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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700년 왕조의 마지막을 알린 백강 전투>


풍왕은 그렇게 귀실복신을 죽였고 그 이후에는,,

풍와은 고구려와 왜국에 사신을 보내서

군사를 요청해서 당나라 군사를 막았는데

(나름 풍왕도 귀실복신의 죽음 이후

고구려와 왜와 연합해서 백제의 재기를 노렸던거 같습니다,,)

당나라 장수 손인사가 중도에서 이들(고구려와 왜군)을 맞아서

쳐부수고,,

마침내 당나라 장수 유인원의 군사와 합세하니

군사의 사기가 크게 올랐습니다

이에

모든 (당나라)장수들이 공격의 방향을 의논했는데


어떤 자가


<어떤 자>가림성이 수륙 水陸 (물과 육지)의 요충이므로

먼저 쳐버려야 한다


고 말하니


유인궤가 대답했습니다


<유인궤>병법에는 강한 곳을 피하고

약한 곳을 공격해야 한다고 하였다


가림성은 험하고 튼튼하므로

공격하면 군사들이 상할 것이요

밖에서 지키자면 날짜가 오래 걸릴 것이다


주류성(귀실복신과 승려 도침이

처음 백제 부흥운동을 시작한 곳, 백제 멸망 후

백제 부흥운동의 본거지가 됬던 곳)은 백제의 소굴로서

무리들이 모여 있으니


만일 이곳을 쳐서 이기게 되면

여러 성은 저절로 항복할 것이다


이에

당나라 장수 손인사, 유인원과

신라왕 김법민 (신라 30대왕 문무왕의 이름)은

육군을 거느리고 나아가고


유인궤와 별수(관직명 같습니다) 두상(사람 이름)과

부여융 扶餘隆 은 수군과 군량 실은 배를 거느리고

웅진강으로부터 백강(주로 금강으로 이야기됩니다)으로 가서

육군과 합세해서

주류성으로 갔습니다


(부여융은 백제 의자왕의 아들인데 어느새

신라와 당나라군의 편에서서

백제 부흥군 탄압에 협조하는 입장이 됬습니다,,

고구려 실권자였던 연개소문 사후 연개소문의 아들

연남생이 당나라의 편에서서 당나라군의 길잡이,향도가 됬고

연남생의 동생 연남건이 끝까지 맞섰듯이

의자왕의 아들들인 부여융과 [무왕 아들설도 있으나

보통 의자왕의 아들이라는]부여풍은

한쪽[부여융]은

백제 부흥운동을 탄압하고

한쪽[부여풍]은

백제의 마지막 왕이 되서

백제 부흥운동을 이끌게 된 형제가 갈라져서

싸웠다는 것은 고구려와 백제가 서로 비슷하고

실제 고구려와 백제는 서로 부여의 후예이기도 했고

서로 비슷한 풍토와 기풍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백강 白江 어귀에서

왜국(일본) 군사를 만나서

네 번 싸워서 모두 이기고

그(왜국)들의 배 4백척을 불사르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로 오르고

바닷물도 붉은 빛을 띄웠습니다


<김부식>이 때 왕 부여풍(풍왕)은 탈출해서 도주했으므로

거처를 알지 못하게 되었는데

어떤 사람은 고구려로 달아났다고 말하기도 한다


당나라 군사들이 그(풍왕)의 보검을 노획(획득)했습니다


<라봉봉>백제 부흥운동의 종언 終焉 (마지막)을 알린

백제 마지막 대전투라고 할 수 있었던

백강전투 白江戰鬪 는 일본에서는 백촌강 전투,

중국에서는 백강구 전투라 불린

고대 동아시아의 대전쟁으로

백강전투에서는 백제+왜 vs 신라+당나라 의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 전투에서 신라+당나라 연합군, 나당연합군이 승리하면서

3년전에 의자왕이 항복하면서 멸망한 백제의 잔존세력까지

사실상 완전히 소멸됬다고합니다,,


백강 전투는 한국에서는 물론 큰 사건임에도

크게 이야기되거나 하는 것은 적은 반면

일본에서는 중요하게 다루는 사건으로 보이는데

실제 한국사적으로도 당대 비록

백제가 이미 무너질대로 무너져가던

나라였고 또 백제와 왜의 연합군이

신라와 당나라의 나당연합군보다 여러 방면으로

미약했을지언정 백제의 멸망은 곧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신라를 견제해 줄 세력의

사라짐으로 인해 고구려는

옛날보다 더 어렵게 서쪽의 당나라와 남쪽의

신라를 상대해야 됬고

고구려의 멸망이 가시화된 사건이었다고 합니다,,

즉 백강전투는 동아시아, 한국 삼국의 운명을 바꾼

세계사적 대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백강전투는 왜에서 대규모의 지원병력을 보내왔음에도

(역시 왜는 당대에 한국,중국과 격차가 있었고

질적 열세였는지,,[왜군의 질적 열세는 특히 저의 생각입니다])

허무하게 백제와 왜군의 패배로 끝나게 됬으나


오늘날 이야기 되는 바로는 그럼에도

도대체 왜 왜 倭 에서 백제를 돕기위해

그것도 수천도 아닌 수만의 (27000~42000명 이라고 합니다,,)

군사와 병선 1000척이라는 거대한 규모의 군사를 보내왔냐고

이야기 되는데(왜에서도 사활을 건 총력전이라 할 만큼

무리해서 보낸 군사라 합니다,,)

그만큼 왜에게는 백제가 단순히 동맹국이나

우호국 그 이상의 나라였음이라 이야기 된다고 하고

왜에는 이미 자리잡은 백제인들이 자손을 낳고

대대로 살고 있었기에 자신들의 본국(백제)이 위험해지자

전력을 다해 백제에 구원군을 보낸것이라 할 수 있고


이에 백제가 망하면 나당연합군이 왜로 오기에

당군을 막기위해 도왔다는 이야기도 있고(이는 맞는 말입니다)

일본 사학계에서는 식민사관으로 한국 지배를 위해서였다는

엉뚱한 이야기도 했으나(일본학계는 과학분야에서는

발달한게 많으나 역사분야에서는 이런 주장들이

정설화,주류화 될 정도로 오염된게 많습니다,,)


아무래도 저는 여러 기록과 자료를 토대로

왜에게 백제는 단순히 동맹,우호국 그 이상의 의미로

백강전투는 본국(백제)을 지원하기 위한

명운을 건 대규모 파병이라고 생각됩니다


실제 백제의 다른 이름이 일본 日本 이었고

(예군 묘지명[비석] 자료)

백강전투 이야기는 이후에 자세히 해야 할 것인데

요즘은 현재 또 유물,자료들이 더 발견,이야기 되면서

점차 백제는 일본의 원조,원류였다는

이야기들이 확실한 사실로 변하는 추세가 되고 있습니다,,


일본측에서도 백강전투는 특히

일본이 중국과 정규군이 충돌하여 전쟁을 벌인 첫 전투이며

또 일본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백제멸망을 알린 전투였기에

나름 자세히 이야기 되는 거 같고


특히 백제 멸망시기는 일본측 기록에 많이 남아있고

일본측 기록이 상세한 기록이 많고

실제로도 정확한 기록들이 많다고 생각되기에

이후 해야겠습니다,,


저도 현재는 중심 이야기 위주로 하고있기에

보충되는 이야기는 추후에 틈틈히 할거고

백제는 기록,유물들이 특히 넓게 퍼져있기에(한,중,일)

틈틈히 추후에 이야기들도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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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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