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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와 신라의 맹세 취리산 맹세>


그렇게 백제 부흥군 최후의 장수 지수신 장군은

당나라에 투항한 백제 장수였던 흑치상지와 사타상여의 공격으로

고구려로 달아났고

당나라군은 백제에 주둔하게 되었습니다


전쟁의 여파로

(백제의) 집집마다 영락 零落 (세력이나 살림이 줄어들어 보잘것없이 되다,

비슷한 말 몰락,쇠락)하고

시체가 풀더미처럼 쌓여있었습니다


당나라 장수 유인궤가 이때 처음으로 명령을 내려

해골 骸骨 (죽은 사람의 뼈)들을 묻고

호구를 등록하며

촌락을 정리하고

관리들을 임명했습니다


또한 도로를 개통하고

교량을 가설하고

제방을 수축하고

저수지를 복구하며

농업을 장려하고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고

고아와 노인을 양육하게 했으며


당나라의 사직을 세우고

정삭과 묘휘(정삭과 묘휘는 당나라 달력과 당나라 왕의 이름으로

당나라의 제도를 의미한다고 보면 됩니다)를 반포하니


백제 백성들이 기뻐하여

각각 자기 집에 안주하게 됬습니다


(김부식님이 삼국사기를 쓰실 때

부족한 부분들은 중국 역사서를 참고하셨기에

이런 중국 중심 기록들이

여럿 있는거 같습니다

근데 이당시 중국 당나라는 초강대국이었고

당대의 기록들을 완전히 거짓으로 볼 수는 없으나

백제인들이나 고구려인들이 그나마 같은 동족이었던

신라인들에 비해 언어도 통하지 않았고

또 백제,고구려 멸망 후 수많은 사람들이

중국 당나라에 끌려가는 상황에서

또 백제 부흥군의 항전 등이 있었기에

백제 백성들이 기뻐했다는

저 기록이 꼭 맞다고는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당나라 임금이 부여융(의자왕의 아들, 여러 논란이 있으나

정황상 백제 마지막왕[풍왕을 제외하면,,] 의자왕의 첫째 아들이자

의자왕의 태자라고 합니다)을

웅진 도독으로 삼아서

(당나라에서 백제로)귀국하게 해서

신라와의 오래된 감정을 풀고

나머지 무리들을 불러오게 했습니다


인덕 (당고종의 세번째 연호) 2년 (665년)

부여융이 신라왕(신라 30대왕 문무왕)과 웅진성에서 만나서

흰 말 白馬 (백마)을 잡아서 맹세했습니다


그렇게 백제 마지막 태자(여러 이야기가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마지막 태자라 볼 수 있겠습니다) 부여융은 신라 30대왕 문무왕을 만나서

백마를 잡아 맹세를 하게 됬습니다,,


그 다음 기록에는,,


<김부식>(당나라 장수)유인궤가

맹세하는 글을 지었으며

이것을 금 金 으로 새기고,

무쇠로 책을 만들어서

신라 종묘(왕실 사당) 안에 두었는데

이 맹세의 글은 '신라기(삼국사기 문무왕 기록)'에 보인다


라고 기록되있는데

삼국사기 문무왕 기록에 자세히 나와있는데

그 내용은,,


(백제 태자 부여융은) 이때

흰 말을 잡아 맹세했는데

먼저 하늘과 땅의 신,

그리고 강과 계곡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그 다음 순서로 입에 (백마의) 피를 발랐다


그 (당나라 장수 유인궤가 쓴) 서약문은 다음과 같았다


<서약문>지난 날

백제의 전 임금(의자왕)이

역리와 순리를 분간하지 못하고,

이웃나라와 좋게 지낼 줄 모르고,

인척간에 화목하지 못하면서

고구려와 결탁하고

왜국과 내통하여

그들과 함께

신라를 침략하여 성읍을 약탈하니

편안한 해가 거의 없었다


천자(天子 천자 = 황제 = 당나라 황제)는

물건 하나라도 제자리를 잃는 것을 가슴 아프게 여기고

죄 없는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

여러차례 사신을 보내서

화친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지리가 험하며 거리가 먼 것을 믿고

하늘의 법칙을 업신여기므로

황제가 대노(크게 화남)하여

백성들을 위로하는 토벌을 결행하였으니

군사들의 깃발이 향하는 곳은

한 번의 전투로 완전히 평정되었다


사정이 이러한 즉

마땅히 궁실과 집터를 연못으로 만들어

이후의 세대에 경계심을 주고,

이러한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뿌리를 뽑아

자손들에게 교훈으로 보여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유순한 자를 받아들이고

배반하는 자를 치는 것은

선왕 前王 (이전 왕)의 아름다운 법도이며

망한 것을 다시 일으켜 주고

끊어진 대를 잇게 하는 것은

지난 날 성인들의 공통된 규범이었다


'모든 일은 옛날의 교훈에서 배워야 한다'


라는 말이 역사서에 전해져 온다


이에 따라 전 前 (이전) 백제의 대사가정경 부여융을

웅진 도독으로 삼아

자기 조상의 제사를 모시게 하고

그의 옛 고장(백제)을 보전케 할 것이니

신라에 의지하여

같이 우방이 되어야 할 것이며


각각의 묵은 감정을 버리고

우호를 맺어 서로 화친하여

모두가 당(당나라)의 조칙을 받들고

영원히 당의 번방으로 복종해야 할 것이다


이에 사신 우위위장군노성현공 유인원(당나라 장수)을 보내

직접 권유하고

황제의 뜻을 상세하게 선포한다


두 나라(백제, 신라)는 혼인으로서 약조를 맺어

맹세를 다졌으며,

짐승(하얀 말, 백마)을 잡아 피를 머금었으니,

언제나 함께 화목하며

재난을 함께 극복하고

환난을 구제하며

형제와 같이 사랑하여야 할 것이다


황제의 말씀을 삼가 받들어

어기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며

맹세를 마친 뒤에는

모두 함께 약속을 지켜야 할 것이다


만일 맹세를 저버리고

그 덕성이 변하여

군사를 일으키거나 무리를 움직이거나

변경을 침범하는 일이 발생한다면

신명이 굽어 볼 것이오

수 없는 재앙이 내릴 것이며

자손을 기르지 못할 것이요,

나라를 보전하지 못할 것이며

제사가 끊어질 것이요,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금서철권 金書鐵券 (금으로 새기고

무쇠로 만든 책)을 만들어

종묘에 간직해 두고,

자손 만대를 통하여 감히 어기거나 범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신령이시여 이를 들으시고

흠향(신명이 제물을 받아서 먹음)하시고 복을 베푸소서


<김부식>이 맹약문은 (당나라 장수) 유인궤의 글이다

(백마의 피를)입에 바르는 절차를 마치고

제물은 제단의 북쪽 땅에 묻었으며

문서는 우리(신라) 종묘에 보관하였다


-삼국사기 문무왕 기록에 나온 백제와 신라의 취리산 회맹-


<라봉봉>이 서약을 취리산 회맹이라고 하는데

저는 글을 쓸 당시 백마의 의식이 백제의 항복의식이라는 자료를 보고

항복의식으로 생각해서 글을 썼으나

이후 문무왕 기록을 상세히 읽어보고 자료를 찾아보니

당대 백마에 피를 바르는 '삽혈'은 중국식 주술의식이었고

당대 멸망한 백제를 다시 허수아비로 세워 신라와 강제로 맹약을 맺게 함으로서

한국을 전체 지배하려는 당나라의 야심이었고

항복서약문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글이고

당대 당나라의 강요로 맺어진 백제와 신라의 맹세라 할 수 있으나

큰 의미는 없고 대신 이로 인해 굴욕을 본 신라가 

언젠간 당나라와도 대결을 해야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라 할 수 있습니다

저도 완벽한 글을 쓰는 것은 아니고 잘못된 글이 있다면 수정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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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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