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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영과 영광의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내치(나라 안을 다스림)>


광개토대왕,영락 15년

7월 가을

고구려에는 메뚜기 떼가 생기고

가뭄이 들었습니다


12월 겨울

연나라 왕 희(모용희)가 거란을

공격하려 경북 ? (거란 국경) 에 도착했습니다

(燕王熙襲契丹至陘北)

그러나 거란의 세력은 모용희의 생각보다 강대했고

거란의 군사가 많은것을 겁내어

돌아가려했습니다

이때 모용희의 옆에있던 황후 부씨는,,


<황후 부씨>남자가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베어야죠 ! 당신의 뜻에 따르지 않겠어요 !


이렇게 황후 부씨가 모용희의 철군을 반대하자

모용희는 수레의 무거운 군수품들을 버리고

경병 輕兵 (가벼운 몸차림을 한 병사) 으로

우리나라(고구려)를 공격합니다,,

그러나 모용희의 연나라군은

3천여리를 행군해서 왔기 때문에

군사와 말들이 피로했고

동사자 (얼어죽은 사람)들이

길에 줄을 이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우리(고구려)의 목저성을

공격하다가 승리하지 못하고 돌아갑니다,,


광개토대왕,영락 16년

2월 봄

광개토대왕은 궁궐을 증축 수리했습니다

5개월 전인 광개토대왕,영락 15년 7월 가을에

메뚜기떼가 생기고 가뭄이 생겼다는 기록이 있었는데도

돈이 많이드는 궁궐 공사를 한것은

곧바로 이듬해(다음해) 궁궐을 증축할정도로

고구려의 사정이 호전됬다고도 여겨진다고 합니다

실제로 광개토대왕릉비에는

광개토 대왕때에는 '백성들이 평안히 자기 직업에 종사했고

나라가 부강하니 백성이 편안했으며

오곡마저도 풍성하게 익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광개토대왕,영락 17년

3월 봄

광개토대왕은 북연에 사신을 보내

같은 종족으로서의 정의를 나누었다 且叙宗族

(혹은 종족을 베풀었다 )고 합니다


<라봉봉>어떤 뜻이냐면

당시 연나라에서는 암군이었던

연나라 왕 모용희를 살해하고

모용운을 추대했는데 모용운은 사실

원래이름은 고운(高 고씨 )으로서

연나라에서 공을 세워 모용씨 성을 하사받고

모용씨로 바꾼 인물이었습니다

모용운,고운은 고구려의 지파,고구려계 인물이었고

모용운은 연나라의 왕,황제가 되고

성을 다시 고씨로 되될렸습니다,,


이에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북연,연나라 고운에게 사신을 보내

같은 종족으로서의

정의(따뜻한 마음과 의리)를 나누었습니다

이를 북연이 고구려에

복속되었다고 보기도 한다고 합니다,,


이에 북연의 임금 운(모용운,고운)은 시어사 이발을 보내서

답례를 합니다

운의 조부(할아버지) 고화는

고구려의 방계인데

자칭 고양씨의 후손이라 해서

고를 성씨로 삼았습니다

예전에 모용보가 태자가 되었을때

운이 무예가 뛰어나다 해서

동궁을 모셨는데 모용보가 운을 아들로 삼아

모용씨라는 성울 주었었다고 합니다


이외에 삼국사기 기록에는 없고

광개토대왕릉비 기록으로는

광개토대왕,영락 17년에

광개토대왕은 5만 고구려군을 파견하여

어떤 적들을 전멸시킵니다,,

노획(싸워서 적의 물품을 빼앗음)한

적의 갑옷이 만여벌이고

그 밖에 군수물자는 그 수를 헤아릴수 없이

많았다고 합니다


현재는 삼국사기 기록위주로 쓰고있고

신라구원,백제와 왜(일본) 토벌등

더 자세한 이야기들은 이후 할거 같습니다,,


광개토대왕,영락 18년

4월 여름

광개토대왕은 왕자

거련(거연, 고구려 20대왕 장수왕)을 태자로 삼았습니다


<광개토대왕>왕자 거련은 체격이 장대하고

의기가 호방하니 나의 뒤를 이어

고구려인들을 위할수 있을것이다


<고구려 신하,백성들>정말 좋은 일입니다 태왕 폐하

앞으로도 고구려는 창성할거라 생각됩니다

고구려 만세 !


7월 가을

동쪽 지방에 독산등 여섯개의 성을 쌓고

평양의 백성들을 이주시켰습니다

이는 인구가 적은 동쪽에 비해

평양에는 인구가 많았고

평양 인구를 동쪽에 이주시켜

동쪽지방 개척,방어와

평양지배를 강화하는 정책이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8월

광개토대왕은 남쪽 지방을 순행했습니다


광개토대왕,영락 22년

10월 겨울

광개토대왕이 붕어(사망)합니다

호를 광개토대왕이라 했습니다


광개토대왕릉비 마지막에는

광개토대왕은 선조 왕들의 능묘,무덤에

석비를 세우지 안핬기에

여러 오차들이 생기게 되어

선조 왕들을 위해 비를 세우고

연호를 세겨 기록하여 착오가 없게하라고

명했다고 합니다 또

규정을 제정해서 ,,


<광개토대왕>수묘인(무덤을 지키는 사람, 묘지기)을

이제부터 다시 서로 팔아넘기지 못하며,

비록 부유한 자가 있을지라도

또한 함부로 사들이지 못할것이니,

만약 이 법령을 위반하는 자가 있으면

판자는 형벌을 받을 것이고

산자는 자신의 수묘 守墓 (무덤관리, 무덤을 지키게)하도록 하라


라고 말하셨습니다

광개토대왕은 역사의 중요성을 안

고구려의 19대 태왕이었고

그의 광개토대왕릉비에 나온 마지막 말은

단순히 묘 관리만에 적용된다기보다

우리의 역사에도 적용될수 있습니다

역사는 함부로 사거나 팔수 없으며

거짓으로 왜곡할수도 없고 해서도 안되며

우리가 반드시 지켜나가야 합니다


<라봉봉>현재 삼국사기 위주로 쓰고있으나

한국 고대사는 여러번 쓸 계획이기에

나중에 광개토대왕의 백제,왜 토벌등

이야기도 더 자세히 쓸거 같습니다,,

그렇게 18세의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마자

39세로 사망하실때까지 22년동안

계속 동서남북으로 영토를 넓히신

영원한 한국사의 영웅 광개토대왕의 이야기였습니다


광개토대왕의 업적과 활동, 이야기는

너무 할 이야기가 많고

한국 고구려사의 여러 미스터리와

전설등을 남기신 왕입니다

자료도 많으셔서 여러번에 걸쳐서 해야될거 같고

그의 아들 고구려 20대왕 장수왕은

그를 기려 광개토대왕릉비를 세웠고

오늘날에도 귀중한 한국사의 자산입니다


<광개토대왕릉비>


광개토대왕 廣開土大王 은 이름과 같이

넓게 廣 넓힌(열린) 開 땅 土 왕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광개토대왕의 치세동안 아시아는

중국 중심의 질서에서

고구려 중심 질서가 생겨나게 됬고

고구려는 변영과 영광의 시대를 맞게됩니다

오늘날에도 길이길이

기억되고 이야기 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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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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