상) 이 잡고 있던

활줄이 저절로 끊어지고

벽화에 그려진 개에서 소리가 들렸는데

마치 그 개가 짖는 것 같았습니다


(신라의 멸망을 암시하는 불길한 징조라 해석해 볼 수 있습니다)


상대등 김성을 각찬 角湌 (=이벌찬 , 신라 1등벼슬)

시중 언옹을 사찬 沙湌 (신라 8등벼슬) 으로 삼았습니다


<김부식>우리 태조(왕건)가 송악군 松岳郡 (고려 왕조 500년 수도

개경으로 오늘날 경기도 개성시) 으로 도읍을 옮겼다


(굳이 태조가 송악으로 도읍을 옮겼다도 아니고

'우리 태조 [我太祖 아태조] ' 라고 나온 이유는

김부식님이 고려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고려의 권신이자 학자이자 신하였던 김부식이었기에

또 왕정국가인 당시에 고려에서는

태조 왕건은 시조이자 성인급의 인물로

여겨졌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날에도 후삼국 난세를 평정하고 고려를 건국한

한국사 위인 고려 태조 왕건입니다)


경명왕 4년

정월(1월) 봄

경명왕이 태조(왕건) 와 사신을 교환하고

수호 관계를 맺었습니다


<경명왕>음,, 고려의 왕건은 비록 우리나라에서 나온 자이지만

상당히 예의가 바르고 비범한 인물임이 느껴지는구나,,


<신라 신하들>그렇사옵니다

그의 백성들은 그를 마음으로 존경하며 따르고 있다고 하고

후백제의 잔학한 견훤과는 상당히 비교되는 인물이옵니다


<경명왕>음,, (참으로 세상을 구할 위인이구나,,

그렇지만 결국 신라가 아닌 고려의 인물,,

우리 신라가 안전해야 할 것인데,,)


2월

강주 康州 (오늘날 경상남도 진주시) 장군 윤웅이

태조(왕건) 에게 항복했습니다


10월 겨울

후백제 군주 견훤이 보병과 기병 1만을 거느리고

대야성 大耶城 (오늘날 경상남도 합천군에 있던

신라의 성) 을 공격해서 점령한 후

진례 進禮 (오늘날 충청남도 금산군) 로 진군했습니다


(결국 천혜의 요충지이자 삼국시대에도

백제와 신라의 격전지이자

서라벌로 통하는 관문이었던

대야성은 견훤의 3번째 공격만에

함락되었다고 할 수 있고

이는 곧 후백제가 언제든지 마음놓고

서라벌을 공격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라 신하들>폐하 ! 대야성이 결국

견훤에게 함락되었사옵니다 !!!!!


<경명왕>어떻하노 ,, 어떻하노 ,,


<신라 신하들>오직 왕건밖에 없사옵니다,,

그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하옵니다 !!


경명왕이 아찬(신라 6등벼슬) 김율을

태조(왕건) 에게 보내 구원을 요청했습니다

태조(왕건)가 장수에게 명해서

군사를 출동시켜 구원하게 하니

견훤이 이 말을 듣고 물러갔습니다


<고려군사들>백제야 물렀거라 ~

대고려국 만세 !


<신라인들>후백제군은 승냥이나 호랑이 같으나

늠름한 고려군은 마치 부모님같이 우리를 지켜주는구나,,


경명왕 5년

정월(1월) 봄

김율이 경명왕에게


<김율>제가 지난해 고려에 사신으로 갔을 때

고려왕(태조 왕건) 이 저에게 묻기를


'신라에는 세 가지 보물이 있으니

소위 장륙 불상(장륙존상, 황룡사에 있던

초대형 불상) 과 9층탑(황룡사 9층목탑) 과

성대 聖帶 (성스러운 허리띠, 천사옥대라고도 불리며

옥황상제가 선녀를 보내 진평왕에게 준 허리띠)

가 그것이라고 들었다

불상과 탑은 지금도 있는 줄 알거니와

성대가 지금도 있는지는 모르겠구나'


라고 하므로

제가 대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경명왕이 이 말을 듣고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습니다


<경명왕>성대란 어떠한 보물인가 ?


그러나 이를 아는 자가 없었습니다


이 때 황룡사에 스님이 있었는데

나이 90세가 넘었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황룡사 스님>그 보배로운 허리띠는

진평대왕이 사용하던 것인데

여러 대를 전해 내려 오면서

남쪽 창고에 보관되어 있다고

일찍이 들은 적이 있습니다


경명왕이 즉시 창고를 열어 찾게 하였으나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날을 정해서 치성(정성있게 기도) 을 드리고

제사를 지낸 뒤에야 그것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띠는 금과 옥으로 장식되었고

매우 길어서 보통 사람은 맬 수가 없었습니다


<김부식>옛날 명당 明堂 (임금이 조회를 받던 정전 , 좋은 자리) 에 앉아서

나라를 이어받는 옥새를 쥐고

아홉개의 솥을 진열하여 놓는 것 ,

그것이 마치 제왕들의 대단한 일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한퇴지가 평론하기를


'하늘과 백성들의 마음을 모으고

태평성세의 기초를 일으키는 것은

결코 세 가지 기물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라고 하였으니

세 가지 기물을 소중하다고 한 것은

과장된 자의 말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신라의 소위 세 가지 보물은 또한

사람이 만든 사치한 물건일 뿐이니

나라를 통치함에 있어서 이들이 어찌 꼭 필요한 것이겠는가 ?


'맹자' 에는


'제후의 보배가 세 가지이니

곧 토지 , 백성 , 정치 '


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초서' 에는


'초 나라에는 보물이라고 여길만한 것이 없고

오직 선 善 (착함) 을 보배로 삼는다'


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선은

국내에서 실천하면

족히 한 나라를 선하게 할 것이며

국외로 실천하면

족히 천하에 은혜를 입힐 수 있는 것이니

이밖에 또 무엇을 보배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


태조는 신라 사람들의 전설을 듣고 물었을 뿐이며

그것을 숭상할만한 것으로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유교적 사관으로 삼국사기를 기록했던 김부식님다운 평입니다)


2월

말갈의 일부인 달고의 무리가 북쪽 변경을 침략했습니다

이 때 태조(왕건) 의 장수 견권이

삭주 朔州 (오늘날 강원도 춘천시) 를 지키고 있다가

기병을 이끌고 그들을 공격하여 대파하니

한 필의 말도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경덕왕이 기뻐해서

태조(왕건) 에게 사신을 통해 편지를 보내어 사례했습니다


(고려 태조 왕건은 한국사 위인답게

덕있고 영리한 인물이었으며

신라에게는 비록 자주국가 고려의 국왕이었으나

왕건 역시 신라 출신이기도 했고 신라의 길고 긴 사직에 대한

민심 역시 외면하지 않고

신라에 정성을 다한 외교정책을 펼쳤고

또 후백제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를 깍듯이 모시는 등

이에 신라 왕실과 민심은 더더욱 왕건에게

이끌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전통, 역사에 대한 왕건의 존경과 존중심이라 할 수 있으며

견훤과 대비되기도 합니다)


4월 여름

서울(=수도, 서라벌) 에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습니다


8월 가을

메뚜기 떼가 생기고 가뭄이 들었습니다


경명왕 6년

정월(1월) 봄

하지성 下枝城 장군 원봉과

명주 溟州 (오늘날 강원도 강릉시) 장군 순식이 태조(왕건) 에게 항복했습니다

태조(왕건) 가 그들의 귀순을 기념해서

원봉의 본 성(성씨)을 순주라 했으며

순식에게 왕씨 성을 내려 주었습니다


이 달에 진보성 眞寶城 (오늘날 경상북도 청송군)

장군 홍술이 태조(왕건) 에게 항복했습니다


경명왕 7년

7월 가을

경명왕이 지성 旨城 장군 성달과

경산부 京山府 (오늘날 경상북도 성주군) 장군 양문

등에게 명령해서 태조에게 항복하게 했습니다


(인질로 보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미 대세가 기울어감을 알았던 경명왕과 신라인들로 보입니다)


경명왕이 창부 倉部 (오늘날 기획재정부 [재정경제부]) 시랑(차관급 벼슬) 김낙과

녹사 錄事 (절 담당관청 ??) 참군 叅軍 김유경을

후당 後唐 (당나라 멸망 후 중국 분열시기였던 5대 10국시대의 나라) 에

입조(외국 사신이 조정의 회의에 참여하던 일) 시키고

토산물을 바쳤습니다

장종 莊宗 (후당 시조 장종) 이 정도에 따라 선물을 주었습니다


(나름 경명왕도 다시 중국과 교류하며 정상적인 국가의 모습을

구현하려 한거 같으나 당대 중국도 혼란기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경명왕 8년

정월(1월) 봄

후당에 사신을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천주 泉州 (오늘날 경상남도 의령군) 절도사 節度使 (지방 장관) 왕봉규가

역시 후당에 사람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습니다

(왕봉규는 오늘날 경상남도 의령군 지방 호족이었고

군소[작은 규모의] 지방 호족이면서도

그냥 신라 정부와 따로 외국과 교류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미 무너진 신라여서 그냥 지방 호족들도

저마다 왕노릇을 하던 시대,, ] )


6월 여름

경명왕이 조산대부 朝散大夫 (문관벼슬 ??)

창부 倉部 (오늘날 기획재정부 [재정경제부]) 시랑(차관급 벼슬) 김악을

후당에 보내서 조공하니

(후당) 장종이 그에게 조의대부시위위경의 관직을 주었습니다


8월 가을

경명왕이 붕어(사망) 했습니다

시호를 경명 景明 (별 혹은 해 경 , 밝을 명) 이라 하고

황복사 黃福寺 (오늘날 경상북도 경주시 낭산 동북쪽 기슭에 있었다고 합니다)

북쪽에 장사지냈습니다


태조(왕건) 가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제사에 참여케 했습니다


<라봉봉>'민심을 얻는자가 천하를 얻는다' 는 말이 있듯이

점점 어질고 덕있는 고려 태조 왕건에게

백성들의 마음이 모여가기 시작함을 보여주는 기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조금 다르게 본다면

항상 건국 이래로 옛날부터 약소국으로 시작해서

백제, 고구려, 당나라 같이 강대국들에게 빌붙으며

조용히 힘을 기르다 백제, 고구려, 당나라를 물리쳤던

영리하다면 영리하고 한편으로는 영악했던 신라인들은

삼국을 통일하고 한국의 천하를 얻었지만

결국 또다시 분열하며 후삼국 시대가 시작되었고

쪼글아들었던 영토, 다시 약소국화 된 신라는

다시금 옛 조상들이 그랬듯이

왕건에게 적극적인 구애를 하며 붙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 패턴들이 반복되면

' 양치기 소년 동화 ' 같이

수가 보이는 것이라 할 수 있고

' 빌붙다가 힘키우고 뒤통수치기 ' 라는

신라의 패턴은 이미 전통과 역사를 중시한 태조 왕건 역시

' 궁예에게 빌붙다가 뒤통수 치기 ' 를 사용했기에

이미 영리한 태조 왕건에게 간파되었을 것이며

왕건 역시 신라를 정성껏 모시되

그냥 신라에 대한 호의적 도움이 아니라

신라를 도와줌으로서 신라인들의 민심들을 흡수해가며

옛날 신라 태종 무열왕과 문무왕, 김유신 장군이 그랫듰이

삼국을 통일할 준비를 갖춰가고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건국이래로 수많은 외세, 강국들의 위협에서

여러 전략과 동맹, 지혜롭고 냉정하게 대처하며 살아남았던

천년나라 신라였고 이번에도 고려와 동맹한 신라였지만

아마 신라인들도 당대에 이미 기울대로 기울어진 나라에

어질고 현명한 왕건이라는 지도자의 등장 등

이번에는 진짜 멸망을 직감하고 있었던게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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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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