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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공왕대 왕건의 나주공략 , 국정을 놓고 여색에 빠진 효공왕>


효공왕 10년

정월(1월) 봄

파진찬(신라 4등벼슬) 김성을 상대등(신라 귀족 수장직) 으로 임명했습니다


3월

이전에 당 나라에서 과거에 급제한

김문울의 관직이 공부원외랑기왕부자의참군에 이르렀는데

그가 책명사 冊命使 (임금의 책명[명령]을 전하던 벼슬아치) 가 되서

돌아왔습니다


여름 4월부터 5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효공왕 11년

봄과 여름에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일선군 一善郡 (오늘날 경상북도 구미시) 이남

10여 성을 전부 견훤에게 빼앗겼습니다



효공왕 12년

2월 봄

혜성이 동쪽에 나타났습니다


3월

서리가 내렸습니다


4월 여름

우박이 내렸습니다


효공왕 13년

6월 여름

궁예는

장수들이 병선을 거느리고 와서

진도군 珍島郡 (오늘날 전라남도 진도군) 의 항복을 받고

또한 고이도성 皐夷島城 (오늘날 전라남도

영광구 서쪽 해안에 있던 백제의 성) 을 격파하도록 명령했습니다


효공왕 14년

견훤이 직접 보병과 기병 3천을 거느리고

나주성 羅州城 (오늘날 전라남도 나주시) 을 포위해서

열흘동안 (포위를) 풀지 않았습니다

궁예가 수군을 출동시켜 그를 습격하니

견훤이 군사를 이끌고 퇴각했습니다


(궁예의 국가 건국 배후에는

왕건 세력이 있었고

왕건 집안은 송악, 오늘날 경기도 개성시이자 이후 고려 왕조 500년 수도가

되는 개경 지역에서 해상 무역으로 큰 부를 쌓았던 호족이었기에

궁예는 후고구려 건국당시 첫 도읍으로 송악을 선택한 것이고

수군을 보내서 나주를 정복한 것도

당시 궁예의 신하였던

왕건의 세력이 해상무역으로 성장했기에

수군에 강했기에 후백제의 후방인 나주를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이라 할 수 있고

제해권을 중요성을 별로 느끼지 못했던 후백제 견훤과 달리

일찍부터 해상무역으로 성장해 바다의 중요성을 알고 있던

왕건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후삼국시대에 궁예 세력이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떠오를 수 있었던

배경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록에서는 아직 왕건이라는 인물의 활약이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지만

이미 궁예 세력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왕건이었고

나주도 왕건이 궁예의 장군으로서 출정한 지역입니다

이외에도 나주는 태조 왕건과 여러 인연이 있는 지역이고


즉 아직 왕건은 궁예 밑에서 조용히 힘을 키우고 있었고

양길 밑에서 조용히 힘을 키우다 양길을 밀어내고 왕이 된 궁예같이

궁예 밑에서 조용히 힘을 키우다 궁예를 밀어내고 왕이 된 왕건이라는 점이

공통된 모습이고,,

당시 궁예의 신하였던 왕건 역시

궁예의 전례를 모범적으로 ?? 닮아가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효공왕 15년

봄 정월(1월) 초하루(1일) 병술일

일식이 있었습니다


효공왕이 첩에게 미혹되어

정사를 돌보지 않았습니다

대신 은영이 충간(충언) 하였으나

효공왕이 이를 듣지 않았습니다

은영은 그 첩을 죽여 버렸습니다


(이쯤에 효공왕은 이미 지방에서 일어난

도적들을 진압할 능력도 없었고

경상도 지역으로 쪼그라든 나라에서 무력감 등으로

여색, 첩에 빠지게 된 거 같고

이에 신하가 충언했는데도 듣지 않자

신하 역시 그냥 첩을 죽여버렸다 하니

살벌한 기록입니다,, [신하들도 이쯤부터는

왕을 왕으로 별로 생각 안한거 같습니다,, ] )


궁예가 국호를 태봉 泰封 으로 고치고

연호를 수덕만세 水德萬歲 라 했습니다


효공왕 16년

4월 여름

효공왕이 붕어(사망) 했습니다


시호를 효공 孝恭 (효도 효 , 공손할 공) 이라 하고

사자사 師子寺 (오늘날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었다고 합니다)

북쪽에 장사지냈습니다


<라봉봉>워낙 답이없는 시대에 왕이 된 효공왕은

결국 자포자기하다가 여색에 빠졌다고 할 수 있고


이미 당대 신라 귀족들 역시 왕을 별로 왕으로 생각하지 않다가

효공왕이 충언을 듣지 않고 첩을 가까히 하자

곧바로 왕의 첩을 죽이게 된 거 같고,,

이후에도 별 말이 없었던 것을 보면

이미 신라 왕실의 권위는 바닥을 기고 있었고

나라는 외부적으로는 궁예, 견훤이

새로운 세력으로 일어나고 있었고

내부적으로는 신라 귀족들도

왕을 왕으로 생각하지 않는 분위기등이

조성되게 된 거 같습니다,,


효공왕은 후사가 없었고

결국 신라 신하들도 답이 없다 싶었는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새로운 변화를 하려 이번엔

박씨를 왕위에 옹립하게 된거 같습니다

이에 이후 잠깐 다시 박씨왕조가 들어섭니다

(신라는 이렇게 상당히 특이한 나라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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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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