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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전설의 전투이자

백제 700년 왕조 마지막 전투라고 할 수 있었던(물론 이후에도

전투가 있었고 백제 부흥군도 있었지만

사실상 마지막 백제군의 승리이자 패배라 할 수 있었습니다)


백제 계백 장군과 신라 김유신 장군의 전투인

황산벌 전투 이야기는

삼국사기 의자왕 기록에는 간략하게 나와있고

삼국사기 개인 이야기인 '열전'에

백제 장군 계백이나 신라 화랑 관창의 개인 이야기인

'계백 열전'이나 '관창 열전'에 자세히 나와있고

반굴보다 먼저 죽었던 신라 화랑 반굴의 아들이었던

'김영윤 열전'과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 태종 무열왕(김춘추) 기록에도

남아있어서 먼저 황산벌 전투의 주인공이며

백제의 충신,명장이고 그리고 한국사의 위인인

백제 계백 장군 이야기부터 쓰겠습니다,,


<백제 마지막 충신 계백 장군의 오천결사대>


계백 階伯


계백은 (階伯 계백)

백제인입니다 (百濟人 백제인)


(계백은) 벼슬해서 달솔 達率 (백제 1등 벼슬, 1품 벼슬은

좌평인데 달솔은 2품이고 정원이 30명이었고

6명 정원의 좌평만큼은 아니었어도

계백장군이 고위관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되었습니다


당나라의 현경 顯慶 (당고종의 두번째 연호) 5년

경신 (660년)에


당고종이 소정방(당나라 장수)을

신구도대총관으로 삼아

군대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

신라와 더불어 백제를 칠 때


계백은 장군이 되어서

결사대 5천명을 뽑아

이를 방어하면서 말했습니다


<라봉봉>여기서 5천 병력은

백제 방군성 체제에서

중앙 5방의 주둔군 1천병력의 합 즉

5 x 1000 = 5000 과 일치하는데

백제왕실이 직접 동원할 수 있는

군대의 수가 황산벌에 투입된 병력의 숫자와

일치한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고 합니다


이는 백제 왕실에서 직접 동원할 수 있는

최대 병력이었고 백제군중에서

최정예 병사 5천명을 동원했다고 할 수 있는데

문제는 백제 계백 장군이 5천 결사대로

황산벌에 나설때 신라 김유신 장군은 5만 군대였고

숫적 열세가 10배가 됬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적들이 백제를 멸망시키려 코 앞까지 와있었던

상황에서도 백제 왕실과 백제 귀족들과의

갈등이 있었고 백제 귀족들은 국가 멸망 직전의 상황에서도

자신들의 사병이라 할 수 있었던 병사들을

내놓지 않았다고 할 수 있고

이는 의자왕이 충신들을 죽이거나 감옥에 가두고

(성충과 흥수는 무려 좌평이었습니다,,)

자신의 아들들을 무려 41명이나 좌평에 임명하고

식읍(땅)을 줬는데,,


(좌평이 명예직이었다 해도 백제 귀족층 내에서 반발이

심했을 것이고 식읍까지 줬으며 또 자식을

그것도 아들,서자만 세도 자식을 41명씩이나 낳았다는 것

[딸을 낳았을것도 생각하면

자식의 수가 더 많았을거 같습니다,,]도

백제 말기 왕실의

여러 문제점과 모순들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백제 귀족들은 군사를 낸다는게

자신들의 영지의 백성,사병들을 내어야 되는것이기 때문에

이전부터 오랜 신라와의 전쟁에서 소모되고 죽어간

자신들의 재산과 사병 들을

더이상 나라를(백제 부여씨 왕실을) 위해 내어주지 않게 된 것

같습니다,, 게다가 가뜩이나 백제는

왕의 권한보다 신하들의 권한이 쎘고

이미 돈이나 명망이 좀 있던 신하들은

왜(일본)에 부동산이 있거나 나라가 망해도

금방 도망칠 출구등도 마련해 놨을 거 같고


그렇게 무왕때 다져진 강력한 왕권들은

의자왕대에 이르러 점차 소모되다가

멸망 당시에는 모든 백제 귀족들이 등을 돌리게 된

사태까지 이어진게 아닐까 싶습니다,,


이는 오늘날 보기에도 의미심장한게

나라가 부패하고 후진적이면

일단 기득권이라 할 수 있는 세력,부자들은

자녀들을 외국으로 보내거나

외국에 부동산을 사놓거나 하면서

나라에 위기가 들면 언제든지 외국으로 탈출할 출구를

마련해 놓는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힘없고

연줄없는 백성들에게 돌아간다고 할 수 있고

예나 지금이나 이런것은 (나라에 망조가 들면)

반복되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작 나라가 없어지면 부자,가난한 자 할 거 없이

나라없는 백성들의 대우,최후가

어떻게 됬는지는 역사서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고구려 장수왕은 의탁해온

연나라 황제를 죽였고, 러시아 혁명으로

몰락한 러시아 귀족들은 유럽으로 이주했는데

유럽에서는 이주해온 러시아 귀족들의 재산을 탕진시키려했고

러시아 귀족들은 유럽에서 재산을 탕진하고 자살했다고 합니다,,

또 일제강점기 조선인 친일파들이 잘살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친일파들은 돈은 얻고 신뢰와 인망을 잃었기에

생존기간내내 암살위협등에 시달리며 살아야했습니다,,)


또 외국에 돈을 쓰는 여행,관광객의 입장으로 나가는 것과

외국에 귀화를 하려 하거나

돈을 벌러 노동자의 입장으로 나가는 것의 처우,대우도

다를것입니다,,


다시 백제 이야기로는,,

많은 백제인들은 왜 倭 (일본)에 많은 영향을 주며

왜 지역에 기반을 두고 있었을 거고

이에 백제 멸망 이후에 집단적으로 왜에 이주하며

백제인들은 얼마후 왜 지역에 '일본 日本' 이라는 나라를

탄생시키게 됩니다,,

공식적으로는 일본 내부에서 스스로 국호를 바꿨다고 하나

왜 倭 는 중국인들이 일본을 부르는 말이었는데

일본인들 스스로도 왜국이라 칭하다가

백제 멸망 후 곧 왜 倭 가 일본 日本 이라는 이름으로

국호를 바꿨다는 것은 백제인들이 이전부터 오랫동안

왜의 성장에 깊은 관여를 했기에

백제인들이 일본 건국에 깊게 관여했다고 할 수 있고

의미심장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계백장군 이야기로는,,

그럼에도 백제 계백장군은 다른 귀족들과 달리

이 승산없는 싸움에

5천 결사대를 이끌고 나갔고

애초에 신라 명장 김유신 장군의 5만 군대에 앞서

승산이 적거나 없었음을 알았을 것임에도

백제 계백 장군은 백제 마지막 명장이자 충신으로서

나라를 위해 몸바쳐 싸웠고

오늘날 그가 한국사의 위인으로

이야기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라가 멸망할때 이미 대세는 기울었지만

끝까지 항복하지 않으려 했던 신라 마의태자가 있었기에

1000년 신라왕조가 덜 부끄러웠다고 이야기 되듯이


이미 대세는 기울어졌음에도

사회 지도층은 대세의 유무에 상관없이

자신들의 의식주와 온갖 귀한 것들을 제공해주는

자신들의 백성들에게 끝까지 책임을 다해야 하는데

모두가 도피하거나 도망치던 백제 귀족층 내부에서

2품 벼슬이었던 계백장군은 끝까지

충의와 절개를 지킨 인물이었기에

백제가 멸망했을때도

700년 백제왕조가 덜 부끄러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계백 장군의 이야기는 다음 이야기에

이어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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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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