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백제 계백 장군의 이야기 중심,

백제 중심으로 황산벌 전투 이야기를 썼는데

황산벌 전투는 백제 신라 양국의 존망,운명을 건 대전이었기에

여러 기록에 기록되있고

신라측 기록에 자세히 나와있습니다

이번엔 신라측 기록인 태종무열왕의 기록을 먼저 보겠습니다,,


<황산벌에서 백제 계백장군에 맞섰던 신라 화랑 반굴과 관창>


태종무열왕 7년(660년)

7월 9일 가을

유신(신라 김유신 장군) 등이 황산벌로 진군했습니다


백제 장군 계백은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먼저 중요한 지형을 차지하고

세 곳에 군영을 설치한 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유신(김유신) 등은 군사를 세 갈래로 나누어

네 번 싸웠으나 승리하지 못했고

(신라)병사들도 기진맥진 했습니다


그러자 장군 흠순이 그의 아들 반굴 盤屈 에게,,


<김흠순>신하가 되어서는 충성이 제일이요,

자식이 되어서는 효도가 제일이니

이러한 위기를 당하여 목숨을 바친다면

충성과 효도를 모두 다하는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반굴이 대답하기를,,


<김반굴>삼가 분부 말씀을 알아 들었습니다


라고 말하면서


곧 적진(백제군 진영)으로 달려들어서

최선을 다해서 싸우다가 전사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좌장군 품일이

아들 관장 官狀 을 불러서


<김부식>관창 官昌 이라고도 한다(현재는 아무래도

관장보다는 관창으로 유명한 인물입니다)


말 앞에 세우고

여러 장수들에게 보이며 말했습니다


<김품일>내 아들이 나이가 겨우 열 여섯이지만

기백이 자못 용감하다


(관창) 네가 오늘 전투에서

삼군 三軍 의 모범이 될 수 있겠는가 ?


관창은


<김관창>예 !


라고 말하고는

갑옷을 입고 말을 탄 채,

창 한 자루를 들고

적진에 달려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적군(백제군)에게 생포되어

산 채로 계백(백제 장군)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계백이 갑옷을 벗겨보고

그의 나이가 어림에도 불구하고

용감한 것을 가상하게 여겨서

차마 죽이지 못하고

탄식하면서 말했습니다


<계백>신라와는 대적할 수 없겠구나

(실제 지휘관이 함부로 이런 말을 하면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질거 같은데

약간 백제 멸망 후 신라측에서 신라를 높이려

기록을 조작한 느낌도 있습니다)


소년도 오히려 이런 정도이니

황차(하물며) 장정들은 어떻겠는가 !


계백 장군은 그를 죽이지 않고

돌려보냈습니다


관창이 아버지(김품일)에게 말했습니다


<김관창>제가 적진에 들어가서

장수의 목을 베지 못하고

깃발을 뽑아오지 못한 것은

죽음이 겁나서가 아닙니다


관창은 말을 마치자

손으로 우물물을 떠 마시고

다시 적진(백제군 진영)으로 나아가

힘차게 싸웠습니다


<계백>분명 이는 김유신이

화랑들을 죽음으로 내몰아

신라군의 사기를

끌어올리기 위함이기에

내 저 소년을 죽이지 않았으나

또다시 왔으니 이번에는 어쩔 수 없구나


관창의 목을 베어 예의있게 돌려 보내거라 !


계백은 그(관창)을 붙잡아

머리를 베어서

말안장에 매어 보냈습니다


품일이 그 머리를 쳐들자

피가 흘러서 소매를 적셨습니다,,


그는,,


<김품일>내 아들의 얼굴이 살아있는 것 같구나

나라를 위하여 죽을 수 있었으니 다행이로다 !


라고 말했습니다


(신라)삼군의 군사들이

이를 보고

비분강개 悲憤慷慨 (슬프고 분한 느낌이 마음속에 가득 차 있음)해서

죽음을 각오하고

북을 치고 함성을 울리며 진격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백제 군사들은 대패했고

계백 장군도 전사했으며


(백제) 좌평 충상, 상영 등 20여 명이 포로가 되었습니다


-삼국사기 태종무열왕 중에서,,-


<라봉봉>신라군은 반굴과 관창 이전부터

꾸준히 자살돌격을 시켜서 신라군의 사기를 끌어올리는 방법을

사용했는데 결국 황산벌 전투에서

반굴과 관창이라는 두 신라 최명문가 자제들의 자살돌격이

(반굴은 김유신 동생 김흠순의 아들, 관창은 김품석 동생 김품일의 아들이고

모두 신라 최고 지휘부 자제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정점을 찍었다고 할 수 있고

이는 신라 지휘부 역시 몸사리지 않고 처절하게 싸웠다고

해석 할 수도 있겠으나

다르게 본다면,,

처음엔 백성이나 부하들을 자살돌격 시켜서 죽음으로 내몰고

사기를 올리는 방법을 사용한다면

점점 더 강한 집안 자제들의 죽음이 있어야

효과가 생기고 소위 '약발'이 먹히게 되는 것이고

(더 강한 [나쁜]자극을 원한다는 것에서 마약과 비슷하겠습니다,,)


결국 총 지휘부 자제들까지 가야 신라군의 결집을 이끌어낼 수 있었기에

결코 좋은 방법은 아니었고

이 방법은 백제 멸망을 알린 전투인 황산벌 전투가 정점을 찍었다고 할 수 있는데

점차 자살돌격이 일반 백성,귀족에서 왕실과 관련있는 인물들까지 갔다는 것은

잘못된 정치가 처음엔 일반 소시민,국민들이 피해를 보나

결국 그 피해가 정치를 실행했던 정치가 자신들에게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은

이런 자살돌격 이외에도 역사에서는 여럿 있어왔고

(세계 2차대전 독일과 일본 지휘부에서는

병사들을 죽음에 내몰았으나 결국 최종적으로는

지휘부들 역시 전범재판에서 사형당했습니다,,)


이 황산벌 전투에서 신라 최 명문가였던 반굴과 관창의 죽음은

다르게 보면 정말 의미심장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김품일은 아들 관창이 결국 목이 베어져서

돌아 온것을 보고 아들의 머리를 들고


'나라를 위해 죽을 수 있었으니 다행이로다'


라고 했지만

실제 그의 심정은 아들의 죽음에

차마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결국 신라 군사들은 기존의 자살돌격에는

장수들의 죽음에 분발했다거나 감격해서

사기가 올라 공격해서 이긴다고들

나오나 점점 이렇게 수위가 높아지자

황산벌 전투에 이르러서는


'비분강개 悲憤慷慨' 즉 '슬프고 분한 느낌이

마음속에 가득 차있음' 이라는 표현으로

바뀌게 됬고

황산벌 전투는

당대 백제인들도 신라인들도 모두

같은 동족 同族 (한국인 韓國人)이자 

모두 양국의 존망과 국운을 걸었던 전투였기에

어느 한쪽도 결코 물러섬이 없었고

이에 복잡하고 혼란한 감정들이 얽혀서

양국 병사들의 마음은 서로 착잡하고

슬프고 분한 느낌으로 가득차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반응형
Posted by 라봉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