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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백제가 멸망했고

비록 백제 마지막왕 의자왕의 실정과

백제 귀족들이 왕의 말을 잘 듣지 않을 만큼

독자성이 강했어도 그럼에도 수백년간 지켜온

자신들의 나라를 한순간에 내버릴 정도는 아니었고

백제 멸망 이후에도 백제 부흥운동은 치열하게 일어났고

부흥운동 실패 이후 신라에 합병된 이후에도 옛 백제지역의

백제 귀족 유민들은 자신들이 백제인, 백제의 후손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했다고 합니다 그런 결과가 통일신라 김헌창의 난때 김헌창의 장안국에

백제 옛 영역들이 장안국에 대부분 붙어버린 것과

통일신라 말기 견훤의 후백제 건국으로 나타나게 됬습니다,,


<귀실복신과 도림의 백제 부흥운동, 백제의 또다른 마지막 왕 풍왕>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서

그렇게 백제는 700년 역사,사직의 나라 답게

곧 무너진 나라를 다시 재건하려는 부흥운동이 시작됬습니다


무왕 武王 (백제 30대왕 무왕,

백제 31대왕이자 백제 마지막왕인 의자왕의 아버지)의 조카 복신

(복신의 성은 귀실로 귀실복신입니다,,

일본의 '신찬성씨록' 에 따르면

귀실 성은 원래는 부여씨였는데 귀신의 감화를 받아서

귀실씨로 바꿨다고 합니다,,)은

일찍이 군사를 거느리는 장수였는데

이때 승려 도침을 데리고

주류성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켜서

전 임금(무왕 혹은 의자왕인데 현재는 의자왕의

5번째 아들 설이 유력하다고 합니다)의 아들로서

왜국(일본)에 인질로 가있던

부여풍 扶餘豐( 부여풍의 풍자는 豐, 豊 2개가 쓰이는데

豐= 豊 같은 풍년 풍자입니다)을 맞아서

왕으로 추대했습니다


(백제 32대왕 풍왕으로

이로 인해 백제 마지막왕이 의자왕이 아니라

풍왕이라고도 이야기 됩니다, 그러나 이미 의자왕대에

백제 중심들이 무너져 내렸기 때문에

보통은 의자왕이라 이야기 되는거 같습니다,,)


(멸망한 백제의)서북부(특히 백제의 서북부라면

백제의 수도였던 웅진[충청남도 공주시]과 사비[충청남도 부여군]이나

그 근처 지역들일 것입니다)에서 모두 이에 호응하니


군사를 이끌고 도성에 있는

(당나라 장수)유인원을 포위했습니다


(비록 백제가 멸망했지만 나당연합군은

철저히 백제 수도 공격과 백제 멸망을

목표로만 두었기에 백제 지방군들은

나당 연합군의 피해를 거의 입지

않은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특이한게 일본도 백제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주로 수도 함락,지도자의 항복 = 전쟁 끝

이라는 인식이 보편적이었는데 임진왜란때

조선 수도 한양이 일본군에 함락됬는데도 선조는 도망치고

조선은 항복하지 않고 장기전으로 갔기에

일본 장수들은 충격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물론 의자왕도 백제 멸망때 수도 사비성에서

웅진성으로 도망치기는 했으나

결국 잡혀서 당나라로 압송되고 백제가 멸망하기는 했습니다,,)


<백제 군사들>우리는 대 부여의 후예들이자

이 바다의 주인인데 어찌 700년 나라를 이대로 끝내겠는가

백제 만세 !


당나라에서는 조서를 내려서

유인궤를 검교 대방주 자사로 임명해서

왕문도의 군사를 거느리고

지름길로 신라군사를 보내서

(백제 부흥군에게 포위된 당나라 장수)유인원을 구원하게 했습니다


유인궤가 기뻐하며,,


<유인궤>하늘이 장차 이 늙은이를 부귀하게 하려는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당나라 책력(달력)과 묘휘(왕이 죽은 후에 지은 이름)를 요청하여

가지고 떠나면서


<유인궤>내가 동쪽 오랑캐를 평정하고

대당(대 당나라)의 정삭(달력)을 해외(백제)에 반포하려 한다


(즉 여기서 책력과 묘휘,정삭 등은 중국 당나라의 제도 등을

한국 백제에도 퍼트리겠다는 의미로 보면 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유인궤가 군사를 엄하게 통솔하고

이동하면서 싸우고 전진하니

복신 등이 웅진강 어귀에 두개의 목책을 세우고

그들을 방어했습니다


(목책은 나무 울타리인데

백제인들은 백제 시조, 1대왕 온조왕때부터 멸망때까지

목책을 자주 사용한거 같습니다,, 이는 일본에도 그대로 전해져서

일본에서도 백제의 양식이었던 흙성인 토성과 나무울타리 목책이

자주 사용됬고 이외에 백제 말고도 고구려,신라 한국 삼국 모두

목책을 사용했다고 하고

이후에도 고려시대에는 목책 사료가 많지가 않은데

조선시대에서는 목책에 대한 많은 사료가 있다고 합니다

이는 세종대왕때 4군 6진 설치로 영토확장이 강력히 추진되면서

변진 邊鎭 [변경을 지키는 군영]의 설치가

본격화 됬는데 자연히 목책의 설치가 많아졌다고 합니다)


<귀실복신>개로왕께서 붕어하신 후

문주왕께서는 멸망할 뻔한 백제를 다시 일으켜 세우셨는데

우리라고 그러지 못하라는 법이 없다,

백제를 다시 부흥시키자 !


유인궤가 신라 군사들과 합세하여 공격하니

우리(백제) 군사들이 퇴각해서 목책 안으로 들어와서

강을 저지선으로 삼았는데

다리가 좁아서 물에 빠지고 전사한 자만 1만여 명이었습니다,,


복신 등이 이에 도성의 포위를 풀고 물러와서

임존성을 확보하고 있으니

신라 군사들이 군량이 떨어져서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습니다,,


이때가 당나라 용삭(당고종의 3번째 연호) 원년(661년) 3월이었습니다


이 때 (백제 승려)도침은 영군장군으로 자칭하고

(백제 무왕의 조카였으며 백제 장수)복신은 상잠장군으로 자칭하며

여러 무리들을 불러 모으니

그 세력(백제 부흥운동 세력)은 더욱 확장되었습니다


그들(백제 부흥군)은 사람을 보내서

유인궤에게 말했습니다


<백제 부흥군이 보낸 사람>듣건대,

당나라와 신라가 약속하기를

백제 사람은 노소 老少 (늙은이와 어린아이)를 막론하고

모두 죽이고,

그 후에는 우리나라(백제)를 신라에 넘겨 주기로 하였다고 하니,

죽음을 기다리기 보다는

차라리 싸우다가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여

이렇게 모여 진지를 고수하고 있을 뿐이다


유인궤는 편지로 화복 禍福 (재앙과 복, 좋은일과 나쁜일)에 대해 설명하고

사람을 보내 (백제 부흥군을) 타일렀습니다


(즉 백제 부흥군도 일어났으나

나당연합군의 강성함에 눈치를 보고있었고

신라나 당나라 역시 백제 부흥군이 격렬하게

저항하면 골치아프게 되서 서로 눈치를 보며

대치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백제 승려이자 백제 부흥운동가)도침 등은

(백제 부흥운동군)군사가 많은 것을 믿고 교만해져서

유인궤의 사자를 바깥 숙소에 재우고

비웃으며 그(유인궤의 자사)에게 말했습니다


<도침>사자의 벼슬은 낮고

나는 일국의 대장이므로

함께 말할 수 없다


그(도침)는 답장을 주지 않고

그냥 돌려 보냈습니다


유인궤는 군사가 적었으므로

유인원의 군사와 합쳐서

군사들을 휴식시키면서

표문을 올려서 신라와 협력해서 공격하기를 요청했습니다


신라왕 춘추 春秋 (신라 29대왕 태종 무열왕의 이름, 김춘추 金春秋)가

당나라의 조서를 받고

장수 김흠에게 군사를 주어

유인궤 등을 구원하게 했습니다

김흠이 고사에 이르자

복신(귀실복신)이 그와 전투를 벌여

패배시켰습니다


<귀실복신>우하하 우리가 신라군을 이겼다 !

대백제국 大百濟國 만세 !


<백제 군사들>만세 ! 만세 !


김흠이 갈령도에서 도망하여 돌아간 후

신라는 감히 다시 출동하지 못했습니다,,


얼마 후에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그의 군사를 합쳤는데(백제 부흥운동의 주도권으로

내분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백제왕 풍왕은 이를 제어하지 못하고

제사만 주관했습니다


<라봉봉>위의 이야기들에 대한 이야기들은

틈틈히 썼고 풍왕이 귀실복신을 제어하지 못하고

제사만 주관했다는 기록은

풍왕은 아무래도 귀실복신 장군이

왕위에 올렸기에 정치적 실권은 없이

제사 지내기에만 집중했고


왕은 있으나 통치하지 않는다는 입헌군주제인 오늘날 일본에서

실권자인 아베총리 측에서 '일왕 역할은 기도(제사) 뿐'이라고

한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일본은 대게 한국 백제인들이

키우고 건국한 나라기에 백제와 평행이론 같은게

되게 많습니다,, 사람들의 광기도 역사를 보면

되풀이 되는거도 있기에 자세히 역사를 보면

왜 그들이 그런 광기가 있는지 물론 좋은거는 아니어도

이해가 되는거 같기도 합니다,,)


백제 풍왕은 즉 고구려 연개소문에 의해

왕위에 오른 고구려 보장왕이 연개소문의 눈치를 본거같이

백제 귀실복신에 의해 왕위에 올랐기에

복신이 도침을 살해했어도 당시엔 조용히 제사를 지내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그렇게 초기의 백제 부흥군은

역시 700년 왕조답게 쉽게 무너지지 않고

나름 분전한 모습을 보여주며

백제인들의 기대를 모았을 것이나

점점 내분 등으로 몰락해 가게 됩니다,,


귀실복신은 나름 백제 무왕계 사람으로

카리스마가 넘쳤던 무왕같이 초기에 유능한 모습으로

백제 부흥군을 이끌게 된 것으로 보이나

이런 상황에서 백제군 대장으로서

더 백제인들을 통합하는 모습들을

보여줘야 했으나 귀실복신이 도침을 죽이면서부터

백제군들은 서로에 대한 불신이 생겨난게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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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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