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나당연합군에 패퇴한 의자왕, 의자왕의 두명의 태자>


그렇게 한국사의 역사적인 전투였던

백제, 신라 양국의 존망과 운명을 건 전투였던

황산벌 전투가 백제 계백 장군과 5천 백제 결사대의 궤멸,

신라 김유신 장군과 5만 신라군의 승리로 끝났는데

황산벌 전투에서 용맹하게 싸우다 전사한

신라 화랑 반굴과 관창의 개인 이야기,

'김영윤(반굴의 아들)열전, 관창 열전'은

저번에 쓴 '삼국사기 태종무열왕' 기록과

비슷한게 많기에 나중에 쓰기로 하겠고

다시 백제 의자왕 이야기로 돌아가서,,


그렇게 황산벌 전투로 백제군 최종 육지 방어라인 뚫리게 됬고

신라군에게 남은 곳은 백제의 수도 사비성이 남게 되었습니다


'삼국사기 의자왕' 기록에서


(계백 장군이 황산벌에서 신라 군사와)

4번 싸워서 모두 이겼으나

군사가 적고 힘이 모자라서

마침내 패하고

계백이 사망하였다'


의 다음 기록에는,,


이에 의자왕은 군사를 모아서

웅진 어귀 (드나드는 목의 첫머리)를 막고

강가에 주둔시켰습니다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강 왼쪽 언덕으로 나와서

산 위에 진을 치니

그들과 싸워서

아군(백제군)이 크게 패했습니다


이 때 당나라 군사는

조수가 밀려오는 기회를 타고

배를 잇대어

북을 치고 떠들면서 들어오고

소정방은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곧장 진도성 30리 밖까지 와서 멈추었습니다


우리(백제) 군사들이 모두 나가서 싸웠으나

다시 패배해서

사망자가 1만여 명에 달하였습니다,,


(당시 백제를 멸망시키려했던 나당연합군에서

신라군은 5만

당나라군은 13만이었고

백제 계백장군은 5천 군사로

5만 신라 군사를 막아내야 했기에

군사를 내지 않았던 백제 귀족들의 비협조도 있었겠지만

아무래도 당나라군이 신라군보다 더 많았기에

백제군은 사망자만 1만여명이라는 기록같이

더 많은 군사들을 당나라군 방어에 집중시킨거 같습니다)


당나라 군사는 승세를 타고

성으로 육박했습니다


의자왕이 패망을 면할 수 없음을 알고

탄식하며 말했습니다


<의자왕>성충의 말을 듣지 않다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 후회스럽구나


의자왕은 마침내 태자 효(부여효)를 데리고

북쪽 변경으로 도주했습니다


<라봉봉>부여효라는 인물이

태자였냐는지는 여러 학설이 있다고 하고

중국 기록에서는 백제 태자를 한결같이 부여융이라하고

이렇게 삼국사기에서는 부여효라고 하기에

여러 학설이 있다고 하는데


저의 생각에는 일본의 개혁가인 쇼토쿠 태자가

태자 太子 라는 호칭이 있는데

일본에서는 이 태자 太子 라는 말이

차기 황위계승자라는 말로 직계 후손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사용된다고 하고

일본의 제도 등은 백제의 영향을 받았기에

태자가 여러명이어도 이상할게 없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아직까지 저같은 해석은 없는거 같으나

실제 백제는 밖으로는 왕을 칭하기도 하나

내부적으로는 황제를 칭하는 '외왕내제'의 황제국이었고

왕족들이 왕 王 에 봉해지기도 했으니(예로들면 백제에서

파견되서 왜 倭 , 일본을 경영한 곤지왕)

우리측 사서에는 없지만

중국,일본 역사서,이야기 등에는

백제에 명예직 왕, 제후왕들이 있었기에

태자가 여러명이었다는 것

역시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라 볼 수 있겠고

또 백제 임성태자의 후손인

일본 오우치 가문(=일본 도요타 가문)의 족보에는

백제 국왕을


'백제국 마한 황제 제왕 百濟國 馬韓 皇帝 濟王 '


이라고 기록하고 있고


또 660년 백제가 나당연합군의 마지막 공격을 받을 때

웅진성 방령(지방 장관)은 예군이라는 인물이었고

웅진성에는 사비성에서 도망쳐온 의자왕이 숨어있었는데

예군 혹은 예군의 동생 예식진은 의자왕을 붙잡아 당군에 항복했고,,

(백제를 팔아넘긴 두 매국노 형제라 합니다,,)

이 공로로 당나라에서 벼슬을 하고

그곳에 묻혀서 예군은 묘지명(비석)까지 남겼는데

이 묘지명은 2011년 발견됬고

이 묘지명에는


'참제 僭帝 (주제넘을 참 僭 , 황제 제 帝 즉

의자왕을 뜻하는 말로 주제넘은 황제 혹은 분수 넘치게

황제를 칭한다 = 의자왕이라 보시면 됩니다,,

여기서는 백제 관리였던 예군 역시 의자왕을

황제라 칭했고 당대 백제인들이 의자왕을

황제라 인식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가 신하를 칭하며

그 자신의 신하들을 거느리고 입조해 조알했다'


이라 기록되있고 역시 백제에서는 멸망때까지

황제국임을 칭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별개로 예군 묘지명은 충격적인게

해석상 백제가 일본 日本 이라고 기록되있고

이때 백제는 공식 국명이고 일본은 중국

동쪽(한국)에서 해뜨는 나라라는 별칭으로 사용되다가

백제 멸망 이후 왜 倭 에서 일본 日本 이라는

국호를 사용한거로 추정한다고 합니다

실제 옛날 한국을 중국에서

해동 海東, (중국)바다 동쪽(중화사상)

이라 했는데(백제 의자왕의 별명은 해동증자)

백제인들 스스로 백제를 일본 日本 , 해가 떠오르는 곳(동쪽)이라는

백제 특유의 미의식이 있는 아름다운 별명으로

지어 불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즉 일본은 백제의 또다른 국명이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이후 할거 같고

다시 태자 이야기로 돌아가서,,


일본 제도 역시 백제의 것을 모방해서 만들었기에

'쇼토쿠 태자'나 백제에 여러 제후왕이 있었던 사례같이

백제 태자가 여러명이었을 수 도 있는거 같습니다


삼국유사에서는 의자왕이 태자 부여융과

북쪽 지역으로 달아났고

'융(부여융) 은 혹은 효(부여효)라고 하나 오류'라고 기록되어있는데


실제 태자가 2명 이상일 가능성도 있는거 같아서

오류가 아닐 수 도 있는거 같습니다,,


아무래도 오늘날에는 백제 태자를

중국 각종 기록과 삼국유사를 우선해서

부여융을 유력하게 보고있다고 할 수 있고


즉 정식태자,의자왕의 다음 후계자는 부여융이었고

부여효는 의자왕이 같이 데리고 도망친 아들로

왕자를 태자라고 부른게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실제로 왕자는 다음 왕위 계승자 이외에도

왕의 아들이라면 모두 왕자라 부를 수 있듯이

또 백제가 키운 나라였던 왜의 쇼토쿠 태자의 사례처럼

당대 백제에 백제왕(황제)의 아들,왕자들을

모두 태자라 불렀을 가능성도 있었지 않을까 싶습니다


삼국사기에서는

의자왕의 태자가 굳이 꼼꼼하게 중국측의 부여융이라는 기록과 달리

굳이 부여효라고 기록하기도 했고 의자왕 말기

부여융에서 부여효로 교체된 태자 교체설 등

의자왕의 태자설은 미궁의 이야기라 하며

또 백제 왕실 족보는 이렇게 복잡한게 많은데

의자왕이 41명의 서자에게 관직과 식읍을 주었다는 기록같이

아들들이 너무 많거나 정치의 혼란등으로 일어난 일들 같습니다,,


반응형
Posted by 라봉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