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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왕의 항복 신라의 멸망 , 라봉봉 한국역사 삼국 왕조편 끝>


경순왕 6년

정월(1월) 봄

지진이 있었습니다


4월 여름

사신으로 집사시랑 執事侍郞 (집사부 수장직인 시중이

오늘날 국무총리였고 시랑은 차관급 벼슬이니

행정부 차관급 ??) 김불 ,

부사(부사신, 사신 보좌) 로

사빈경 司賓卿 (사신 접대업무부인 영객부 혹은 사빈부의 차관직)

이유를 후당(중국)에 보내 조공했습니다


경순왕 7년

후당 명종이 고려에 사신을 보내 책명(책봉 명령) 을 주었습니다


경순왕 8년

9월 가을

남극성 老人星 (남극성=노인성)이 나타났습니다


운주 運州 (오늘날 충청남도 홍성군) 경내(지역 안)의

30여 군현이 태조에게 투항(항복) 했습니다


경순왕 9년

10월 겨울

사방의 (신라) 국토가 모두

타인(왕건, 견훤 , 지방호족 등) 의 소유로 되어서

국세가 약하고 고립되었으므로

경순왕은 나라를 스스로 보존 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여러 신하들과 함께 태조(왕건) 에게 항복할 것을 의논했습니다


<경순왕>우리 이제 끝났다 아이가,,

우리도 살려면 어쩔 수 없지만 왕건에게 가야한다 이기야,,


<신라 신하 1>비통하지만 옳으신 말씀이시옵니다

저번같이 언제 견훤이가 또 올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 1. 견훤이에게 죽기 싫다,, 빨리 항복하자)


<신라 신하 2>그래도 천년사직을 함부로 내어줄 수는 없지만서도,,


( 2. 모르겠다 나는 중도)


<신라 신하 3>아니되옵니다 !!! 신라를 도적들에게

내어줄 수는 없사옵니다 !!!!!


( 3. 절대 안된다 항복 반대 !!)


여러 신하들이 의논했으나

옳다는 사람도 있었고

옳지 않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 때 왕자(경순왕의 왕자 마의태자)가


<마의태자>나라의 존속과 멸망은

반드시 하늘의 운명에 달려 있으니

다만

충신 忠臣 (나라와 임금을 위하여 충성을 다 하는 신하)

의사 義士 (의리와 지조를 굳게 지키는 사람) 들과 함께

민심을 수습하여

우리 자신을 공고히 하고

힘이 다한 뒤에 망할지언정

어찌 1천년의 역사를 가진 사직을


(豈宜以一千年社稷 개의이일천년사직)


하루 아침에 경솔히 남에게 주겠습니까 ?


라고 말했습니다


<갑자기 분위기 싸해진

신라조정의 신하들,,>우리 이미 끝난 나라고만

철이 없노,,


이에 경순왕은


<경순왕>고립되고 위태로운 상황이 이와 같아서는

나라를 보전할 수 없다


강하지도 못하고 약하지도 않으면서 (이도저도 아니면서)

무고한 백성들이 참혹하게 죽도록 하는 것은

나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


라고 말하고

곧 시랑(차관급 벼슬) 김봉휴로 하여금

태조(왕건)에게 편지를 보내 항복을 청했습니다


왕자(마의태자)는 통곡하면서

경순왕에게 하직(이별) 인사를 하고

산길을 따라 개골산 皆骨山 (금강산 , 겨울의 금강산을 달리 이르는 말) 으로 들어갔습니다


<마의태자>나는 고려의 물과 곡식을 먹지 않고

풀뿌리를 캐어 먹고죽을지언정 평생을 신라인으로 살다 죽을것이다 !!!!!


그(마의태자)는 바위 아래에 집을 짓고

삼베 옷을 입고 풀잎을 먹으며 일생을 마쳤습니다


(삼베옷을 입고 풀을 캐먹으며 천년왕조 신라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려하며

사망한 인물이기에 우리는 이 경순왕의 왕자를

'마의[삼베옷] 태자 麻衣太子 ' 라고 부릅니다


마의태자는 비록 당시 상황에 맞지 않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발언을 한 인물이지만

그렇다고 틀린 말도 아니어서

절개와 지조의 상징적 인물로 사랑받은 인물이고

특히나 태조 왕건의 고려 다음왕조였던 태조 이성계의 조선왕조에서는

조선의 정당성을 위해

일단 전 정부인 고려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해야했고

이에 신라를 높이게 됬는데

특히 나라를 고려에 바친 경순왕과 반대됬던

마의태자는 조선정부 입장에서는 더욱 옳게 보였다고 할 수 있고

또 성리학, 유교나라였던 조선에서 '사직을 위해 인생을 바쳤다' 는 것은

상당히 옳게 여겨졌기에 ,, 더더욱 마의태자를 높게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대신 이런 정치적인 입장을 빼고 보더라도

오랜기간 , 무려 1000년을 이어갔던 신라왕조였는데

나라가 무너지자 모두가 살길을 찾아 왕건에게 가려 할 때

유일하게 신라의 자존심을 지키려 했던 인물이라 할 수 있기에

그나마 마의태자 한명이 있어서

신라 천년왕조 멸망때가 덜 부끄러웠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치만 또 현실적으로 봐도

이미 망한 나라에서 자존심을 지키는 것 보다

'있을때 잘했어야'  했던 신라 지배층이었습니다,,)


11월

태조(왕건)가 경순왕의 (항복)편지를 받고

대상 大相 (고려 7등 벼슬) 왕철 등을 보내서

경순왕을 영접하게 하였다


경순왕이 백관(모든 벼슬아치)을 거느리고

서울(=수도 , 서라벌) 을 출발해서

태조(왕건)에게 가는데

향나무 수레와 구슬로 장식한 말이 30여리에 이어지니

길이 막히고

구경꾼은 울타리를 두른 것 같았습니다


(아무리 서라벌 일대로 쪼글아든 나라가 된 신라였지만

1천년 사직의 나라였기에 서라벌[금성, 오늘날 경상북도 경주시] 에서

송악[개경, 오늘날 경기도 개성시]으로 가는

항복행렬의 그 규모는 상당했을 것입니다

아쉽고 침울하기도 하고 새로운 시대[고려시대]에 대한 기대감,

여러 생각들이 공존하며

상당한 진풍경이 연출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태조(왕건)가 교외 (도시의 주변 지역) 에 나와서

경순왕을 영접하여 위로하였으며

왕궁 동쪽의 가장 좋은 구역을 주고

(태조 왕건의) 맏딸 낙랑공주를 아내로 삼게 했습니다


(참고로 저 라봉봉은 언양김씨로

삼국사기를 집필한 김부식님의 후손이기도 한데

경순왕 김부와 낙랑공주 왕씨가 제 조상님이십니다 ㅎㅎ

즉 저는 신라 경순왕과 태조 왕건의 후손입니다 ㅎㅎ)


12월

경순왕을 정승공 正承公 으로 봉해서

태자보다 높은 지위에 두었으며

녹봉으로 1천 석을 주고

시종 侍從 (모심, 섬김) 하던 관원과 장수들을 모두 등용했습니다

신라(서라벌)를 개칭해서

경주 慶州 (경사 경자로 오늘날 경상북도 경주시 慶州市 의 유례) 라 하고

이를 공(경순왕) 의 식읍(영지)으로 삼았습니다


처음 신라가 항복하였을 때

태조(왕건)가 매우 기뻐하여 후한 예로 대우했고

사자를 보내 경순왕에게 말하기를


<태조 왕건>이제 왕이 나에게 나라를 주었으니

이는 위대한 선물입니다

원컨대 저의 종실(임금의 친족[혈연])과 혼인하여

영원히 집안 관계를 맺고자 합니다


라고 했습니다


경순왕은


<경순왕>나의 백부 伯父 (큰아버지) 잡간(=잡찬, 신라 3등벼슬) 억렴이

지대야군사 知大耶郡事 로 있는데

그의 딸이 덕행이 훌륭하고 용모가 아름다우니

이 외에는 집안을 받들 만한 자가 없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태조(왕건)가 마침내 그 여자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 사람이 곧 현종(고려 8대왕 현종) 의 아버지로서

후에 안종으로 추봉되었습니다

경종 헌화대왕(고려 5대왕 경종) 때에 이르러

정승공(경순왕)의 딸을 맞아 왕비로 삼고

정승공(경순왕)을 상보령 尙父令 (임금의 아버지같은 신하급, 특별대우) 으로

봉했습니다

공(경순왕)이 송나라 흥국 4년 무인에 죽으니

호를 경순 敬順 (공경할 경, 순할 순)


<김부식>효애 孝哀 (효도 효, 슬플 혹은 가엾을 애) 라고도 한다


이라 했습니다


(경순왕이 고려 항복후 받은 대우는

최고수준의 대우라 할 수 있고 그가받은 관작등은

김유신 장군이 신라에서 받은 대우처럼

아무런 의미가 없을 정도의 매우 높은 대우를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려 태조 왕건에게는 천년사직 신라를 함부로 뺏기도 뭐했는데

나라를 바치니 [비록 그것을 유도했을 지언정,,]

경순왕이 얼마나 이뻐보였겠습니까,,)


<김부식>신라 시조(신라 1대왕 혁거세 거서간 박혁거세) 로부터

이 때에 이르기까지를 3대로 구분하니

초대(신라 1대왕 혁거세 거서간 박혁거세) 부터

진덕왕(신라 28대왕 진덕여왕 김승만)까지

28왕을 상대라 하고


무열왕(신라 29대왕 태종 무열왕 김춘추)으로부터

혜공왕(마지막 태종 무열왕계 왕이라 할 수 있는 신라 36대왕 혜공왕 김건운) 까지

8왕을 중대라 하고


선덕왕(신라 37대왕 선덕왕 김양상)으로부터

경순왕(신라 56대왕이자 마지막왕 경순왕 김부)까지

20왕을 하대라고 하였다


<김부식>신라의 박씨(알에서나온 신라 1대왕 혁거세 거서간 박혁거세)와

석씨(신라 4대왕 탈해 이사금 석탈해)는 모두 알에서 태어났으며

김씨(신라 김씨 시조 김알지) 는 금궤에 들어 있다가

하늘로부터 하강하였거나

혹은 금수레를 타고 왔다고 하니 (금 金 = 김 金)

이는 더욱 괴이하여 믿을 수 없다

그러나 세속에서는 이것이 대대로 전해 내려와 사실로 알려져 있다


정화 연간에 우리 나라에서 상서 尙書 (고려 6부의 으뜸벼슬) 이자량을

송나라에 보내 조공할 때

신부식은 글 쓰는 임무를 맡아 보좌로 가게 되었다


우리(고려 사신)가 우신관 佑神館 에 이르렀을 때

마루 한 편에 선녀의 화상을 걸어 놓은 것을 보았다

숙소에서 접대를 맡은 학사 學士 왕보가


<왕보>이는 귀국(고려)의 신 神 인데 공들은 이를 아는가 ?


라 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왕보>옛날에 어떤 제왕의 딸이 있었는데

남편없이 잉태하자 남들에게 의심을 받게 되었다

그녀는 곧 바다를 건너 진한(신라의 원형국가) 으로 가서 아들을 낳았는데

이 사람이 해동 海東 (바다 동쪽 , 한국) 의 첫임금이 되었고

제왕의 딸은 땅의 신선이 되어

영원히 선도산에 살게 되었으니

이것이 그녀의 화상(얼굴 그림) 이다


라고 하였다


나(김부식)는 또한 송나라 사신 왕양이 지은

동신성모제문에


'어진 사람을 낳아 나라를 창건하였다'


는 구절이 있는 것을 보고

이 동방의 신이 곧 선도산의 신성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선녀의 아들이 언제 왕 노릇을 하였는지는 알 수 없고

이제 다만 이러한 전설이 생긴 시초를 고찰해 본 것이다


신라에서 왕위에 오른 자들은

자기에게는 엄격하고

남에게는 너그러우며

관직은 간략히 두고

일의 처리는 간편하게 하며

지성으로 중국을 섬기어

산 넘고 바다 건너 예방(예의차 방문) 하는 사신이 끊이지 않았고

항상 자제 子弟 (남의 아들의 높임말) 들을 보내

중국의 조정에 나아가 숙위(황제를 모시는 일) 하게 하였으며

국학에 입학하여 학문을 닦게 하였으니

여기에서 성현(성인과 현인)의 교화(가르침)를 받았기 때문에

미개하고 거칠던 풍속을 바꾸어 예의가 있는 나라를 만들었다


또한 신라는 중국 군사의 위세를 빌어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고

그 지역을 취하여 군현으로 만들었으니

가히 성대(국운이 번창하고 태평한 시대) 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신라는 불가(불교)의 법을 받들고

그 폐해를 깨닫지 못하였으며

심지어 마을에도 탑과 절간이 늘어서고

백성들이 사찰로 도피하여 승려가 되었으니

군사와 농사 지을 사람이 점점 줄어 들고

나라는 날로 쇠퇴하게 되었으니

어찌 나라가 문란하지 않고 멸망하지 않기를 바라겠는가 ?


이 때에 이르러서 경애왕은 더욱 황음(함부로 음탕한 짓을 함) 하게 되어

궁인과 근신을 데리고 포석정에 나가 놀면서 술을 마시며 연회를 하다가

견훤이 오는 줄을 알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문 밖에 한 금호 擒虎 (호랑이 ??)가 온 것을 모른 것이나

누각 위에서 장여화 張麗華 (중국 진나라 여자)를 데리고 놀다가

화를 당하였던 것과 다름이 없었다


경순왕이 태조(왕건)에게 귀순한 것은

비록 부득이한 일이기는 하지만 또한 가상한 일이었다


그 당시에 만약 목숨을 걸고 태조의 군사와 싸워서

힘이 다하고 형세가 곤궁하여졌다면

필히 그의 일족은 멸망하고

무고한 백성들에게도 해가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나라의 창고를 봉하고,

군현을 기록하여 태조에게 귀의하였으니

그가 고려에 세운 공로와 백성들에게 입힌 은덕이 매우 크다할 것이다


옛날 전씨가 오와 월의 국토를 송나라에 바친 것을 두고

소자첨은 그를 충신이라고 하였으니

지금 신라의 공덕은 그보다도 훨씬 더 훌륭한 것이다


우리 태조는 비빈 妃嬪 (왕비와 후궁들) 이 많았고

그의 자손들 역시 번창하였는데도

현종(고려 8대왕 현종) 은 신라의 외손으로서 왕위에 오르게 되었고

그를 계승한 자들이 모두 그의 자손이었으니

어찌 위와 같은 음덕 陰德 (숨은 덕행) 의 보답이 아니겠는가?


<라봉봉>그렇게 삼국사기 신라 마지막 기록으로서

길고긴 대장정을 끝마쳤습니다

(이후 삼국사기 열전[왕이 아닌 귀족, 개인의 이야기]

이야기를 쓰겠습니다)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 김부

그는 무력한 상황에서 어찌저찌 왕위에 올라서

결국 고려 태조왕건에게 항복함으로서

신라의 992년 역사가 끝나게 됬습니다

(농담이지만 8년만 더버텼으면 딱 천년인데 말입니다 ㅎㅎ,,)


신라의 최후는 그래도 왕건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나온 덕에

다른 한국사 왕조들의 멸망보다는 덜 비극적이고

안전한 시대 계승차원의 멸망이었다고 볼 수 있으며

그렇게 한국 마지막 고대왕조 신라가 멸망하고

한국의 중세시대인 고려시대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아아 !

대한민국 大韓民國 의 아름답고 자랑스러운 역사이자

세 대국 大國 의 이야기

고구려, 백제 , 신라 왕조 이야기를

저가 쓸 수 있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역사 블로거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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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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