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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은 국내에서는 재벌들에게 정치자금 요구 ,

국제적으로는 한일수교 이외에도

여러 나라들과 외교관계를 얻어 국내외적으로

정치자금 및 경제건설 자금을 확보하려 했는데

 

박정희 정부는 당시 공산주의 확산을 막기위해

분단되있었던 남베트남을 지원하고 있었던

(당시는 공산 북베트남[+베트콩] vs 자유 남베트남)

 

미국 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베트남 전쟁에 대규모 군사 파병을 결정했고

 

당시 많은 한국군 군인들이 자원해서 자유 남베트남[자유월남]을 지원하러 갔는데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 역시 잘못된 점은 분명 있었지만 [라이따이한]

대한민국은 일제같은 침략전쟁으로 베트남에 간 것이 아닌

공산화를 막고 베트남 사람을 지원하려 파병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성격이 다릅니다)

 

목숨을 걸고 매우 용맹하게 싸워서 당대 공산 베트남군들이 두려워했다하고

이 전쟁으로 외국에

한국전쟁으로 기간 , 고아의 나라 , 연명하던 나라로 인식되던 대한민국은

타국의 전쟁에 대규모 파병을 할 만큼 성장했다는 인식을 가지게 하는데 기여했다합니다

 

출항을 준비하는 맹호부대와 청룡부대 장병들

 

또 베트남 파병 군인들은 미국에서 파병 대가로 받은 돈 , 자원들을 고국으로

알뜰히 모아 보냈다고 하고

또 베트남전 군수물자 납품 + 용역사업 등으로 여러 내수산업과 수출이 성장했고

이렇게 벌어들인 자금들로 한국의 경제가 성장하고

한국의 경제발전 인프라 건설비용으로 쓰이게 되었다 하고

 

미국 역시 당시 베트남전쟁 자체에 대해 내부적으로 회의적인 분위기와 더불어

많은 미국청년들은 강제로 징병되 원치않게 입대됬기에 사기가 매우 낮아

공산 베트남군과 싸우기 꺼리고 당시 여러 작전으로 공포심을 조장하던

공산 베트남군을 엄청나게 두려워했는데

미국 내에서도 미국 젊은이들이 죽어가는 것에 대해 여러 반전여론 및 불만이 있었고

이런 상황속에서 미국정부는 반전여론을 무마시키고 남베트남을

미국군 봉급 1/3 수준인 한국군을 전선에 투입함으로서 전비절감을 하려는 계산도 있었고

 

비록 한국 역시 징병된 군인이었지만 베트남에 간 군인들은 자원지원 및 정예병들이

간 것이었기에 한국군이 용맹하게 공산 베트남군을 물리치자 많은 도움이 되었고

 

이로 인해 미국은 5.16 군사정변으로 불신이 팽배했던 박정희 정부에 대한

인정과 용인을 하게 됩니다

 

한국군은 중복으로 파병된 병력을 포함해 8년간에 걸쳐

비전투 병력까지 총 30만명의 병력을 지원했으며

약 5만명 정도의 군대규모를 유지했는데

이중 5000여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됬고 7000여명이 부상을 당했는데

 

한국군들은 이미 한국전쟁도 겪었고 한국전쟁 시기 게릴라전인 빨치산 토벌경험 등에

전사자 등이 적은 편이었다고 하나

한국 내부에서도 박정희가 정권연장을 위해 애꿎은 젊은이들 피를 팔아먹으려한다는

비판도 있었으며 오늘날까지 많은 한국인들에게

충격과 트라우마 , 휴우증을 남기기도 한 전쟁이었으며

 

해병대 청룡부대 통신병의 철모의 낙서들 , 사진 주인공인 이명수 하사는 다행히 살아남았지만 '보고싶은 울산 큰애기 순이' 는 귀국했더니 다른 사람과 결혼했고 본인도 다른 사람과 결혼했다는 슬픈 뒷 이야기가 있다고 합니다

 

베트남 전쟁에 대한 한국인들의 트라우마가 담긴 영화 '알포인트' , 출처 : 알 포인트 (2004) R-Point

 

이렇게 베트남 전쟁은 여러 정치적 사안 , 아픔도 있었지만

사실상 돈을 벌기위해 목숨을 걸고 미국에 용병지원 간 것이라 할 수도 있는데

이당시 한국인들은 외국에서 용병이던 외노자던 온갖 더럽고 굳은일에 앞장서며

선진국 사람이 하지 못하거나 꺼리거나 어려워 하는 일들을

저가의 비용으로 정직하고 효율좋게 대신 해주며

외국사회에 신뢰를 넓혀갔고

 

(한국인들은 외국에서도 배타적이고 같은 민족끼리만 어울리며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는

중국인들과 달리 외국에서 잘 뭉치지는 않았지만 대신 근면성실하고

현지인들과 잘 어울리고 융화되는 모습으로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한국 경제발전사는 이렇게 아무것도 없다시피한 가난한 나라에서 돈을 벌기 위해

외국에 대규모 노동자만 간 것이 아니라

목숨을 걸고 외국에 용병까지 간

한국 경제건설기의 모습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당시 한국군들은

세계 최강대국이었던 미군들도 이도저도 못하며 고전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는데

올바른 전략 , 효율적 전술로 피해를 최소화하며

북베트남 공산군과 용맹하게 싸우며 공산군들을 섬멸하고 다녔고

또 지방 농민과도 잘 어울리며 대민지원도 성실히 해 많은 사회적 모범이 되었습니다

 

베트남 전쟁 한국군을 대표하는 사진 , 아이를 구해내고 있는 육군 백마부대 장병들

 

<타임즈>노획한 베트콩 문서에 의하면 베트콩은

100% 승리의 확신이 없는 한 , 한국군과의 교전을 무조건 피하도록 지시하고 있다.

한국군은 모두 태권도로 단련된 군대이니 비무장한 한국군인에게도 함부로 덤비지 마라

 

<뉴스워크>월남에 있는 미국인들은 전투에 있어서나 평정사업에 있어서나

한국군을 최고로 높이 평가한다.

사실 한국군과 함께 작전을 수행해본 일부 미군들은

미군이 한국군의 방법(전술)을 배워도 좋으리라고 믿게 되었다.

 

'마치 미국이 한국이라는 비범한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었는데,

어느 날 아침 교실에 와서 선생님인 미국보다

학생인 한국군이 앞서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과 같습니다.'

 

라고 한 미국 관리는 진지하게 말했다

 

<리처드 닉슨>자유 월남의 자유로운 미래를 위한 한국이 이룩해 온 크나큰 공헌은

17년 전(1950년 한국전쟁) 미국이 한국에 심었던

신뢰와 도움이 헛되지 않았다는 확실한 증명이 되고 있다

 

<월남 띠엔 반 신문>한국군이 주둔하고 있는 중부지역은 가장 안전한 곳이다.

한국군은 아주 특수한 전술을 가진 적과 대치하고 지역을 지키기 위해

충분히 용감한 군인이다.

또한 지방 농민과 잘 어울리고

농사일에는 모도 심어주고 우수한 군의관은 대민 진료를 열심히 해주고 있다

 

베트남 전쟁 당시 여러 외국의 시선에서

한국군은 매우 뛰어난 군인들로 평가받았고

한국인들의 특성으로

 

'불굴의 정신(온갖 어려움에도 굽히지 않는 정신력)'

 

을 이야기했는데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인들은 엄청나게 근면성실했는데,,

당시 한국인들은 미국의 돈(혈맹이지만,, '남의 돈')으로 치루는 전쟁이었기에

병력과 물자를 아낄 필요가 없었기에 월급까지 미군에게서 받다보니

최대한 돈을 벌기 위해 필요없는 인원까지 꾹꾹 머릿수를 채워 파병했고

 

(사실 오늘날까지도 미국이야말로 FM[정석]대로 하는거고

한국군은 오늘날까지 장병복지나 임금 자체에 대해서

인색을 떠나서 열악한 편이 많습니다

 

당시 미국 입장에서도 한국군이 비싼 군대가 아니었기에

나름 서로 윈윈하는 형편이었습니다)

 

한국군인들은 머나먼 고향의 가족들을 위해 , 외국에서도 부끄럽지 않도록

열심히 일하거나 싸웠고

근면성실히 주둔하며 미군의 지원을 정말 알뜰살뜰히 모아서 고국에 부쳤는데

 

한국군들은 산처럼 쌓아놓은 어마무시한 미국의 군수물자들을

최대한 받아내서 가난한 고국에 부치려했고

처음으로 한국군들은 미군의 지원으로 전투식량도 지긋지긋해 하고

여러 물자도 낭비하는 호강 및 사치스러운 경험을 했지만

상황이 그렇다보니 한국군들은 남아도는 미군 물건들을 가능한 한개라도 더 빼돌려

한국으로 가져가는 것이 애국이라 생각했고

 

(어짜피 당시 미국 입장에서는 나름 별 중요하지 않은 짬처리였을수도있고

가난한 한국은 열심히 이삭 , 폐지줍던 시기)

 

당시 파병된 한국군 장병들은 귀국할때 사방 1m 정도의 나무상자 (귀국박스) 에

자기가 사용하던 사물 및 구입물품들을 가져갈 수 있었는데

한국인들은 휴대식량으로 나오는 미군 씨레이션이나

하다못해 한국에 가서 고물로 팔 수 있는 탄피 , 폐품까지 꾹꾹 눌러담았고

모든 장교 , 사병 할 것없이 가난한 나라를 살리겠다는 애국심에

귀국박스 안에 여러 물품과 고철까지 꾹꾹눌러담아 고국으로 보냈고

 

여러 가난한 나라의 그러나 매우 검소한 나라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할 수 있는

당시 한국군의 이야기였고

 

특히 베트남 전쟁당시

한국군 식문화 등은 여러 이야기를 남겼는데

 

한국군의 쓰레기 수준의 배급식량에 비해

미군 식량인 씨레이션은 엄청나게 맛있는 음식이었고

대부분 한국군들이 영어를 몰라

속안의 음식들을 흔들어보며 내용물을 짐작해 먹었다는 이야기 ,

한국군도 결국 씨레이션만 먹다보니 점차 질려서

이후 베트남쌀인 '안남미' 와 된장이 보급되 그나마 입맛이 달래졌다는 이야기 ,

당시 베트남전 파병 장병들이 가장 필요로 했던 것이 '김치' 였기에

박정희 대통령이 1967년 미국 존슨대통령에

 

'김치만이라도 하루바삐 우리 군인들이 먹을 수 있게만 해달라'

 

라는 김치친서를 보내 김치통조림을 만들게 되

한국형 씨레이션이 시작됬다는 이야기 ,

 

김치 통조림

 

김치 통조림을 맛보는 베트남전 참전 장병들

 

고국의 향수를 달래기위해

베트남 파병장병들이 양배추로 김치를 담가먹었다는 이야기 등 여러 이야기를 남겼고

 

이외에도 가난해서 고기를 잘 못먹었던 한국군들이

미국식 스테이크 문화에 놀랬다거나

양변기를 사용할줄 몰라 당황했다는 이야기 등

 

베트남 전쟁 당시는

시골쥐(한국) 와 서울쥐(미국) 같은 웃픈 이야기등이 많았고

가난한 한국군이 세계 초강대국군과 어울리며

처음으로 세계사회 , 선진문화의 충격을 받은 시기였다고도 할 수 있고

여러 가슴먹먹한 이야기들도 많이 있었던 시기입니다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에서 유행한 노래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 한국인들은 월남에서 돌아온 ~ 새까만 김상사 ~ 이제서 돌아왔네 ~ 라는 노래를 한번쯤은 들어봤을 것입니다

 

또 베트남 전쟁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 역시 빼놓을 수 없는데

당시 베트남전쟁으로 많은 사망자 , 부상자가 발생한 것 이외에도

한국군이 베트남에 오래 파병되며

베트남 현지여인들과 사귀며 최소 5천~최대 3만명의 혼혈아를 낳았는데

 

한국군들이 고국으로 철수하고 북베트남의 공산적화통일로 베트남전쟁이 끝나자

남겨진 베트남 여인과 아이들은 오늘날까지 어려운 삶을 살았고

이러한 한국군+베트남 여성들의 혼혈아들을

 

'라이따이한'

 

이라 부릅니다

 

라이따이한의 이야기들 다룬 SBS스페셜 '라이따이한의 눈물'

 

라이따이한 문제는 한국이 외면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베트남 전쟁 문제 중 하나라 할 수 있고

당시 한국인들은 베트남에서 '현지처' 를 만들었다 할 수 있는

부끄러운 역사이기도 합니다

 

이외에도 미군은 베트남의 정글속에서

기습공격하다 불리해지면 도망치는

'게릴라 작전' 을 하는 북베트남군 및 베트콩들을 제압하려

정글들을 고사시켜 공산베트남군의 매복과 은신을 막으려했고

이에 나무들을 죽이는 '고엽제' 를 베트남에 살포했는데

이 고엽제는 초목과 입사귀를 말라죽게하나

인체에까지도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치는 매우 위험한 물질이었고

이로 인해 현지인들 뿐만 아니라 베트남 전쟁에 간 군인들은

고엽제로 인해 장애나 후유증을 가지게 되었고

오늘날까지 이러한 문제들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세계 화학사에서도 악명이 높은 베트남전쟁 당시 미군이 가장 많이 사용한 고엽제 '에이전트 오렌지' 의 폐기되기 직전 사진

 

당시 비행기로 베트남 정글에 살포된 고엽제

 

베트남 고엽제 피해자(대한민국 고엽제 전우회) 들의 미국 백악관 시위

 

베트남 고엽제 피해자들

 

이외에도 한국군이 베트남에 침략군 성향을 보였다거나

베트남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이야기들도 있지만

일단 위에서 말했듯이 한국군은 베트남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미국을 도와 대규모 파병을 한 것이었고

여러 대민협력도 했으며

당대 기록과 자료들이 확실하지 않고

공산통일에 성공한 오늘날 베트남 정부 역시

당시 공포심을 조장해 통제력을 유지하려 여러 양민학살을 했기에

이러한 민간인 학살문제등에서는 깨끗하지 못하기에

이 문제에 대해 깨끗하지 못하며

물론 그렇다고 공산베트남군이 학살을 저질렀다고 한국군이 학살한 것이

정당화 될 수도 없지만

 

오늘날에서도 정말 자료가 불분명한 것이 많다고 하며

베트남 정부의 협조 역시 필수적이지만 정작 베트남 정부 역시

이러한 학살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기에

이 당시를 승전의 기록으로 선전하는데 그치며

공론화는 꺼리는 입장이라 하고

 

단 당시 한국군의 파병성향 및

자유베트남에 대한 적극적인 대민지원 및

여러 인도주의적 활동을 볼때

당시 한국군을 악으로 매도하는 것도 옳다 보기 어려우며

오늘날 베트남 정부도 , 한국정부 및 국방부도 답이 없다 싶을 정도로

딱히 이렇다 할 해결책을 내놓지는 못하나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 , 지원은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과는 성향이 다를 뿐더러

한국인들은 혹여라도 당시 베트남전쟁에 대한 아픈기억 및 라이따이한 문제나

고엽제 등에 대한 미안함 , 인륜적 문제때문이라도

베트남인들에게 대한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보여지고

오늘날에도 베트남인 역시 한국인들이 잔혹한 식민지배를 했던

일본에 가지는 적개심 같은것이 아니라

한국을 좋은 나라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베트남 공장에 방문한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

 

대한민국 문재인 대통령과 베트남 주석의 만남 , 오늘날 한국과 베트남은 여러 경제협력 등의 우호관계로 발전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라봉봉>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인들은 오늘날 용병으로 유명한

네팔의 '구르카 용병' 처럼

가난한 나라에서 돈을 벌기 위해 외국에 목숨걸고 용병을 나간 것이라 볼 수 있으며

 

한국인들은 외국에 나갔을때 군인이던 경제인들이던 간에

단순히 돈만 받고 지내고 왔다기 보다

외국에서 놀랠정도로

부끄럽지 않게 매우 용맹히 , 열심히 활약해오며

국제 사회의 신용을 쌓아갔다고 할 수 있으며

가히

 

'불굴의 한국인'

 

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또 한국은 미국과의 관계에서

미국과 일본간의 관계같은 서로 전쟁을 한 경험이 있는 ,

비지니스적 입장에 있는 관계가 아닌

 

한국과 미국은

한국전쟁과 더불어 베트남 전쟁 등으로

'혈맹' 이라는 관계가 맞다고 할 수 있고

 

오늘날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기 전 장사꾼 생활을 오래 해서인지

한국전쟁이나 베트남전쟁 , 이라크 파병같은 피로 나눈 혈맹을 무시하고

뜬금없이 방위비 인상 등으로 한국에 삥을 뜯는 느낌 등

한국과의 관계를 금전적인 문제에만 집중에서 보는 느낌이라 아쉬운 느낌도 있습니다

 

다시 베트남 전쟁 이야기로 돌아가서,,

물론 오늘날 보기에는 차마 미화시키기도 , 말하기도 어려운

끔찍한 이야기들이나

우리의 가난했던 기성세대들은 이렇게 살았다는 것을

우리나 후손들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여러 가슴먹먹한 이야기를 남긴 베트남 전쟁은

옛날 구한말 조선시대 사람들이 외국 전등이나 전기 , 사진기술 등을 보고

도깨비같이 여기거나 신기해했던 것처럼

세상물정 잘 모르던 한국인들은

미국의 지원을 받고 미군과 어울리며 여러 문화충격들을 받았는데

 

저 어렸을때까지만 해도 뷔페가서 음식싸오기등이나

뷔페문화에 충격먹는 이야기들이 꽁트나 시트콤등에 풍자됬을 정도로

뷔페는 저어렸을때까지만 해도 새로운 문화였고 충격적인 문화였지만

소득수준이 높아지고 뷔페가 보급화된 오늘날 보기에는 웃픈 이야기들이지만

당시 한국군들은 마치 미군들이 산더미같이 쌓아놓은 뷔페에

(자신들의 목숨을 비용으로 내고 출입해) 처음 간 격이라 생각되고

 

참 알뜰살뜰한 모습들은 촌스럽다 보기도 어렵고

여러 선배세대들의 노력과 고생이 담긴 이야기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외에도 베트남에 위문공연간 여가수들의 팬티가 계속 도난당했는데

알고보니 한국군 병사들은 여자들의 팬티를 가지고 있으면

부적같이 총알을 피해간다는 미신을 믿고있어서

일부로 여가수들은 팬티를 넉넉히 준비했다는 이야기들이나 (;;)

오늘날 우리 이웃이나 친지중에서도 베트남전과 관련된 분들이 계시는등

여러 이야기도 많이 남긴 베트남전이고

베트남전쟁은 한국사 및 세계사의 추악하고 또 가슴아픈 역사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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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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