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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백강 전투는

백제,왜 연합군의 참패로 끝나게 됬고

백제 부흥운동 세력이 세운 왕이었던

백제 마지막 왕 부여풍,풍왕은 그렇게

탈출해서 도주했고 혹은 고구려로 도망갔다고 합니다,,


왕자 부여충승과 부여충지 등이(의자왕의 아들들이라고 합니다)

부여풍(풍왕)의 군사를 거느리고

왜국 군사들과 함께 항복하고

백제 부흥군 장수 지수신이 혼자 남아 임존성에서 버티며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 (백제 인물)흑치상지가 도망해서

흩어진 (벡제)무리들을 모으니

열흘 사이에 따르는 자가 3만명이었습니다


(당나라 장수)소정방이 이들을 공격하니

(흑치)상지가 이들과 싸워서 승리하고

다시 2백여 성을 빼앗으니

소정방이 이길 수 없었습니다


흑치상지는 별부장 別部將 (관직으로 한자 해석으로는

특수 別 무리 部 장수 將 인데 특공대,별동대 대장 같습니다)

사타상여(흑치씨인 흑치상지와 마찬가지로

2글자 성인 복성인데 사타씨는

사씨,사탁씨,사택씨쪽 같습니다 )를 데리고 험준한 곳에서

웅거 雄據 (일정한 지역을 차지하고 굳게 막아 지키다)해서

복신(백제 부흥군 지도자)과 호응하다가

이 때(백강 전투로 풍왕의 도주와 백제 왕자들의 항복 이후

백제 부흥군은 사실상 임존성 하나만 남았을 때)에

이르러 모두 항복했습니다


(즉 백제 장수 지수신은 끝까지

임존성에서 버티나

백제 장수 흑치상지와 사타상여는

백강 전투 이후 백제부흥군이 기울자

당에 투항했던 거로 보인다고 이야기 됩니다,,)


(당나라 장수)유인궤가 그들(흑치상지,사타상여)에게

진심을 보이면서

그들로 하여금 임존성을 빼앗아 그들 자신의

성의를 나타내는 기회를 갖게 하려고

갑옷과 병기, 군량 등을 주었습니다


(유목민족인 선비족이 중국에 세운 나라인 당나라는

유목민족 특유의 실리적인 기풍으로 당대에

최강대국으로 거듭났고 당나라에서는 외교 방법으로

이이제이 以夷伐夷 전략을 자주 사용했는데

이이제이는 '오랑캐의 힘으로 오랑캐를 제압하다' 라고 할 수 있고

즉 투항한 백제 장수 흑치상지와 사타상여는

백제인으로서 백제의 내부사정, 길과 지리를 잘 알것이니

당나라에게 항복한 백제인으로 하여금

백제 부흥운동군을 치게 하라는 전술을 사용했다고 할 수 있고

고구려 멸망때에도 당나라는 연개소문의 아들인 연남생을

향도,길잡이로 삼아서 고구려를 멸망시켰고

이이제이 전술은 역사적으로 되게 야비하면서도

오늘날까지 자주 응용되는 [내부 포섭 등]고전적인 전술이었다고

할 수 있고,,


이런 고전적인 전술들은 몇가지 더 써보면

원교근공 遠交近攻 [먼나라와 친하고 가까운 나라를 공격하며

점차 영토를 넓힘] 으로 야금야금 영토를 넓히는 방법,

미인계 美人計 [아름다운 사람, 보통 여자였으나 응용되면

남자로도 가능했겠고 즉 미인을 미끼로 삼아

적을 유인하거나 공격하는 방법]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의외로 이런 고전적인 방법들은 오늘날에도 자주 사용되고 있다고

하는거 같습니다)


(당나라 장수)손인사가 말하기를


<손인사>그들(흑치상지,사타상여)은 야심이 있어서

믿기 어렵다

이는 그들에게 도적질을 할 방책을 제공하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당나라 장수)유인궤가 말하기를


<유인궤>내가 (사타)상여와 (흑치)상지를 보니

그들에게는 *충심 衷心 과 지모 智謀 (슬기로운 꾀)가 있다

그들에게 기회를 주면 공을 세울 것이니

무엇을 의심할 것인가 ?


(*충심 忠心 충성스러운 마음,

백제인 흑치상지와 사타상여가

왜 당나라에 충심까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아마도 멸망 전 백제에서 방탕한 정치로

백제 충신들의 사망 등 기존 백제에 대한 환멸감과

당대 외국인들이 모여들며 선진적인 문화가 있었던

당나라에 대한 동경심등이 어우러져 당나라에

귀화, 충성하게 된 인물들 같습니다

그러나 당나라가 아무리 열린 문화에

외국인에 열려있었던 나라였어도

결국 외국인은 외국인이었고,,

대게 당나라에서 이런 외국인들은 이이제이 전략으로

그 나라와의 전쟁때 이용하다가 이후 이용가치가 떨어지면

버리는,, 그런 방법을 사용한거 같고

백제인이었던 흑치상지 역시 이후 당나라에서 반역자로

모함당해서 옥에 갇히고 자살해 죽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들(흑치상지, 사타상여) 두 사람이

(백제부흥군 최후의 성이라 할 수 있었던)임존성을 빼앗으니

(마지막까지 저항한 백제 부흥군 장수)지수신은 처자를 버리고

고구려로 달아났으며

(백제 부흥군)잔당,, 들도 모두 평정됬습니다


(당나라 장수)손인사 등이 군사를 정돈해서 돌아가니

당나라에서는 조서를 내려서 유인궤로 하여금

그곳(백제)에 주둔해서 수비하게 했습니다


<라봉봉>틈틈히 도중에 이야기들을 썼고

보통 백제 말기 장수로 흑치상지라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많지만

결국 그는 끝까지 백제 부흥군을 이끌지 못하고

도중에 당나라에 항복하고 이후 당나라에 이용되다 버려진 장수가 됬고,,

이에 그의 인생사에 대한 이야기가 많으나


아무래도 상대적으로 끝까지 임존성을 지키며 백제 부흥군을 이끌었던

백제 장수 지수신에 대한 이야기는 흑치상지에 비해 적고,,

이에 지수신 장군은 조선시대 남효은,안정복에게 절개를 지킨 충신으로

조명받았지만 크게 알려지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물론 백제 말기 상황과 백제 부흥군 세력의 상황도

워낙 잘못된게 많았던 상황,

요즘말로 노답이어서,, 백제인 흑치상지나 사타상여가

당나라로 귀화하는 이유가 됬겠으나

어찌됬건 그들 역시 백제인들을 이끄는 장수였고

권력에는 책임이 따르는데

결국 흑치상지와 사타상여는 당나라군으로,

지수신 장군은 끝까지 싸우다 (처자를 버리긴 했지만,,)

동맹국인 고구려로 도망가게 됬다고 할 수 있고


실제 흑치상지는 당나라에서도 활약하며

이후 당나라에서 모함을 받고 자결하는데

나름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고

능력자체는 있었던 인물이라고 보여지기에

이야기가 되는거 같고


이에 비해 끝까지 백제인으로서의 절개를 지켰다고

할 수 있는 지수신 장군은

별다른 이야기가 없고

실제 지수신 장군이 흑치상지에 비해

능력적인 면에서는 많이 나타나 보이지는 않지만

적어도 지수신 장군은 백제 장수로서의 책임은 다한거 같고


이에 고구려 멸망때

당나라의 고구려 공격때 향도,길잡이,앞잡이가 됬던 연남생이

당나라에 끝까지 싸웠던 그의 동생 연남건에 비해 인지도가 더 높으나

좋은 이름으로는 기록되지 않듯이


또 조선,대한제국 멸망 때

능력은 있었다고 하나 결국 매국노로 알려진

을사오적으로 유명한 이완용이 유명하나

나라가 멸망하자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죽어간 인물들은

비록 덜 유명할지라도 의인,열사,의사(義士 의로운 지사) 등

아름다운 이름으로 기억되듯이(물론 유명한 독립운동가들도 당연히 있으나

많은 분들이 이름없이도 대한민국 독립운동에 힘쓰셨다는 의미입니다)


백제 지수신 장군은 백제왕조 700년의 계백 장군과 더불어

최후의 충신이라 해도 이상할게 없다고 생각됩니다


능력만 있고,이름만 알려진다 한들 그 이름이

아름다운 이름이 아닌 매국노 등으로 유명하다면

진정한 삶을 살았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되고

결국 지수신 장군은 인지도가 떨어졌음에도

조선시대에 다시 재조명 받기도 했고


또 지수신 장군이 고구려로 도망치기가 어려웠던게

당시 한강 유역과 아산만(충청,경기쪽) 지역을 신라가 장악하고 있었고

웅진도독부도 있었는데 어떻게 도망쳤는지와

이런 것들 때문에 옛날 삼국시대는 여러 미스터리가 있는거 같고

예전부터도 한국 삼국시대 역사를 쓰면서 느낀게

오늘날 시각과 인식만으로 당대 삼국시대를

접근하면 안된다라는 생각을 자주 한거 같습니다,,


하여튼 오늘날까지도

흑치상지에 대한 인물에 대해 여러 말도 많고

탈도 많은데

이에 비해 적게 이야기가 되는 지수신 장군이지만

백제의 의로운 인물, 의인이었다고 생각되고


백제 말기의 여러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는

이후 자세히 해야될거 같습니다,,


별개로,,

삼국 통일기는 신라에게는 영광의 시기이기도 했으나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동족상잔 同族相殘 (같은 겨례,동족,민족끼리 서로 해침)의 비극과

중국 당나라의 개입으로 이렇게 치욕적인 이야기들도 있기에

되게 슬픈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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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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