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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군사정변을 일으키고 대한민국의 초헌법적 실질적 지도자(+독재자) 가 된 박정희는

군정을 실시해 대한민국 여러분야를 개혁해 민심을 얻고 (특히 박정희에 대한

농민의 지지가 뚜렷했고 서울같은 도시에서는 박정희 지지가 상대적으로 약했습니다)

 

민정 이양시기가 다가오자 결국 박정희는 민주공화당을 창당해 세를 불리고

민주당 윤보선과 대선경합을 벌였는데

 

젊고 과단성 있는 이미지로 혁신세력들의 지지를 받은 박정희였고

놀랍게도 박정희는 윤보선보다 0.97% 많은 표를 받아

5대 대선에서 승리를 거두어 대통령이 됩니다

 

(박정희는 쿠데타를 일으키고 군정을 실시했지만 나름 여러 유능한 모습도 보여

이후 선거에서 승리후 나름 합법적으로 대한민국 대통령이 됬습니다)

 

동서(경상도 vs 전라도) 대결보다는 남북(도시 vs 지방) 구도였던 5대대선 , 오늘날에도 도시는 기본적으로 법률이 강하고 농촌은 느슨한 경향이 있어 불법성이 있었던 박정희의 지지구도가 갈린것도 있어보입니다

 

참고로 이당시 선거가 특이한 점은

이때부터 선거는 본격적으로 도시=민주당 ,

지방+농촌=박정희 의 모습등을 보인 것과 더불어

오늘날 민주당의 '텃밭' 이라고도 불리는 농촌이 많은 전라도 지역에서 조차

당시는 박정희의 강세였고

 

이후 유력한 민주당 인물이었던 전라도출신 정치인 김대중의 등장으로 본격적으로

대한민국은 전라도=민주당 ,

박정희의 출신지인 경상도=공화당(오늘날 자유 한국당) 의 텃밭 및

지역갈등정치의 시작이 되었다 할 수 있는데

 

(+박정희의 후계자였던 전두환의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혈진압으로

완전히 전라도는 공화당계 보수정당에 등을 돌리게 됩니다)

 

하여튼 당시까지만해도 전라도 경상도의 뚜렷한 한쪽당 밀어주기는 보이지 않고

오히려 전라도민들 역시 박정희를 밀어주는 모양새였고

 

하여튼 대선에 승리한 박정희는 대한민국 5대 대통령에 취임하며

'제 3공화국' 이 시작됬고

 

대한민국 5대 대통령 박정희

 

박정희는 일제 만주군 장교 출신의 친일파 및 공산당가입자 및

이후 친자유주의 성향의 반공주의자라는

여러 극단의 기회주의 성향을 보인 인물인데

 

청년시절 박정희가 숭배하고 영향을 받은 역사속 사람들은

나폴레옹과 이순신 장군이었고 (나폴레옹을 사실상 박정희가 많이 흠모했으나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고나서는 숭배대상을 이순신으로 옮겼다고도 합니다)

 

이전부터 영웅 숭배심에 불타던 소년 박정희는

경북 벽지의 촌에서 소를 먹이면서도 나폴레옹 전기를 읽었고

사범학교에 다닐때에는 나폴레옹 초상화를 걸어두었다거나 했고

박정희는 한국판 나폴레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실제 박정희의 인생 역시

키가작고 열등감에 가득 차 있으며 야심을 내성적 태도속에 숨기던

시골 출신의 인물이라는 점과 이후 행보들은

나폴레옹의 일생과 닮아있었고

 

나름 그는 어린 , 청년시절부터 여러 서적속에서 여러 사상과 문화들을 접하고

이후 영웅같은 모습으로 일어나 국가를 개혁하는 등의

큰 인물이 되고 싶다는 꿈을 꾸게된 인물이라 보여지고

 

이전부터 품어온 생각들을 시행할 자리가 된 대통령이 되고 나서부터는

나폴레옹이 '나의 사전에 불가능이란 단어는 없다' 라고 말한 것처럼

박정희는 '하면 된다' 정신으로

마치 나폴레옹처럼

적극적으로 대한민국을 그의 방식대로 바꾸어가기 시작했다 할 수 있습니다

 

'나의 사전에 불가능이란 단어는 없다' 라는 말로 유명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 저 어릴적때까지만 해도 어린이 위인전에 있었던 인물인데 역시 독재자 겸 정복자 + 여러평가가 갈리는 인물이라 오늘날 어린이 위인전에서는 나폴레옹이나 알렉산더 대왕같은 인물은 빠지는 경향도 있어보입니다

 

박정희는 5.16 군사정변으로 불법적으로 정권을 잡고

이후 합법적으로 간발의 차로 대통령이 됬으나

여러 정권안정성 , 지지기반의 약점들을 보였기에

적극적인 반공정책과 경제제일주의 등을 내세웠고

특히 한국전쟁으로 세계 최빈국화 된 가난한 나라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박정희의

'먹여 살려준다' 는 유혹은 크게 다가왔고

결국 박정희는 경제발전이라는 명목으로 국민들의

그에 대한 불안감 및 불신의 눈을 돌리는데 성공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전 장면내각에서 구상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을

본격적으로 시행하려 했고

경제발전을 하기 위한 자금을 얻기 위해

1945년 광복한 이후부터 단절되있었던

일본과 수교를 맺어 일본계 자금을 끌어오기로 결정했는데

이에 박정희 정부는 비밀리에 한일 국교정상화를 추진하게 되었는데

이에 당시 오랜 식민수탈을 겪은 한국인들의 반발이 매우 거셌고

당시 사람들은

 

<당시 한일수교 반대자들>'왜놈과 국교정상화는 제2의 경술국치이자 을사조약이다' ,

'국민과의 합의도 없는 왜놈과의 국교정상화는 친일 매국 정권의 독재다'

 

등의 여러 반대입장을 보였고

 

서울대 , 연세대 , 고려대 학생들은 6.3 항쟁을 벌여

박정희 정부의 한일국교정상화에 반대했고

특히 시위 주동자였던 고려대 학생회장이 체포됬는데

이 인물은 훗날 다시 박정희계 정당으로 들어가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된

'이명박' 이었고 (저도 이전에 처음봤을때 뜬금없었는데

김영삼처럼 민주화운동하다 현실과 타협해 보수정당 대통령이 된 인물도 있고

[이런 경우 '변절' 이라고도 부름]

박정희 정부의 비밀 실세였다가 김대중 정부때 국무총리가 된 박태준 같은 인물도 있고

한국에는 여러 중도나 철새정치인도 있고 이런저런 인물들이 있습니다)

 

한일수교에 반대하다 체포되 재판을 받는 학생시절의 이명박 (오른쪽에서 세번째)

 

박정희는 국민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일본과의 국교정상화 필요성을 호소하며

반일이 아닌 극일(일본을 이기자 , 극복하자) 을 하자는 요체의

대국민담화문을 발표하기도 했지만

당시 분노한 대한민국 인사들의 반발을 누르기에는 부족했고

이러한 상황속에서도 한일관의 협의는 계속되

결국 한일국교정상화에 졸속적으로 합의되어

 

한국은 말도 많고 탈도많은 '한일기본조약' 을 체결하고

요약하자면 한국과 일본은 국교를 정상화시키고

식민지배에 대한 사과등의 의미로 배상을 받는 대일청구권을

'독립축하금' 이라는 형식으로 무상 3억달러 , 유상 2억달러 ,

민간 상업 차관 1억달러 제공 등 여러 자금을 받고 합의하기로 했는데

문제는 일본의 식민지배 반성이 누락되있다는 점 등의 굴욕적 회담이었기에

사실상 2차 을사조약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시작부터 잘못된 한일 수교였으며

 

1965년 한일협정이 정식 조인되는 모습 , 한일수교 정상화는 필요했지만 문제는 기나긴 식민지배등 역사문제를 무시한채 졸속히 진행되었고 그 문제점들은 오늘날에도 계속되는 한국사의 수치스러운 순간입니다

 

불법적인 과정으로 권력을 잡아

하루라도 빨리 국민들에 성과를 내야했던

수많은 독재자들의 딜레마와 같이

박정희 역시 그런 조급한 상황이었기에

국민들의 비판을 무시하고 굴욕적으로 일본에게 돈을 받고

굴욕적인 한일 국교정상화를 실시했고

 

또 국민들의 반대여론이 들끓자

용공(공산주의를 긍정적으로 용인하는 자세) 사건을 조작해

국민들의 관심을 돌리려 했는데

박정희는 좌익계열 정당 인민혁명당(인혁당) 이

북한의 지령을 받고 대규모적 지하조직으로 국가를 변란하려던 사건을 적발했다며

무고한 사람들이 잡혀가 고문받고 옥고를 치뤘던 대한민국 정부의 흑역사 중 하나이고

 

1차 인혁당 사건으로 재판받는 사람들

 

인혁당 사건을 조작한 박정희의 비밀 권력기관

'중앙정보부(중정 , 오늘날 국가정보원)' 는

이후에도 사법부를 장식으로 여기고

헌법위에 군림하며 군사정권의 무시무시한 권력기관이 되어

간첩잡기 , 정보수집 이외에도 민주화운동가들을 탄압하는 기관으로 악용되었고

(국가보안법과 비슷)

 

이에 한국에서는 말 잘못하면 중앙정보부 요인들에게

남산 지하실로 끌려가 고문당하며

 

'코로 설렁탕을 먹는다(코렁탕)'

 

는 도시전설이 있을정도로

중앙정보부는 막강하고 무시무시한

박정희 정부를 대표하는 권력기관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남산에 있었던 중앙정보부 ('남산' 은 중앙정보부를 상징하는 은어가 되었습니다)

 

<라봉봉>박정희 정권은 이후에도 외국과의 적극적인 외교노력을 하여

다양한 자금을 국내외로 끌어모아 경제건설에 집중했는데

역시 급하게 정권을 잡은 인물이라 정권 안정성 , 기반이 취약했기에

당장의 성과를 내는게 급했던 박정희여서

졸속한 경제정책으로 인해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

많은 중 · 장기적 피해도 있었다고 할 수 있으며

 

한일협정은 이후에도 일본이 역사문제로 까불게 되는

빌미를 제공해주기도 했기에

정말 뭐라 하기 어려울 만큼 아쉬운 것이라 생각하고

오늘날에도 한일 양국의 장기적인 교류 및 이야기가 필요한

미완의 협정이라 생각됩니다

 

당시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되 세계 최빈국이라는 열악한 상황속에

절대적 빈곤에 시달리며 가난해진 대한민국 국민들은

합리적 이성과 자유대신 독재자 박정희가 제공해주는

빵을 선택했다는 점은 (배부른 돼지 vs 배고픈 소크라테스)

틀렸다고 말할 수도 없지만 (먹고사는것도 참 중요하기에)

결국 이로 인한 독재의 폐해와

대가를 치뤄야만 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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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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