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미국은 아시아 지역에 대한 중국과 소련 등의

공산주의 세력에 대한 방어선을 설정했는데

이 방어선 이름은 '애치슨 라인' 이라 불리고

애치슨 라인에 한국 지역이 빠지고

일본과 필리핀 등 위주로 그어지자

북한 김일성은 미국이 남한(대한민국) 에 대한 방어권을 포기했다 오판했고

 

'애치슨 라인' 으로 한국에 대한 방어구역이 빠져있음

 

(애치슨 라인은

미국은 대한민국 방어를 포기한게 아니라 일본과 필리핀 등은 결사적으로

사수하겠다는 의미로 가볍게 그은 선이었다 합니다)

 

이에 북한 지도자 김일성은 소련 지도자 스탈린에게

남한을 공산화 시킬테니 지원 및 허락을 해달라 48번이나 요청했는데

소련 역시 회의적 입장을 보이다

끈질긴 김일성의 요구에 허락을 해줬고

6.25 전쟁의 주동자였던 김일성 및 박헌영은

소련의 지원을 받은 압도적인 화력으로 빠른 속도로 남한에 밀고 내려가면

남한 내의 남로당 잔존세력 (공산주의 세력) 들이 들고 일어나

반겨줄 것이라는 망상에 빠졌는데

이미 이승만 정부의 4.3사건 및 여순사건 잔혹한 숙청으로

남한 내의 공산세력은 사실상 전멸했던 상황이었고

하여튼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의 도움을 받기로 약속하고

 

북한군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38도선과 동해안 등 여러 지역에서

경계를 넘어 대한민국을 기습 남침(남쪽을 침략) 했습니다

 

남침하는 인민군

 

6월 25일날 한국 정부요인들과 장성들은 휴일이라고

술먹고 자고 있거나 휴가나갔고

당시 대한민국은 북한군보다 숫자도 , 장비도 부족했는데

북한군이 탱크로 밀고 내려올때 대한민국 국군 병사들은 총과 수류탄밖에 없어

수류탄을 들고 탱크로 돌진해 탱크안에 수류탄을 던졌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열악한 상황이었고

 

한국전쟁(1950) 당시 남북한 군사력 격차 , 당시 매우 열세였던 대한민국 국군

 

북한군은 빠른 속도로 남하해 개성 , 동두천 ,포천을 함락시켰고

빠른속도로 수도 서울로 밀고내려오자

이승만 대통령은 대전으로 그리고 부산으로 탈출해

부산을 임시수도로 정했는데

한국전쟁이 터졌을 당시

전쟁 상황을 전혀 모르던 대한민국 국민들은

북한군이 서울 미아리 고개까지 오자 그때서야 피난을 시작합니다

 

그러자 대한민국 정부는 북한군이 한강을 넘어 진격할 것을 우려해

한강 철교를 예고없이 폭파시켜 무고한 인명피해가 발생했고

북한군을 곧 격퇴할테니 피난가지 말고 안심하라는 이승만의 라디오 방송을

믿었던 많은 서울시민들은 다리 폭파로 발이 묶였고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서울을 점령하고 경상도 일대를 제외하고

한국 내륙지역 전역을 점령합니다

 

당시 폭파된 한강 인도교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서울시민들에게 라디오 방송으로 안심하라 말을 하고

다리를 폭파시키고 홀로 도망쳤는데

완전한 기만 , 거짓말이었기에 이 이야기는 지도자의 무책임성 , 거짓말에 대한

사례로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습니다

 

<당시 자료들로 재구성한 당시 녹음내용>

서울시민 여러분, 안심하고 서울을 지키시오

적은 패주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여러분과 함께 서울에 머물 것입니다

 

, 국군은 총반격으로 적은 퇴각 중입니다

이 기회에 우리 국군은 적을 압록강까지 추격하여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달성하고야 말 것입니다

 

'여러분 서울은 안전합니다 !' 라는 말과 함께 쓰이며 이승만 대통령을 비꼬는 인터넷 에서 유명한 사진

 

하여튼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다리가 끊겨 피난가지도 못한 서울시민들은

북한군에 강제동원됬고 전쟁 후에는 북한군에 부역했다는 이유로

부당한 처벌을 받게됩니다 (이중고통)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당시 조선일보는

 

<조선일보>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만세 ! ,

우리민족의 경애하는 수령인 김일성장군 만세 ! ,

입성한 부대들은 서대문 마포 양 형무소에 구금된 애국자들을 석방하고 

괴뢰집단의 소위 대한민국 중앙청 서울시청 검찰청 미국대사관 은행 

소위 유엔 위원단 및 중요한 도로 교량 체신 철도 및 

각 신문사를 완전히 해방시켰다

 

등의 호외를 찍어 북한을 찬양했는데

 

당시 조선일보 호외

 

실제 조선일보의 의도라기 보다는

당시 조선일보 뿐만 아니라 대부분 신문사들에는

기자 , 간부까지 공산당에 관련있는 직원들이 있었고

이들이 찍은 것으로 보는게 맞다 하는데

워낙 임펙트가 큰 사건이라 조선일보의 흑역사로 이야기 되기도 하고

 

하여튼 경상도를 제외한 내륙지방 전지역이 북한군에 빠른 속도로 점령되자

북한은 공산 , 적화통일이 눈앞에 왔다 여겼고

점령지의 대한민국 사람들을 부역에 동원하거나 공산주의 세상을 만들자며

땅을 무상으로 나눠준다고 회유하려 했습니다

 

(저의 친할아버지도 이때 북한군이 부역시켜서

드럼통 굴리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남한사람들은 이미 한국전쟁 이전 농지개혁으로 대한민국 내에서는

지주와 소작농들이 사라져가고 자영농들이 증가해서

저마다 자신의 땅을 작게나마 가지고 있었기에

북한군이 땅을 모두 뺏어 무상으로 나눠준다는 것에 대한 반감을 느끼며

북한군에 회유되지 않았습니다

 

북한이 한국전쟁을 일으키자 미국의 대응은 매우 신속했는데

보고를 받은 미국 트루먼 대통령은 북한의 공격이

2차대전당시 나치독일 , 이탈리아 , 일본의 침략과 성격이 유사하다 생각하고

한국에서 공산주의 침공을 차단하지 않으면 결국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것이라 생각하고

3차 세계대전이라는 큰 희생을 막기위해 미국군과 UN군을 대규모로 파병해

한국을 지원하기로 결정합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평화를 위해 만들어진 세계정부기구 UN 역시 가만히 있지 않고

59개 회원국 중 33개국이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안을 지지하며

유엔의 깃발아래 모여

미국군 및 여러 세계 국가들이 어딘지도 잘모르는 작은 신생국가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대규모로 군대를 파병 , 지원합니다

 

세계정부 '유엔'

 

1950년 6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은

2차세계대전 종결 후

도쿄에서 일본을 통치하며 사실상 일본의 '왕' 이었던 맥아더 장군에게

긴급히 도움을 요청했고 (+서울시민들에게 라디오 방송으로 기만)

다음날에는 일본에 망명정부를 수립할 것을 생각하는 등

상황이 매우 나빴고

하여튼 이러한 상황속에서 한국에

결국 미군과 유엔군은 지원군을 파병했고

이에 북한군의 진격은 경상도 지역에서 지연되게 됬고

대한민국 임시수도 부산함락을 노리고 있었는데

한국군 및 미군 , 유엔군은 낙동강을 최후의 보루로 여기고

무조건 사수하려 했고

미군의 참여에 사기가 극도로 저하된 북한군이었기에

경상도 일부밖에 남지 않은 대한민국이었지만

차츰 북한군에 대한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고

남북한의 전투는 낙동강 전선에서 고착되게 됬고

북한군 역시 전투가 지속되고 보급로가 점차 길어지고

연합군의 반격이 크자 점차 정예부대의 전투력이 고갈나게 됬습니다

 

한국전쟁 지도 , 경상도 일부만 남게된 당시 대한민국

 

이로서 북한군의 남침 공세는 크게 꺾이게 됬고

대한민국은 다시 총반격 , 북진을 계획합니다

 

이전 세계 2차대전 태평양 전쟁에서 활약하며

당시 일본을 통치하며 아시아지역을 관리하고 있었던

2차대전의 영웅 미국의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은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또다시 지휘권을 잡았고

맥아더 장군은 연합군의 총반격을 시행하기 위해

전황을 한번에 뒤집을 것을 계획했고

북한군의 보급로를 잘라버려 북한군을 단절 , 고립시키기 위해

인천에 대규모 상륙작전을 계획했고 (인천상륙작전)

결국 한미 연합군은 인천에 상륙하는데 성공했고

이때 발맞추어 낙동강 전선일대에서도 대대적인 반격을 실행했고

낙동강 전선의 북한군은 인천이 함락됬다는 말을 듣자

결국 붕괴됬습니다

 

까만 선글라스와 파이프 담배로 유명한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의 영웅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

 

낙동강 일대 북한군 병력들은

2만여 병력만이 후퇴에 성공했는데

만명정도는 포로가 됬고

만명정도는 지리산으로 숨어들어가 무장게릴라군 '빨치산' 이 됬고

인천상륙작전 및 대대적인 반격으로 이때 북한군은 사실상 전멸합니다

 

(인천 상륙작전은 군사학의 기초개념인 '망치와 모루전술 [쌈싸먹기 전술]'

과도 일맥상통합니다)

 

한국전쟁의 판도를 바꾼 인천상륙작전을 다룬 영화 '인천상륙작전' , 출처 : 인천상륙작전 (2016) Operation Chromite

 

9월 15일 시작된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서울 탈환 및 대한민국 남한지역이 회복되자

10월 1일 국군은 38도선을 넘어 '북진' 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10월 1일은 '국군의 날' 이 됬습니다)

 

북한은 이미 낙동강 전선에 있던 정예 북한군이 궤멸되자

병력과 화력 면에서 압도적으로 우위에 선 연합군을 막을 수가 없었고

김일성 역시 10월 11일 밤

 

'피로써 조국을 사수하자'

 

라는 방송을 내고

몰래 국경으로 도주합니다

 

(이승만과 김일성 모두 임진왜란기 임금 선조의 후예 ?? ;; )

 

김일성은 소련 스탈린에게 긴급히 도와달라 요청했지만

스탈린은 미국과 충돌을 피하기 위해

김일성에게 만주에 망명정부를 세우라 명령했고

당시 김일성은 북한을 포기하려 마음먹었고

결국 연합군은 파죽지세로 북진해서

10월 19일 평양에 입성했고

얼마후 함경도지역까지 올라가게 되

이때 북한은 북쪽 오지나 자투리 땅을 제외하고는 전부 대한민국의 영역이 됬고

대한민국 국민들에게는 '북진통일' 이 눈앞에 어른거렸습니다

 

그러나 연합군 및 맥아더 장군은 중공군(중국군)의 참전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고

모택동 및 중공은 북한이 없을 경우 미국 영향의 대한민국과 직접 국경을 맞대는 것도

부담스럽고 수도 베이징과 한반도가 가깝기도 해

북한이라는 완충지대가 필요하다 판단해

 

(오늘날에도 일본이나 중국이

한국의 남북통일에 소극적 , 반대하는 이유도 대륙과 해양의 완충지 및

한국이 국력이 강해질 경우 자국안보에 위험이 된다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김일성을 도우기 위해 대규모로 군사를 파병해 지원해

인해전술(물량전술) 로 남하하기 시작했고

당시 중공군은 수가 너무 많아서

총이 아닌 꾕가리와 북을 치며 내려왔다고도 하는데

사실은 이미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에서 활약한 베테랑들이었기도 해서

만만한 전력이 아니었고

 

중공군의 '인해전술(인산인해 전술)'

 

중공군은 장비나 보급 면에서는 열세였지만

기동력 및 여러 경험등으로 연합군을 분리 , 고립시키며 각개격파하는 등

연합군을 충격에 빠트렸고 맥아더 장군은 새로운 전쟁이 시작됬다며

이전 일본에 사용해 엄청난 인명을 순식간에 살상했던 '원자폭탄(핵무기)' 사용을 

주장했는데

맥아더 장군은 한국 , 만주 , 중국 지역들에 핵무기를 투하해

중공군을 지연시키려 했지만

미군은 이전부터도 단순히 중공군에 대한 문제라기 보다

한국전쟁이 '3차 세계대전'으로 번질것을 계속 우려하고 있어

극도로 조심스러운 입장이었고

결국 트루먼 대통령의 반대로 핵무기 투하는 철회됬습니다

 

('만약 맥아더가 만주를 폭격했다면 ?'

은 한국사에서 유명한 만약에 [if] 가정이고

만주폭격이 됬으면 북진통일 및 만주 고토회복 등 여러

이야기도 있는데 방사능 피해 및 3차 세계대전 상황도 배제할 수 없고

하여튼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중공군이 참전해 연합군을 밀어내자

김일성은 다시금 적화통일 및 북한 회복의 희망이 생기게 됬고 (;;)

연합군은 엄청난 타격을 입으며

평양도 내주며 후퇴했고

장진호 전투 및 흥남철수(이때 문재인 대통령 부모님이 미군의 구명을 받음) 가 이때 시행되

많은 피란민들이 북한지역을 탈출해 남쪽으로 대규모 피난했습니다

 

한국전쟁을 대표하는 사진 , 대동강 철교를 건너는 피난민들로 퓰리처상 수상작

 

그럼에도 중공군이 계속 밀고내려오자

결국 1951년 1월 4일에는 서울을 포기하고

대대적으로 퇴각했고

이 사건을 1.4후퇴 라고 부릅니다

 

1.4 후퇴 당시 피난민들

 

이 사건으로 인해 북한군과 중공군을 피해 남하하는 피난민들의 행렬이

엄청나게 이어졌고

이러한 대혼란 속에서

'이산가족' 들이 생겨납니다

 

한국전쟁 이후 분단의 현실 앞에서 남북 정부에 의해 제한적으로만 만날수 밖에 없는 오늘날 '이산가족'

 

가족들은 잠시 어린 자식들을

외가나 친가에 맡기고 금방 돌아올거라 여기고 피난가기도 했는데

평생 만나지 못할 이별이 되기도 했고

수많은 이산가족이 생겨나게 됬습니다

 

당시 중공군 역시 소극적으로 남하하려 했지만

예상보다 연합군이 빨리 후퇴하자

북한을 장악하고 남하한 것이었고

당시 UN 연합군과 미군은 큰 충격에 빠져

한반도 철수까지 이야기할뻔하다

 

(단 미군이 정말 중공군보다 약하지는 않았고

전력을 다했던 중공군에 비해

미군은 이때에도 3차 세계대전에 대한 우려로

한반도 내에서만의 제한된 전쟁을 벌이려했습니다)

 

중공군 보급에 문제가 생기자

다시 연합군은 전력을 수습하고 서울을 재탈환했고

다시 38선 부근에서 여러 전투가 벌어지게 됬고

38선 부근에서의 장기간의 교전이 있었는데

전쟁기간동안 서로 큰 피해를 입은 공산군과 연합군은

여러 부담감등에 더이상 대규모 전면공세를 벌이지 않았고

 

휴전협상 전까지 고지에서의 전투를 그린 영화 '고지전' , 출처 : 고지전 (2011) 高地戰, The Front Line

 

단 북한지역은 계속해서 미 공군의 공격대상이 되어

무차별 폭격이 이어졌고

북한지역은 옛날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본토가 미공군에 폭격됬을 때 같이

사실상 아무것도 남지 않은 땅이 되어버립니다

 

(미국을 침공했던 일본이 미국에 2차세계대전 기간

미군의 폭격 , 공격 등에 대한 말도안되는 피해의식을 느끼는 것처럼

북한이 한국전쟁을 일으켰음에도

미국의 엄청난 폭격으로 인해 엄청난 피해를 본 북한지역에서는

폭격사건 이후부터 미국에 대한 적대감이 엄청나게 높아졌습니다 ;;

 

북한은 한국전쟁 이후부터 고립된 세계에서 김씨일가 우상화 및 한국전쟁에 대한

역사왜곡을 가르치고 있는 것은 유명합니다,,)

 

당시 여러 장기적인 소모전이 계속됬는데

소련 스탈린은 한국전쟁에 무관심했음에도

이미 미소간의 격차에서 소련이 열세라는 점을 정확히 인지했기에

미국이 한국전쟁으로 시선이 동북아로 쏠리자

미국이 서유럽에 힘을 못쓰도록 , 또 어짜피 한국전쟁에서는 중국과 북한군이 싸워

소련군에는 피해가 없었기에

최대한 한국전쟁을 끌고 싶어했기에

한국전쟁은 좀처럼 협상이 안되다가

1953년 스탈린이 갑자기 사망하자

곧 휴전이 이루어져

1950년부터 일어난 민족분단의 비극 한국전쟁은

1953년 3년만에 '휴전' 하게 됬고 (종전이 아니라 전쟁을 쉬는 '휴전')

38선 근처에서 생겨난 휴전선이 남북의 국경아닌 국경이 되어

남과 북은 섬처럼 단절됬습니다

 

(한국전쟁은 한국에서는 6.25전쟁이라는 표현을 많이쓰고

미국은 한국전쟁이라 표현하고

반대로 북한에서는 '조국해방전쟁(;;)' ,

중국에서는 '항미원조전쟁[미국에 대항해 북한을 원조한 전쟁]' 이라 하고있습니다)

 

이 전쟁으로 인해 한국은 수많은 군인과 민간인들이 죽고

온 국토가 전쟁터로 쑥대밭이 됬고 수많은 이산가족이 발생했고

대한민국을 도우러 온 UN의 일원이었던 세계의 젊은이들

역시 한국지역에서 엄청나게 사망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라이터에 적힌 글귀

 

이전 대한민국 정부수립기간동안 정치인 암살 , 테러 등

좌우대립으로 인한 대립은 정치인정도로만 제한되 있고

일반 국민들은 분단된 이후에도

좌우 , 남북 , 사상에 대해 그다지 큰 체감을 느끼지 못했는데

한국전쟁 이후에는 서로에 대한 극단적인 적대감을 가지게 되었고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민족사적 비극의 시작이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가족과 남북 분단의 비극을 다룬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로 실제 전쟁은 영화가 담기 어려울 정도로 더욱 잔혹했습니다 , 태극기 휘날리며 (2004) TaeGukGi: Brotherhood Of War

 

<라봉봉>한국전쟁은 한민족의 커다란 상처로 남은 전쟁이었고

전쟁으로 남북간의 적개심 , 불신감이 극대화되었으며

수많은 사망자 , 전쟁고아 , 이산가족 등이 발생했고

경제 기반 시설들이 파괴되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됬으며

한국전쟁 기간동안 미국의 군사기지로 쓰이며 군수물자등을 생산했던 일본은

군수물자등을 팔며 2차 세계대전 패전후 망했던 경제가 복구되

쾌재를 불렀던 시기이고 ;;

 

한국 전지역은 아무것도 없는 '지옥의 땅' 이 됬다 할 수 있는데

전쟁통에 헤어진 이후 금방 다시 볼 수 있을것만 같았던

이산가족들은 수십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영영 만나기 어렵게 됬으며

남북은 극도로 대치하게 됬고

이러한 민족사적 문제는 더욱 심각했습니다

 

한국전쟁은 통탄의 역사입니다

한국전쟁 이후부터는 남북은 완전히 단절되다싶이했고

점차 한 핏줄 , 한 겨레 , 한 형제에서

언어만 통할뿐

자유민주주의 국민과 공산주의 인민으로 , 다른 나라 , 다른 사람들로

분열됬다 할 수 있고

위에서 쓴 것처럼

통일한국의 강성함 등에

외국 역시 한민족의 통일을 그다지 바라지는 않는데

 

한민족의 통일은 반드시 있어야 하고

이는 경제적으로도 이익이지만 경제가 아닌

우선적으로 인륜적인 문제로서 반드시 있어야 하며

 

오랜 냉전 , 북한의 만행등으로 적개심이 커지며

한국은 통일하면 손해를 본다 , 왜 가난한 공산당들이랑 통일을 하냐라는 말도 많고

점차 오늘날에도 통일 인식이 안좋아지지만

이는 외국에서 한국의 분열을 권장하고 부추기는 전략에 선동되는 것일 수도 있다 생각하고

 

북한 역시 6.25 전쟁을 일으킨 죄악등을 인정하고

무력도발행위등을 중단하고

남북평화에 힘써야 하며

대한민국 역시 한 겨레 , 한 민족으로서 북한을 보듬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외국 역시 한민족의 분단으로 인한 동북아 긴장에 대한 비용을 지불하고 있음을

알고 한민족 분열이 아닌 

한민족 평화통일의 당위성등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반응형
Posted by 라봉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