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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왕조 千年王朝 신라 마지막왕이자 56대왕 경순왕 김부

재위기간 8년 927~935년


경순왕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의 이름은 부이고

문성대왕(신라 46대왕 문성왕 김경응) 의 후손이며

이찬(신라 2등벼슬) 효종의 아들입니다


어머니는 계아 태후입니다


부(경순왕 김부)는 견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추대라기 보다 경애왕을 죽인 견훤은

경애왕의 아우뻘 되는 사람인 김부에게 임시로 국사를 맡게했다 하고

어찌저찌 왕이 된 경순왕 김부입니다)


경순왕은 (견훤에게 죽은) 전 왕(경애왕)의 시체를

서쪽 대청(대청=마루, 혹은 서쪽 집)에 모시고

여러 신하들과 함께 통곡했습니다


<경순왕>천년왕조가 이대로 끝나버린단 말인가 !

ㅠㅠㅠㅠㅠ

(나도 언제 견훤이에게 죽을지 모르는데

그냥 왕건이한테 항복할까,,,,, )


<신라 신하들>ㅠㅠㅠㅠㅠ

(나도 언제 견훤이에게 죽을지 모르는데

그냥 왕건이한테 항복할까,,,,, )


시호를 올려 (전 왕의 시호를) 경애라 하고

남산 南山 (오늘날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산)

해목령 蟹目嶺 (오늘날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에 있는 고개) 에

장사지냈습니다

태조(고려 태조 왕건)가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제사에 참여케 했습니다


경순왕 원년(1년)

11월

경순왕의 아버지를 신흥대왕 ,

어머니를 왕태후로 추존했습니다.


12월

견훤이 대목군 大木郡 (오늘날 경상북도 칠곡군) 에 침입해서

논밭에 있던 노적가리(한데에 수북이 쌓아 둔 곡식 더미) 를

모두 불태웠습니다


<신라인들>견훤이 때문에 도저히 살 수가 없구나 !!


경순왕 2년

정월(1월) 봄

고려 장수 김상이

초팔성 草八城 (오늘날 경상남도 합천군 초계면) 의 도적

흥종과 싸우다가 승리하지 못하고 전사했습니다


5월 여름

강주 康州 (오늘날 경상남도 진주시) 장군 유문이

견훤에게 항복했습니다


6월

지진이 있었습니다


8월 가을

견훤이 장군 관흔을 시켜서

양산 陽山 (오늘날 충청북도 영동군 양산면) 에 성을 쌓게 하자

태조가 명지성 命旨城 (오늘날 경기도 포천시) 의 장군

왕충에게 명해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쫓아내게 했습니다


견훤이 대야성 大耶城 (오늘날 경상남도 합천군) 아래에 주둔하면서

군사들을 보내서 대목군 大木郡 (오늘날 경상북도 칠곡군) 의

벼를 베어 갔습니다 (또다시 견훤의 대목군 침입,,)


<신라인들> ㅠㅠ


10월 겨울

견훤이 무곡성 武谷城 을 공격하여 점령했습니다


경순왕 3년

6월 여름

천축국 天竺國 (오늘날 인도) 의

삼장 三藏 (삼장[불경] 에 정통한 고승) 마후라 摩睺羅 가

고려에 왔습니다


7월 가을

견훤이 의성부성 義成府城 을 공격하므로

고려 장수 홍술이 그들과 싸우다가 이기지 못하고 전사했습니다


순주 順州 (오늘날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장군 원봉이

견훤에게 항복했습니다

태조(왕건) 가 이 말을 듣고 노하였으나

원봉의 전공을 생각하여 용서하고

다만 순주를 현으로 고쳤습니다


(기세등등한 후백제군 등에 골치아픈 와중에

부하도 후백제로 이탈했으나

태조왕건은 애써 침착하게 다른 세력들의

이탈을 막기 위해 용서한 것으로 보입니다)


10월 겨울

견훤이 가은현 加恩縣 (오늘날 경상북도 문경시 기은읍) 을

포위했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가은현은 견훤의 고향이었으나

자신의 고향 송악[개경, 오늘날 경기도 개성시] 을

도읍으로 하고 튼튼하게 버틴 왕건과 달리

고향을 떠나 옛 백제지역에서 후백제를 건국했고

결국 고향 함락에도 실패했다 할 수 있습니다)


경순왕 4년

정월(1월) 봄

재암성 載巖城 (오늘날 경상북도 청송군) 장군 선필이

고려에 투항(항복)했습니다

태조(왕건)가 그를 후하게 예우하고

상보 尙父 (아버지와 같이 존경하여 받들어 모시거나

그런 높임을 받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임금이 특별한 대우로 신하에게 내리던 존칭의 하나) 라고 불렀습니다

예전에 태조(왕건)가 신라와 우호관계를 맺으려 할 때

선필이 안내를 해주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 그가 항복해오자

태조가 그의 공로와 연로함을 참작하여 은총을 베풀고 표창했습니다


(왕건은 주변 호족, 세력들을 포섭하기 위해

이처럼 항복해온 호족 세력들을 아버지처럼 모신다거나

호족 세력의 딸과 혼인을 맺는다거나 하는 등 방법을

매우 많이 사용했고 이런 포용, 융화적 모습은

잔인하게 경애왕을 살해한 견훤과 대조되는 모습이라

할 수 있겠지만

둘다 극단적이기는 마찬가지라,,

하여튼 적당적당한게 좋아보입니다,,)


태조(왕건)는

고창군 古昌郡 (오늘날 경상북도 안동시) 병산 甁山 아래에서

견훤과 싸워 크게 이겼습니다


<고려 태조 왕건>이곳에서 짐과 고려군사들은

동쪽을 평안케 했도다 !

고로 이곳의 이름은 앞으로 안동 安東 (편안할 안 , 동쪽 동) 이라 이름 짓겠노라 !!


<고려군사들>와아아아 ! 고려 만세 !!!


(오늘날 경상북도 안동시 지명의 유례)


(후삼국시대의 패자를 결정짓게 된 고창전투로

이로 인해 한때 후백제에 밀려 고심하던 고려 태조 왕건은

후백제에 대한 대승, 고려의 한국 동남부 진출 등

당대 후삼국의 절대적인 주도권을 잡게 됩니다)


이 전투에서 죽이거나 사로잡은 자(후백제군) 가 매우 많았습니다

견훤의 영향하에 있던

영안 永安 (오늘날 경상북도 안동시 부근) ,

하곡 河曲 (오늘날 울산광역시) ,

직명 直明 (오늘날 경상북도 안동시 부근) ,

송생  松生 (오늘날 경상북도 청송군 청송읍 송생리) 등 30여 군현이

차례로 태조(왕건)에게 투항(항복)했습니다


(경상도 일대를 다 먹어가는 왕건이고

결국 이 고창전투 이후 후백제는 위축되고

경상도 일대까지 전부 고려가 차지하게 되며

신라는 서라벌 수도 일대만 겨우 영향력을 미치는

옛날 신라시조 박혁거세, 혁거세 거서간 시대와

비슷한 서라벌 지역만을 다스리는

도시국가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월

태조(왕건)가 사신을 보내와서

승전한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경순왕이 보답으로 사신을 보내고 만날 것을 요청했습니다


9월 가을

동해 주변에 있는 주와 군의 부락(마을)이

모두 태조에게 투항했습니다


경순왕 5년

2월 봄

태조가 기병 50여 명을 거느리고

서울(=수도 , 서라벌) 근방에 와서 경순왕을 만나기를 요청했습니다


경순왕은 백관(높고 낮은 모든 벼슬아치) 들과 함께

교외(도시의 주변 지역) 에서 (태조 왕건을) 영접해서

대궐로 들어 와서 마주 대하며

진정한 예우를 극진히 했습니다


임해전 臨海殿 (신라 경주 안압지 서쪽에 있던 전각) 에서

연회를 베풀어 술이 취하자 경순왕이 말했습니다


<경순왕>내가 하늘의 도움을 얻지 못하여 점점 환란이 닥쳐오고 있다

견훤이 불의의 행동을 자행하여 나의 나라를 망치고 있으니

어떠한 통분이 이와 같을 것인가 ?


경순왕이 말을 마치고 눈물을 흘리자

좌우에서 목이 메어 흐느끼지 않는 자가 없었고

태조도 또한 눈물을 흘리면서 위로했습니다


<경순왕>ㅠㅠ 


<태조 왕건>ㅠㅠ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로부터 태조가 수십 일 체류하다가

돌아가려 하므로

경순왕이 혈성 穴城 (경상북도나 강화도쪽 같은데 왕궁과 가까운

경상북도쪽일거 같습니다) 까지 나가서

송별 (떠나는 사람을 이별하여 보냄) 하고

종제(사촌동생) 유렴을 볼모(인질)로 삼아

태조를 따라가게 했습니다


태조의 군사들의 규율이 엄정하여

조금도 규율을 위반하는 일이 없었으니

서울(=수도, 서라벌)에 사는 남녀(혹은 귀부인들) 가 서로 기뻐하면서


<서라벌 남녀(혹은 귀부인)들>이전에 견훤이 왔을 때는 마치

호랑이나 승냥이 떼를 만난 것 같았는데

오늘 왕공 王公 (왕건) 이 왔을 때는 부모를 만난 것 같구나 !!


라고 말했습니다


(오늘날 우호관계가 형성되고 있는

북한과 미국이지만

옛날에 북한에서 미국을 욕할때

미제 승냥이 , 미국 승냥이 떼라고 욕하기도 했는데

개돼지라는 욕이나 승냥이 떼 같은 짐승이 들어간 표현 모두

삼국사기에서 실제로 한국인들의 조상이 쓰인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가끔 욕중에서도 뭔가 정감가는 ?? 말이 있다면

혹시 또 전통적으로 있었던 말일 수가 있는거 같습니다,,)


8월 가을

태조가 사신을 보내서

경순왕에게 비단과 안장을 갖춘 말을 주고

동시에 여러 관료와 장병들에게도 정도에 따라

포백 布帛 (베종류와 비단종류) 을 주었습니다


<라봉봉>그렇게 점점 한국은

왕건이 주도하는 질서로 움직여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고

영리한 전략가였던 고려 태조 왕건 역시

이전 신라와 동맹을 맺었다가 뒤통수를 제대로 맞았던

백제나 고구려의 실수를 답습하지 않기 위해

신라와 동맹을 하되 신라를 서라벌 일대에만 고립시킴으로서

차츰 후삼국 시대를 통일할 준비를 해나갔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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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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