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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백제 21대왕 개로왕이 보낸

표문,편지를 읽은 위나라 황제 현조는,,


<위나라 현조>(흐음,, 고구려도 강국인데,,

그래도 백제도 고구려를 견제할 수는 있으니

잘 지내서 나쁠건 없겠지,,)

백제국 사신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위험을 무릎쓰고 조공을 바쳤구려,,


백제국 사신들을

융슝하게 예의를 다해 대접하고

백제 사신들이 돌아갈때

사신 소안을 같이 보내서 그들과

교류하게 하라 !


위나라 현조가 백제의 사신이

멀리 떨어진 곳에서

위험을 무릎쓰고 조공을 바쳤다 해서

융슝하게 예우하고

사신 소안으로 하여금

그들을 데리고 백제로 가게했습니다


이때 조칙을 내려서 말했습니다


<위나라 현조의 조칙 詔勅 (조서, 임금의 명령을 적은 문서)>

글을 받고

아무 일 없이 지낸다는 말을 들으니

매우 기쁘다


그대가 동쪽 한구석

5복 五服 의 밖(중국 다섯구역 변방)에 있으면서

산과 바다를 멀리 여기지 않고

위나라 조정에 정성을 바치니


그 지극한 뜻을 가상히 여겨

가슴 속에 기억해 두리라


내가 만대에 누릴 위업을 계승하여

사해에 군림하면서

모든 백성들을 다스리니


이제 나라는 깨끗히 통일되고

8방에서 귀순하기를 위하여

어린아이를 업고

이 땅에 이르는 자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평화로운 풍속과

성대한 군사는

여례 餘禮 (개로왕이 보낸 백제왕족 부여례,외교관)

등이 직접 듣고 보았다


그대는 고구려와 불화하여

여러 번 침범을 당하였지만

만일 정의를 따르고

어진 마음으로 방어할 수 있다면

원수에 대하여 무엇을 걱정하겠는가


이전에 사신을 파견하여

바다를 건너 국경 밖의

먼 나라를 위무하게 하였으나


그 후 여러해가 되도록

가서는 돌아오지 않으니


그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또는 그곳에 도착했는지

도착하지 못했는 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대가 보낸 안장을

예전 것과 비교하여 보니

중국의 산물이 아니었다

(진짜 아니었거나 고구려의 눈치를봐서

아니라 덮었을 수도 있다는거 같습니다)


의심되는 일을 사실로 단정하는

과오를 범할 수는 없는 일이니


고구려를 침공할 계획은

별지에 상세히 밝힐 것이다


이 조서에서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어지는 위나라 현조의 조칙,조서>

이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도다


즉, 고구려는 국토의 지세가 험하다는 사실을 믿고

그대의 국토를 침범하였으니


이는 자기 선대임금의 오랜 원한을 갚으려고

백성들을 편안케하는 큰 덕을 버린 것이다


전쟁이 여러 해에 걸쳐 이어지니

변경을 단속하기 어려울 것이나


그리하여 사신은 신포서 申包胥 (중국 초나라인,

초나라가 오나라 침략에 위태롭게 되자

신포서가 진나라에 들어가서

궁중뜰에 앉아서 진나라 애공에게

구원병을 요청하며

7일동안 먹지도 않고 울며

초나라의 절박한 상황을 호소하자

애공이 그의 정성에 감동해서

구원병을 보내서 초나라를 도와서

안정시켰습니다)


의 정성을 겸하게 되고

나라는 초,월(초나라와 월나라로

옛 중국 비유같습니다)과

같이 위급하게 됬으니

이제 마땅히 정의를 펴고

약자를 구하기 위하여

기회를 보아 번개처럼 공격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는 선대로부터

번방의 신하로 자처하며

오랫동안 조공을 바쳐왔다


그들 스스로는 비록 이전부터

잘못이 있었으나


나에게는 명령을 위반한 죄를

지은 일이 없다


그대가 처음으로 사신을 보내와

그들을 곧 토벌하기를 요청하였으나

사리를 검토해봐도

토벌의 이유가 또한 충분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지난해에

예 등을 평양에 보내

고구려의 상황을 조사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가 여러번

주청 奏請(임금에 아뢰어 청함)

하고


그 말이 사리에 모두 맞으니

우리 사신은 그들의 요청을 막을 수 없었고


법관은 그들에게 죄명을

줄만하지 못했던 바


그들이 말하는 바를 들어 주고


예 등을 돌아오게 하였다


만약 고구려가 이제 다시

명령을 어긴다면

그들의 과오가 더욱 드러날 것이므로

뒷날 아무리 변명을 하더라도

죄를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니

그렇게 된 연후에는

군사를 일으켜 그들을 토벌하더라도

이치에 합당할 것이다


모든 오랑캐 나라들은

대대로 바다 밖에 살면서

왕도가 창성하면 번방 신하로서의 예절을 다하고

은혜가 중단되면 자기의 영토를 지켜왔다

따라서 중국과 예속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예전의 법전에도 기록되어 있으며


호시(싸리나무 화살)를

바치는 일은 세시(설날,새해의 처음)에 그쳤다

楛貢曠於歲時 고공광어세시

(=싸리 나무 화살 공물은 때가 되도 보내오지 않았다,

싸리나무화살은 동이족,고구려와

특히 숙신[말갈]이

만들던 주요 물품이었다고 합니다

매우 성능이 뛰어나서 고구려에서

중국에 수출됬습니다,,

북방의 추운지역에서는 대나무가 안자라서

싸리나무로 화살을 만든거 같고

매우 강력했던 한국인들의 전통화살입니다


한국에서 활을 가장 잘 쏜 인물인

고구려 건국왕 주몽 이외에

조선 건국왕 이성계도 강력한 활을 쓰는거를

좋아해서 대나무 활이 아닌

이 싸리나무 화살을 썼다고

용비어천가에 나오고 이는

고구려의 호시,싸리나무 화살이

고려를 거쳐 조선대까지 이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반대로 남방의

신라와 백제는 기후가

질좋은 대나무가 자라기

적합했기에 대나무 활인 죽전이

사용됬습니다)


그대가 강약에 대한 혀세를 말하였으며

지난 시대의 사실들을 모두 열거하였지만,

풍속이 다르고 사정이 변하여

무엇을 주려 하여도

나의 생각과 맞지 않는다


우리의 너그러운 규범과

관대한 정책은

아직 그대로 남아있다


이제 중국은 통일 평정되어

나라안에 근심이 없다


이에따라 매번 동쪽 끝까지

위엄을 떨치고

국경 밖에 깃발을 휘날려


먼 나라의 굶주리는 백성을 구원하며

먼 지방까지 황제의 위풍을 보이고 싶었다


그러나 사실은 고구려가 그때마다

진정을 토로하였기 때문에

미처 토벌을 도모하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 그들이 나의 조칙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대의 계책이

나의 뜻과 맞으니


큰 군사가 토벌의 길을 떠나는 것도

장차 멀다고는 할 수 없다


그대는 미리 군사를 정돈하여

함께 군사를 일으킬 수 있도록

준비할 것이며


때에 맞추어 사신을 보내

그들의 실정을 즉시 알 수 있도록

해야할 것이다


우리 군사가 출동하는 날


그대가 향도 鄕導 (길잡이, 앞잡이)의 선두가 된다면

승리한 후에는

역시 가장 큰 공로로 상을 받게 될 것이니

이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그대가 바친 포백 布帛 (베와 비단을 아울러 이르는 말)과

해산물은 비록 모두 도착하지는 않았으나

그대의 지극한 성의는 잘 알겠도다

이제 별지와 같이 내가 여러가지 물품을 보내노라


(위나라 현조의 말을 요약하면

고구려를 공격하자는

너네 백제뜻도 알겠으나

고구려가 강하니 일단 기다려 보자는

뜻 같고

당시의 복잡했던 외교정세들이

보여집니다)


또한 고구려왕 연 璉 (거련,고구려 20대왕 장수왕의 이름)에게

조서를 보내 소안 등을 백제로 보호하여

(고구려를 거쳐가는 육로로)보내도록 했습니다


(이 글이 적힌 위나라 현조의 답장은

고구려를 거쳐서 육로로

백제에 보내질 예정이었으나

고구려에서 위나라 사신들이

백제로 가지 못하도록 길을 막아버렸고

개로왕은 기다려도 답장이 없자

북위에 더이상 사신을 보내지 않게됩니다,,)


그렇게 위나라 사신들이

고구려에 당도하자,,


<장수왕>짐은 백제 부여경(개로왕)의

공격을 받았기에 백제로 가는 길을

내어 줄 수가 없소


<위나라 사신들>(아,, 고구려 왕은 왜이리

무서운거냐,, ;;) 아,, 길을 내어주면 안되겠소 ?

우리 황제 폐하의 조서요,,


<장수왕>안됩니다 돌아가십시요


<위나라 사신들> ;;;;;


(위나라 현조의 답장을 백제에 전하러 간

위나라 사신)소안 등이 고구려에 이르자

연(장수왕)이 예전의 여경(부여경, 개로왕의 이름)과

원수를 진 일이 있다하여

그들을 동쪽으로 통과하지 못하게 하므로

소안 등이 모두 돌아가니

위나라에서는 곧 고구려왕에게

조서를 내려서 엄하게 꾸짖었다고 합니다,,


<위나라 사신>고구려왕 연(장수왕의 이름 거련의

또다른 이름)은 어찌 그리 무례한가 ?

감히 황제의 사신을 가로막고

오랑캐의 도를 행하며

어찌 중국의 천하에 편입되지 않으려는가 ?


라고 우리 황제께서는 엄중하게 질책하셨소 !

(나는 황제의 말을 전했을 뿐이야

죽이지마 ;;,,)


<장수왕>무슨 말인지는 잘 알겠으나

우리는 위나라에 정성껏 조공해왔으며

단지 백제는 우리를 공격한 적국으로서

그 길을 내어줄 수가 없다한 것이오

황제께 우리의 뜻을 헤아려 주시기를

바란다고 전하시오,,


<위나라 사신들>끄응,, 알겠소이다,,

(논리가 완벽하고 빈틈이 없군,,

현재 고구려왕은 무서운 자이니

빨리 돌아가야지,,)


,,


<고구려 신하들>태왕 폐하 !

백제가 위나라를 움직여서

우리를 공격하려 한거 같습니다 !!

빨리 백잔(잔인한 백제,백제 오랑캐로

고구려에서 백제를 욕하며 부르던 말)

녀석들을 짓밟아 버려야 합니다 !!


<장수왕>짐 역시

봐주는 것에 한계에

달했다 !


잔주 殘主 (백잔의 주인,백제왕)가 선대의

은혜를 저버리고 죽으려 발악을 하는구나 !

내 반드시 그들을 반드시 멸족하리라 !


백제 개로왕이 위나라에 보낸 문서도

상당히 고구려를 자극하고

열받게 하는 내용이었고

그렇게 장수왕은 위나라와 내통했던

백제를 공격할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당시 장수왕대의 고구려는

위상이 엄청나게 높아서

중국 북조와 남조에서는 서로

장수왕의 직위를 경쟁하듯 높여주며

백제보다 높이 대우하던 시기였고

장수왕대는 고구려 최전성기로

매우 강력했던 시기였는데

이 일로 백제 개로왕이 장수왕에게

요즘말로 크게 찍히게 된거 같습니다,,


그 후에 위나라에서는

소안 등으로 하여금

동래를 출발해서

바다를 건너가서

여경(부여경, 개로왕의 이름)에게 조서를 줘서

그의 정성과 절조를 표창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소안등이 바닷가에 이르자

바람을 만나서 표류하다가

끝내 백제에 도달하지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개로왕>위나라에서 답장은 언제 오는 것이냐 ?


<백제신하들>글쎄요,, 시방(곧)

올때가 됬는데

왜 안오는 것이쥬,, (백제지방이었던 충청도 사투리)


<개로왕>(인성폭발)하,,

그냥 위나라에 조공 끊고

앞으론 신라랑 친하게 지내도록 하라 !


<백제신하들>어라하(왕) !

그래도 시방(아니) 위나라와의 관계는,,


<개로왕>다 필요없다 !

주변에 도움되는 놈들이 하나도 없군,,

너희는 모두 물러가거라 !


<백제신하들>,, 어라하가 미쳤군,,

앞으로 백제가 어찌될런지,,


개로왕은 고구려가

자주 변경을 침범한다 해서

위나라에 표문을 올려서

군사를 요청했으나

위나라에서는 듣지 않았습니다


개로왕이 이를 원망해서

마침내 조공을 중단시켰습니다


<라봉봉>고구려 20대왕 장수왕은 외교에 능했던

왕이었고 아버지 고구려 19대왕, 한국사의

위인인 광개토대왕의 아들 못지않게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는 표현같이

머리가 좋았던 훌륭한 왕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유능한데 아들이 무능한 사례를 빗대어

호부견자 虎父犬子,

호랑이 아버지에 개의 자식 이라는

표현이 있으나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은

호랑이 아버지에 호랑이 자식,

호부호자 虎父虎子였고 (비슷한 예로는

고구려 건국왕 동명성왕 고주몽의 아들

백제 건국왕 온조왕 부여온조)


당시는 세계 초강대국이었던

중국도 고구려 눈치를 보던 시절

(과장이 아니라 실제상황으로

한국인들이 한국역사인

고구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을 자랑스러워 하는 이유입니다)인데

가뜩이나 안좋았던 백제상황에서

이 사건으로 장수왕을 더 자극하게 되서

이후 백제는 거의 나라가 뒤집어져서

멸망 직전까지 가게됩니다,,


나름 위나라 현조도

백제 개로왕의 글이 마음에 들었는지

고구려가 또 크기에

나름 크게 도와주지는 못해도

잘 지내자는 의미로 사신을 보낸거 같은데

육지길은 장수왕이 막고

바닷길은 바람이 막아서

여러 상황으로 꼬여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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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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