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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로왕이 위나라(중국 북조)에 보낸 *표문>


(*표문 表文

1. 같은말 표 表 마음에 품은 생각을 적어서 임금에게 올리는 글

2. 예전에 사용하던 외교 문서의 하나


중국은 옛날엔 선진국이었기에

힘이 강하던 약하던 상국 대접을 해줬고

특히 당시 백제 개로왕대에

위나라에 보냈던 시기에는

고구려의 공격들에 더 급했던 시기라

다소 비굴한 느낌이 있습니다)


개로왕 18년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서 예방하고

개로왕이 다음과 같은 표문을 올렸습니다


<개로왕의 표문>제가 동쪽 끝에

나라를 세웠으나

이리와 승냥이 같은 고구려가

길을 막고있으니

비록 대대로 중국의 교화를 받았으나

번방 신하의 도리를 다할 수 없었습니다


멀리 천자의 궁궐을 바라보면서

달려가고 싶은 생각은 끝이 없으나

북족의 서늘한 바람(고구려)로 말미암아

대답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생각하건대 폐하께서는

천명과 조화를 이루고 있으니

존경하는 심정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삼가 본국의

관군장군부마도위불사후 장사 여례 餘禮

(백제 왕족 부여례 [부여씨 夫餘氏 성을

여씨 餘氏 로도 불렀습니다],

개로왕의 사위[근친혼],백제 외교관)와

용양장군대방태수사마 장무 등을 보내어

험한 파도에 배를 띄워

아득한 나루,나루터(항구)를 찾아

목숨을 자연의 운명에 맡기면서

저의 정성의 만분의 일이라도 보내고자 합니다


바라건대 천지신명이 감동하고

역대 황제의 신령이 크게 보호하여

이들이 폐하의 거처에 도달하여


저의 뜻을 전하게 할 수 있다면

비록 이를 아침에 듣고 저녁에 죽더라도

길이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표문에서 또한 말했습니다


<개로왕의 표문>저와 고구려는

조상이 모두 부여출신이므로

선조시대에는 고구려가

옛 정을 굳건히 존중하였는데


(백제인들 역시 수백년이 지난 뒤에도

계속 고구려와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고

실제로 백제의 무덤들은

고구려의 무덤들 형식에

기존 마한의 토착세력의 무덤형식이

결합된 형식으로

고구려와 백제의 뿌리가 같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별개로 백제와 고구려는 일본문화 발달에

크게 기여한 나라이고 그래서인지

일본은 백제와 고구려를 좋아하고

두 나라를 멸망시킨 신라를

싫어하는 경향이 있는거 같습니다,,)


그의 조상 소,쇠 釗 (고구려 16대왕 고국원왕

고사유의 다른이름고소,고쇠)가

경솔하게 우호 관계를 깨뜨리고

직접 군사를 거느려

우리 국경을 침범하여 왔습니다


우리 조상 수 須 (백제 14대왕 근구수왕 부여수)

가 군사를 정비하여 번개같이 달려가

기회를 타서 공격하니

잠시 싸우다가

소,쇠(고구려 고국원왕)의

머리를 베어 효시 梟示 (목을 베어 높은 곳에 매달아 놓아

뭇 사람에게 보이다)하였습니다


(삼국사기를 쓰신 김부식님은

고구려 고국원왕 기록 마지막에

'백제 개로왕이 위나라에 표를 보내기를

쇠[고국원왕]의 머리를 베어서 달아 매었다고

했으나 지나친 말이다'

라고 말했고

삼국사기 고국원왕 기록대로

고국원왕이

화살에 맞아죽었는데

개로왕의 허세,과장이거나

진짜 사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로부터 (고구려는) 감히

남쪽(백제)을 돌아보지 못하다가

풍씨(연나라)의 운수가 다하자

그의 잔적들이 고구려로 도망해온 이후로

추악한 무리가 차츰 세력을 쌓아 갔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결국 우리를 무시하고

침략을 하게 되었습니다


원한을 맺고 전화 戰火 (전쟁)가 이어진지

30여 년이 되었으니

재정은 탕진되고 힘은 고갈되어

나라가 점점 쇠약해졌습니다


만일 폐하의 인자한 생각이

먼 곳까지 빠짐없이 미친다면

속히 장수를 보내

우리나라(백제)를 구해주소서


그렇게 해준다면  저의 딸을 보내

후궁을 청소하게 하고

자식과 아우를 보내

외양간에서 말을 기르게 하겠으며


한 치의 땅, 한 명의 백성이라도

감히 저의 소유로 하지 않겠습니다


표문에서는 또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표문이 너무 길어서 삼국사기에는

이런식으로 써져있는거 같습니다,,)


<개로왕의 길고 긴 표문,,>지금 연 璉 (고구려 20대왕 장수왕

고거련 高巨連 의 다른이름)은 죄를 지어

나라가 스스로 남에게 잡아 먹히게 되었고

國自魚肉 국자어육 (나라가 스스로 물고기 고기가 되었고,

어육은 생선 이외에도 아주 짓밟아서 결딴냄의

비유적 표현이라고도 합니다)


대신과 호족들의 살육행위가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장수왕이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자

국내성계 귀족들의 내부반발,

정치적 혼란이 심했던 거로 보입니다)


그들의 죄악은 넘쳐나서

백성들을 뿔뿔이 흩어지고 있으니

지금이야말로 그들이 멸망할 시기로서

폐하의 힘을 빌릴 때입니다


또한 풍족의 군사와 군마는

집에서 키우는 새나 가축이 주인을 따르는 것 같은

심정을 가지고 있고

낙랑의 여러 군은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니

(고구려는 중국인들이 조선,고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땅에 세운 식민통치기관인 낙랑군을 몰아냈습니다

요즘 시각으로 보면 개로왕이 고구려와

옛 조선땅을 중국에 팔아 넘기려 하고 있고

상당히 못난 행위를 하는 거로 보이고

당시에도 그리 썩 좋은 왕이라는 평은

받지 못했을 거 같습니다,,

백제와 고구려는 애초에 다른 나라라는

주장도 할 수 있겠으나

위에서 개로왕이 같이

부여에서 나왔다고 말한거같이

엄연히 고구려와 백제는 같은

조선과 부여의 후예였습니다)


황제의 위엄이 한번 움직여

토벌을 행한다면

전투가 벌어질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저는 비록 명민하지는 않으나

힘을 다하여

우리 군사를 거느리고

위풍 威風 (위세가 있고 엄숙하여 쉽게 범하기 힘든 풍채나 기세)

을 받들어 호응할 것입니다


또한 고구려는 의롭지 못하여

반역하고 간계를 꾸미는 일이 많으니

겉으로는 외효(이리저리 달라붙은 기회주의자 중국인 같습니다)가

스스로 자신을 변방의 나라라고

낮추어 쓰던 말버릇을 본받으면서도

속으로는 흉학한 화란 禍亂 (재앙과 난리를 통틀어 이르는 말)

과 행동을 꿈꾸면서

남족으로는 유씨(중국남조 송나라,유씨 송나라 유송)와

내통하기도 하고

북쪽으로는 연연(몽골쪽 유목국가 유연)과 맹약을 맺어

강하게 결탁하기도 함으로써

폐하의 정책을 배반하려 하고 있습니다


(고구려는 북조였던 위나라,북위와만 외교관계를

가진 것이 아니라

북방의 유연과 남조였던

송나라와도 관계를 맺었습니다

즉 개로왕은 위나라 황제에게


'고구려는 너네 말고도 너네 남,북쪽 모두와

관계를 맺고있으니 우리 백제랑 잘지내야 됨 !'


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옛날 요임금은 지극한 성인이었으나

단수에서 전투를 하여

묘만을 벌 주었으며

맹상군은 어질다고 소문이 났었으나

길가에서 남을 꾸짖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중국 사례들)


작게 흐르는 물도

일찍 막아야 하는 것이니

지금 만약 고구려를 치지 않는다면

앞으로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지는 경진년 후에

우리나라 서쪽 경계의

소석산 小石山 북쪽 바다에서

10여 구의 시체를 보았고

동시에 의복,기물,안장,굴레 등을 얻었는데

이를 살펴보니

고구려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후에 들으니

이는 바로 황제의 사신이 우리나라에 오다가

고구려가 길을 막았기에

바다에 빠진 것이라 합니다


비록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매우 분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옛날 송나라가 신주를 죽이니

초장왕이 맨발로 다녔으며

새매가 풀어준 비둘기를 잡아 요리를 하니

신릉군이 식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중국 사례들)


적을 이기고 이름을 세우는 것은

대단히 아름갑고 훌륭한 일입니다


작은 변방도 오히려 만대의 신의를 생각하는데

하물며 폐하께서는 천하의 기를 모으고

세력이 산과 바다를 기울일 수 있는데

어찌 고구려와 같은 애송이로 하여금

豈令小竪 기령소수 (소수 小竪 는 더벅머리 어린애, 애송이)


황제의 길을 막게 합니까


이제, 북쪽 바다에서 얻었던 *안장을 바쳐

증거로 삼고자 합니다


(*안장 고구려에서 배에탄 북위의 사신들을

죽였고 떠밀려온 말 안장이 그 증거라고

말한 개로왕으로, 고구려에 대한 모함이거나

실제 있었던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뒤에 나올 이야기에서

북위측에서 확인해 보니

그 안장은 중국의 것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설령 중국의 것이었다고 해도

북위는 당시 강대국이었던 장수왕 시기의

고구려와 싸우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고 합니다,,)


<라봉봉>절박한 개로왕의 심정과

다소 정치와 국제 정세에는 어두웠던 그의 모습들이

생각되는거 같습니다,,


개로왕이 위나라(북위)에 보낸 이 표문은

짧은 백제 기록에서도

길고 긴 내용 이외에도

조선시대에도 이야기되며

상당한 명문으로 꼽혔고


이는 중국역사에 대한 백제인들의 인식과

논리 전개 등 당대 백제인들의 학문 소양을

알려주고 백제인들이 직접남긴 문학들이

적은 상황에서 귀한 기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백제 21대왕 개로왕은 조선시대로 치면

조선 14대왕 선조가 생각납니다,,

조선 선조도 백제 개로왕같이 글과 시에 능하고

학문적 소양이 깊었던

선비적인 왕으로 유명했으나

왕이라는 자리는 단순히

글만 잘쓰는 선비,

사대부적 소양만 있어서는 안되고

선비들 중의 선비로서

선비와 백성들 모두를 이끌어야 하는

무거운 자리인데


안타깝게도 백제 개로왕과 조선 선조는

비록 시와 글,문학적 표현에는 능했을 지 몰라도

이는 당대의 국제 질서와 관련된

백성들과 국가의 운명이 걸린

거대한 외교적 상황이었고


단순히 글만 잘쓴 유약한 선비적

모습만으로는 안됬고

당대의 국제 정세에 밝고

백성들의 안위를 살피는

지도자,왕적인 모습을 보여줘야 했으나

그러지 못했던 두 왕은

결국 고구려 장수왕에게 백제수도 한성함락(개로왕)과

임진왜란으로 일본에게 조선수도 한성함락(선조)라는

치욕,굴욕적인 결과로 이어지게됬고

개로왕의 한성과 조선시대 수도 한성은

같은 오늘날 대한민국 수도

서울특별시 지역이라 할 수있기에

요즘말로 평행이론이라는 말 같이

서로 닮아있다고 할 수 있는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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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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