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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부흥군의 분열>


그렇게 백제 멸망 이후


백제 장수 귀실복신과 백제 승려 도침은

왜에 가있던 왕족 부여풍을 왕으로 추대하고

(백제 32대왕,마지막 왕 풍왕, 31대 의자왕이 보통 마지막 왕이라 하나

풍왕까지 하면 백제 마지막 왕입니다)

백제 부흥운동을 일으켰는데


귀실복신은 백제 부흥운동의 주도권 때문에

도침을 죽였고

이에 풍왕은 귀실복신을 제어하지 못하고


(아무리 왕이라지만

귀실복신에 의해 왕위에 올랐기도 하고

괜히 나서다가 자신의 존망도 위태롭게 되기에,,)풍왕은

정치적 입장보다는 조용히 제사(기도)만 주관하게 됬습니다,,


<라봉봉>조선 건국왕 태조 이성계가 고려말 신흥세력 중

무관인 신흥무인의 대표로

강력한 무력으로 일어났다면

그의 건국 동지였던 정도전은 신흥세력 중

문관인 신흥사대부의 대표로서

이성계의 신흥세력 집단의 머리,브레인 역활을 했는데


백제 부흥운동가 귀실복신도 장수 출신인것을 보아서는

혼자 일어난게 아니라 백제 승려 도침과 같이 일어났는데

도침은 승려출신인것으로 봐서 보통 무예보다는

귀실복신이 백제 부흥운동군을 이끌때

그곳의 정신적 지주,군사참모나 지략가 역활을 했던거 같습니다


이러한 사례는 역사에서 여럿 찾아볼 수 있는데

신라 29대왕 태종 무열왕 김춘추는 관료, 외교관 출신이었는데

그의 평생의 친구이자 한국사 위인인 신라 김유신 장군은

신라 군사들을 통솔하며 그의 정치적 동지이자 든든한 친위대가 되었고

반대로 김유신 장군 역시 신라국왕이 된 김춘추, 태종 무열왕 덕분에

가야계 출신임에도 신라 최고위직까지 오르며 삼국통일의

주역이 되었고

조선시대 임꺽정과 그의 참모였던 서림 역시

이후 서림이 뒤통수를 치기는 하나,, 무 武 와 문 文 서로 부족한 것을

보완해주는 관계였고 실제로 사람은 이런 서로의 부족한 능력때문에

사회를 만들고 유지해 나가게 되는데


이러한 경우들은 신라 김춘추,김유신이나

조선 이성계, 정도전이라는 인물들같이

서로 끝까지 믿음과 의리가 있으며(정도전은 이후 이성계의 아들이자

이후 조선 3대왕 태종 이방원의 왕자의 난으로 사망하기는 합니다,,)

서로의 도움이 되는 시너지 효과로 작용하기도 하고


조선 도적이자 의적으로 유명한 임꺽정과 그의 참모 서림 혹은

이 이야기의 인물들인 백제 부흥운동가 귀실복신과 도침은

서로가 끝까지 믿음과 의리있는 행보를 보이지 못했고

서로에게 역 시너지 효과로 작용했고


귀실복신도 같이 일어났을때의 동지였던

승려 도침을 죽이고나서부터

백제 부흥세력의 신뢰를 크게 잃었을거 같고

또 백제 부흥세력도 도침이라는 정신적 지주를 잃게 되자

비록 홀로 남은 귀실복신이 이끄는

백제 부흥군이 군사적으로는 강대했을지 몰라도

예로부터 전쟁은 총칼로만 하는것은 아니었기에,,

이때부터 백제 부흥운동 세력은

점차 스스로 무너지며 자멸하게 된거 같습니다,,


<귀실복신의 죽음>


그렇게 귀실복신은 초기 백제부흥운동군의

승리에 도취되서였는지 혹은 권력욕 때문이었는지

같이 일어났던 정치적 동료였던 승려 도림을 죽이게 됬고

백제왕 부여풍, 풍왕 역시 그(귀실복신)의 눈치를

보는 상황까지 오게됬고


백제 귀실복신 등은

당나라 장수 유인원 등이 성이 고립되서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사람을 보내서 위로하면서 말했습니다


<귀실복신이 보낸 사람>대사 大使 (국가를 대표해서 외국에

파견되는 사절의 대표)는 언제 서쪽(중국, 당나라)으로

돌아가려 하는가 ?


그때 우리(백제)가 사람을 보내 전송하여 주겠다


(당나라 용삭) 2년 7월에

유인원,유인궤 등이 웅진 동쪽에서

귀실복신의 남은 군사를 대파하고

지라성 및 윤성, 대산, 사정 등의 목책(목책은 나무 울타리,

나무 방어벽으로 백제의 전통적인 방어수단이었습니다)을

함락시켰는데


군사를 죽이고 사로잡은 것이 매우 많았으며

군사들을 나누어 그곳에 계속해서 주둔시키고

수비하게 했습니다


귀실복신 등은 진현성이 강가에 있으며,

높고 험하여 요충지로 적당하다고 판단해서

군사를 증파해서 그곳을 지키게 했습니다


<귀실복신>끄응,, 도침이 있었다면

무슨 좋은 지략을 내놓았을 것인데 ㅡㅡ ;;


유인궤가 밤에 신라 군사를 거느리고

성에 가까이 접근해서

새벽에 입성해서

8백명의 목을 베어 죽이니

마침내 신라에서 오는 군량 수송로가 소통되었습니다,,


유인원이 증원병을 요청하니

당나라에서 조서를 내려서

치주, 청주, 내주, 해주의 군사 7천명을 징발하고

좌위위 장군 손인사에게 이 군사를 주어서

바다를 건너서

유인원의 군사를 보충하게 했습니다


이 때 귀실복신은

이미 (백제의) 권력을 독차지 하여

풍왕과 서로 질투하고 시기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풍왕이 귀실복신에 의해서 왕위에 올랐다지만

풍왕 역시 백제 왕족으로서 왜[일본]에 여러 기반,세력이 있었다거나

백제 왕으로서의 정통성 등은 있었을 것이고

어쨋든 귀실복신도 고구려 연개소문같이 반정으로

기존 구세력들을 모두 죽이고 지도자격이 된 것은 아니어서

풍왕 역시 귀실복신이 사실상 왕과 다름없이 행동하는 와중에도

기회를 기다리며 나름 국왕으로서의 행보를 보이려 했던거 같습니다,,)


귀실복신은 병이 들었다는 구실로

굴 속에 누워서

풍왕이 병문하러 오기를 기다려서

풍왕을 죽이려 했습니다,,


풍왕이 이를 알고

심복(믿을만한 부하,,)들을 거느리고

귀실복신을 급습해서 죽였습니다,,


<라봉봉>귀실복신이 죽기전 기록은 일본 기록 '일본서기'에

자세히 남아있는데,,


-일본서기-

백제왕 풍장(풍왕)이 복신의 모반할 마음을 의심하여

가죽끈으로 손바닥을 꿰어 결박하였다.

그러나 풍장은 자기로서는 처단하지 못하고 망설이다가 신하들에게


<풍왕>복신의 죄는 이미 이와 같다.

참할 것인가 않을 것인가


하고 물었다.


달솔 덕집득은


<덕집득>이와 같은 악역자를 방치하여서는 안됩니다


고 말하니

복신은 집득에게 침을 뱉고


<귀실복신>이 썩은 개 못난 노예 (腐狗癡奴) 같은 놈아


하고 말하니

왕은 건아(건강하고 씩씩한 사나이

라는 뜻 같습니다)를 소집하여

복신의 목을 베고 소금에 절였다


-일본서기 천지 2년 [663년] 6월-


라고 나오고,, 백제 욕,당대인의 분노까지 기록,느껴질 정도로

매우 처참하고 자세해서

저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일본 국가주의 판타지를 거르며 본다면

충분히 백제사 연구에는 믿을만한 자료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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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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