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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일제는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 하고 패망했고

한국이 광복하자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귀국했고

한국 내에서도 건국을 준비하는 움직임들이 속속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이전부터 일제 패망의 징조를 목격하고

일제가 패망할 것을 확신하게 된 민족지도자 여운형은

정말 일제가 패망하자 건국준비를 시작했고

 

한국에 있던 일제 총독부는 이전부터 여운형의 사람됨과 인물됨을 봤기에

항복 직전 한국 지역에서의 일본인들을 무사 귀한 시키는 것을 강구하다

여운형을 교섭 파트너로 정했고

여운형은 조선총독부와 교섭을 시작했습니다

 

잘생기고 풍채가 좋아 인물로 여겨졌던 여운형은 남녀노소에게 인기많은 '호남아' 였던 민족지도자였습니다

 

<당시 엔도 류사쿠 정무총감(국무총리격)>선생 , 우리 일본인들이

무사히 일본으로 도망칠 수 있도록 제발 도와주시오

 

총독의 승인 아래 하여튼 여운형은 일제와 교섭해

일본인의 무사귀한을 조건으로 자치적인 요구를 한 교섭을 하고

건국준비를 시작했고

1945년 8월 15일 광복 당일

여운형은 건국준비위원회(건준) 을 발족시키고 건국을 준비했는데

보수 , 우파 세력들은 건준 내에 사회주의 세력들이 요직을 장악한 것에 불만을 품고

건준을 이탈했고

결국 공산주의자 박헌영계등에 의해 건준은 잠식됬습니다

 

박헌영 , 김일성이 공산주의자 대장이라면 박헌영은 참모이자 공산주의 이상가였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박헌영 역시 한국전쟁을 주도한 전범이었습니다

 

한편 태평양 전쟁동안 일제의 발악에 여러 고생과 고전을 하며

일본을 점령해가던 미군은

일제에 선전포고한 소련이 빠른 속도로

만주국을 함락시키고 한반도 북부로 진입하는 것에 대해

불안감을 느꼈고

 

1945년 8월 11일

소련에게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한국에 38선 분할론을 내세워

38선 북쪽은 소련이 , 38선 남쪽은 미국이 점령하기로 요구했는데

소련 역시 동유럽에 집중하느라 동북아에 집중할 여력이 없어

합의했다고도 하고

 

한민족의 비극의 시작 '38선'

 

이후 한국이 광복을 맞고 여운형 등 건준의 활동이 있었는데

9월초에 미군이 한국에 진주한다는 소식이 있자

마음이 급해진 건준은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

 

을 선포했지만

비중이 좌익측으로 성향이 기울자

중도 우익세력들이 건준 , 조선인민공화국에서 탈퇴했고

 

결국 9월 7일 인천항에 진주한 미군은

조선인민공화국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라는 한국인들이 세운 정부기구를 무시했고

미군은 9월 9일 서울로 진주하고

조선 총독부로부터 행정권을 이양받습니다

 

그로 인해

조선총독부에는 일장기가 내려가고 성조기가 올라갔고

남한지역에서는 미군정이 시작됬는데

 

조선총독부의 일장기가 내려가고 성조기가 올라가는 모습

 

미군정 시작부터는

조선 인민공화국 ,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들 및

한국인들은 당형태로 정치세력을 전환했고

 

우익 , 좌익 , 중도우익 , 중도좌익 등

여러 좌우익 , 중도 세력들이 일어났고

 

우익(우파)는 미국이나 자유주의의 영향을 받았고

좌익(좌파)는 소련이나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았고

중도들은 민족주의 , 민주주의 , 사회주의 (사회주의는 공산주의보다는

덜 왼쪽이라 이야기됨) 등의 영향을 받고 좌익과 우익의 사상의 중간에 있던

세력이었다 보면 됩니다

 

자본주의 , 자유주의 , 민주주의를 이념으로 택했던

미국은 당연히 우익 세력들과 함께하려 했고

그렇다고 민족주의 성향이 강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도자였던 우익의 김구보다는

대표적으로 미국에서 독립운동 활동을 했고 미국 사정과 영어에 능통했던 이승만을 밀어줍니다

 

이승만과 김구 , 의외로 김구가 키가 엄청크다는 것으로 유명한 사진

 

그러나 당시까지 한국인 , 한국 정당들은

한반도에 통일국가가 생길 것을 의심하지 않았고

미군정과도 교섭할 가능성이 있다 여겼으며

38선 역시 소상인들이 물건팔러 넘어갈 정도로 경계가 느슨했다 하고

(현재 철책선이 아닌 그냥 원래 남북은 같은 나라였으니)

 

당시까지만 해도 철책은 커녕 동네에 그어진 줄하나가 전부였던 38선

 

단 일본인들은 한반도에서 떠나기 전부터

일본인들의 귀국비용 , 비자금등을 목적으로 한국에 고의적인 화폐 남발을 해서

한국 지역에서 엄청난 화폐를 무차별적으로 찍어냈고

일본인들은 한국지역에서

35년간 가혹한 식민지배와 수탈을 하고 가면서도 곱게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런 불법들이 남발됬지만

조선총독부 관리들은 미군의 묵인하에 유유히 일본으로 돌아가서

일본에서 이러한 일들을 무용담처럼 회고록에 남겼고

한국은 일제의 화폐만행으로 미군정 기간동안 쌀값 2400% 폭등 등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을 겪습니다

 

한국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던 미군정은

일제기관 조선총독부가 넘겨준 (왜곡된) 정보 위주로 한국 운영 계획을 수립할 수밖에 없었고

이승만 대통령이 한국의 초대대통령이 되서

잔인하고 가혹했던 일제의 식민통치를 미국에 알렸음에도

그 어떤 미국인들도 믿지 않고

오히려 일본이 한국을 근대화시켜주지 않았냐라는 식의 질문을 해

이승만 대통령이 울화통이 터질 지경이 됬다 하고

미국은 한국전쟁시기에도

오히려 한국인들이 오랫동안 주둔한 일본군에 대해 친근감이 있어 빠르게 적응할 거라

오판을해 한국전쟁 당시에도 구 일본군을 투입시켜 병력열세를 만회하자는 주장도 했을 정도로

미국은 한국과 일본에 대한 역사적 무지와 정보부족이 심했습니다

 

(광복 이후 한국 입장에서는 미국은 착하긴 착했는데

미국은 한국과 일본의 역사분야에서는 무지했고

그냥 좀 옛날버릇이 나와 한국지역에 대해

옛날 인디언지역 개척정신같은 우격다짐식 모습이나

모자란 모습이 있었고 이로 인해 세계최강대국이었음에도 미국은

'조그만한 나라' 의 전쟁이었던 한국전쟁에서 엄청나게 고전합니다,,

 

[그냥 미국 및 서양인들은 아시아 자체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했음

미군의 베트남 전쟁 고전도 같은 맥락] )

 

하여튼 미군정은

한반도 지역 문제를 두고 소련과 협상을 벌이는

 

'모스크바 3상회의'

 

를 시작했고 (영국 , 미국 , 소련 외무장관 회의)

 

모스크바 3상회의

 

미소 양국은 이 회의에서

한국을 독립국가를 만들기 위해 임시적인 한국민주정부를 수립하고

미소 공동위원회 설치 및

미국 , 영국 , 소련 , 중국이 공동으로 한국을 관리하는

'신탁통치' 를 최대 5년간 실시한다는 내용이 담긴 합의문에 서명했는데

 

(일단 영국 , 중국은 사실상 들러리였음)

 

이 소식이 한국에 전해지자

한국인들은 이 내용들이 한국에 통일정부 수립을 목적으로 했어도

35년간의 일제의 잔학한 통치에 지칠대로 지쳐있었기에

또다시 외국의 간섭을 받아야하는 '신탁통치' 자체에 대한

엄청난 불만이 있었고

 

이 상황에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소련은 신탁통치를 주장했고 미국은 즉각독립을 주장했다'

 

라는 내용이 담긴 초대형 오보를 하는

'신탁통치 오보사건' 이 터져버려

 

한국지역에서는 광복이후 친일파 청산 , 정부수립 프레임에서

좌우대립 프레임으로 옮겨가게 됬고

한국 내의 좌우정당 양 세력들은 신탁통치 찬반으로

엄청난 대립을 하게됬고

좌익은 찬탁(신탁통치 찬성) , 우익은 반탁(신탁통치 반대) 을 내세우며

격렬한 좌우대립이 있었습니다

 

한국인들의 지지 역시 우익측으로 향했고

이로 인해 좌익세력들은 크게 위축되고

정치인들은 정치깡패들에게 암살당하는 등

엄청난 좌우대립 및 혼란의 시대가 시작됩니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주먹' 에서 광복후 정치깡패로 전향해 반대파들에게 대해 테러행위를 일삼은 '김두한'

 

이러한 상황속에 독립운동가 출신 및 미국에서 독립운동 활동을 했던 이승만은

정읍 지역에서 연설하며

남한지역만이라도 독자적인 정치세력을 구축할 것을 주장하는

 

'정읍발언'

 

을 했고

이는 북한지역을 제외한 단독정부를 수립하자는 발언이었다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상황속에 남북분단등을 우려한 중도세력들은

'좌우합작운동' 을 전개했으나 극좌와 극우 모두에게 배척받는 한계등을 보이고

좌우익 모두의 반발을 받으며 무산됬고

미군정이 1946년 국방경비대나 경찰등을 창설하자

좌익세력들은 이에 대한 반발로

한국 내에서 파업을 벌이거나 지하활동을 시작했고

격화되는 좌우대립속에

하루하루 혼란과 암살 , 위협등이 있는 한국이 됬습니다

 

1947년 7월에는 한국인들의 존경을 받은 민족지도자이자

이전부터 꾸준히 암살 위협시도등이 있었던 여운형마저 암살됬는데

우익 세력들은 여운형 암살 배후는 좌익세력이었다 했고 (우익이라고도 하고 불분명함)

이승만같이 단독정부를 수립하자는 목소리가 더욱 커졌고

 

1947년 9월에는 미국이 제시한 한반도내 선거를 통한 정부수립안이

UN총회에서 가결됬으나

소련은 북한지역의 인구수가 적기에 미국의 영향을 받은 남한지역이

의원 수가 늘어날 것에 대한 문제로

북한지역에 UN 한국 임시위원단이 오는 것을 거부했고

결국 1948년 2월 UN 소총회에서는 남한지역만의 단독 선거 수립안이 결정됩니다

 

한평생 대한독립에 힘썼던 이전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민족지도자 김구는 남북분단을 막기위해

1948년 4월 19일 김규식등과 함께 38선을 넘어 북한으로 가

김일성과 만나 남북총선거를 실시하려 했지만

 

(일단 김구는 우익이었지만 그전에 민족을 위한 인물이었기에

공산주의 수장이었던 김일성과 회담을 해서 민족 분열을 막으려 노력함)

 

38선을 넘는 김구일행

 

그러나 김일성은 김구의 명성을 이용해

민족적 존경을 받는 김구와 협상하는

자신의 정치지도력을 선전하는데 그치며

회의는 형식적으로만 합의를 얻고 흐지부지하게 무산됬고

 

결국 1948년 5월 10일 남한지역에서만의 총선거(국회의원 선거) 가 시작되

대한민국 1대 국회가 성립됬고

단 북한지역의 훗날에서의 선거를 대비해

의석수 중 100석을 공석으로 남기기도 했고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 개원식

 

1948년 7월 20일에는 제헌 국회에서

간선제를 통해 1대 국회의원들은 1대 대통령을 선출했고

압도적은 득표율로 김구를 제치고 이승만은

대한민국 1대 , 초대 대통령이 됬습니다

 

(이승만도 한국전쟁 및 자유당 독재로 끝이 안좋은 인물었고 욕먹는 인물이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한국인들에게는 미국에서 활약한 독립운동가이자

여러 유연한 모습등을 보이며 '이승만 박사' 로 불리며

존경을 받았음)

 

하여튼 1948년 8월 15일 중앙청(옛 조선총독부) 의 성조기가 내려지고

태극기가 걸리며 초대 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으로 하며

대한민국 정부수립이 시작되고

미군정은 종결되고 미군정의 각종 권한들은 대한민국 정부의 아래로 이관됬습니다

 

1948년 7월 24일 취임 선서를 하는 이승만 , 1948년 8월 15일 중앙청에서 열린 대한민국 정부수립식

 

<라봉봉>35년간 잔혹한 일제의 통치에서 겨우 독립했건만

곧바로 분열된 나라가 시작되니

한국사의 또다른 '민족분단의 비극' 이 시작됬고

이는 국내의 민족운동가들의 분열 이외에도

아시아 사정에 무지했던 미국 , 소련 등 서구 열강들의 실책도 있었고

하여튼 안타까운 시대이자 대한민국 정부수립이 시작되는 시기라 할 수 있습니다

 

당대 이승만은 민족지도자 김구와 달리

미국의 중요성을 일찍 파악하고 적극적으로 미국과 연대하려 했기에

독립운동가 출신 이외에도 여러 국제 ,  외교 , 정치적인 우세에 섯기에

대한민국 1대 대통령이 될 수 있었고

미국과 소련의 대립인 냉전의 시작과 더불어

한국은 점차 중도세력보다는 남한에서는 우익(자유주의) ,

북한에서는 좌익(공산주의) 의 목소리에 힘이 실리게 됬고

이러한 배경등에 중도 세력은 크게 힘을 잃었다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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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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