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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초나라 석궁 저격수의 활을 가슴에 맞은 유방은 이후

치료를 받았고 한신의 군단은 제나라를 격파했는데

당시 제나라를 정복하며 크게 세력을 키운 한신은

유방 세력에서 독립할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유방과 항우는 서로 지쳐있던 상황이라

일단 천하(=중국) 양분을 결정하며

서쪽은 유방 동쪽은 항우가 차지하기로 하며 화친하며

항우는 포로로 잡은 유방의 아버지와 부인 여치를 돌려보냈고

 

화친한 항우가 팽성으로 돌아갈때 유방은 다시 군사를 모아서

돌아가는 항우를 급습합니다 (;;)

 

당시 유방은 한신과 팽월에게 군사를 보내라 했지만

한신과 팽월은 이익이 없다 생각해 군사를 보내지 않았고,,

결국 한군은 홀로 싸우다 초군에 무너졌고

이에 유방은 장량의 조언을 따라서

화를 참으며 한신과 팽월에게 봉지를 넓혀준다 약속하자

한신과 팽월은 한나라 군에 합류했고

이로인해 다시 한군이 초군에 대해 유리한 상황이 되자

다른 제후들까지 유방군에 합류했고

결국 한군은 초나라 수도 팽성을 함락시킵니다

 

결국 유방연합군(+한신)은 30만 대군으로 항우를 뒤쫓았고

해하에서 초한전쟁 마지막 전쟁 '해하전투'가 벌어졌습니다

대결 구도는 중국의 천재 군사전략가로 불리는 한나라의 한신과

중국사에서 가장 강력한 무장 이미지가 있는 초나라 항우의 대결구도로 이어졌고

(역사게임에서도 두인물은 지능쪽이나 무력쪽이 거의 만렙을 찍는 인물들입니다,,)

 

한나라 전략가 한신은 해하에서 거대한 30만대군을 통솔하며

초나라 항우를 포위하며 무너트렸고

항우의 10만군사중 8만이 목이 베어졌는데,,

항우는 2만 병사와 이도저도 못가는 신세가 됬고

이때 초나라군을 포위한 한나라군은 초나라군의 사기를 떨어트리려

사방에서 초나라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에 사면초가 四面楚歌 (사방에서 들려오는 초나라 노래 , 적에게 둘러쌓여

고립된 상태) 라는 사자성어가 생겼습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초나라 노래에 당황한 항우는,,

 

<항우>초나라는 이미 한나라의 유방에게 넘어갔다는 말인가 ?

어찌하여 외부의 적보다 초나라 사람들의 수가 저렇게 많은가?

 

마음이 복잡해진 항우는 그를 늘 따라다녔던 애첩 우희(우미인)와 술을 마시며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항우의 해하가)

 

<항우의 해하가>

역발산혜기개세 力拔山兮氣蓋世

힘은 산을 뽑고 기개는 온 세상을 덮었지만

 

시불리혜추불서 時不利兮騅不逝

때가 불리하니 추(여포의 적토마같은 항우의 애마 오추마)마저도

달리지 못한다네

 

추불서혜가내하 騅不逝兮可奈何

추마저 달리지 않으니 나는 어찌 해야 하는가

 

우혜우혜내약하 虞兮虞兮奈若何

우희여 우희여 ! 그대를 어찌 하면 좋은가 ?

 

우희 역시 항우에게 답가를 했는데

결국 패왕 항우가 눈물흘렸고 항우의 눈물을 본 사람들도

눈물을 흘리며 차마 항우의 얼굴을 바라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우희 앞에서 통곡하는 항우 , 이 당시 사건을 소재로 중국 연극 '경극' 인 '패왕별희' 가 만들어졌습니다

 

초패왕 항우는 그날밤 말을 타고 800 정예군으로

한군의 포위를 뚫고 도망쳤고

한군은 추격을 시작합니다

간신히 항우가 빠져나오자 항우에게는 28명의 병사만이 남았고

이후 항우는 28명의 병사들과 함께 한나라군 1000명을 죽이고

항우군은 2명이 전사했는데 이후 26명의 병사들과 한나라 병사들과 맞서다가

한나라 편에 선 자신의 옛부하를 보자

 

<항우>유방이 내 목에 천 금과 만 호를 걸었다는데 그 은혜를 베풀겠노라 !

 

하고는 자살했습니다,,

 

역발산기개세로 불리는 인물이자

중국역사의 처음이자 마지막 패왕 霸王 인 초패왕 항우는 그렇게

사망했고 이에 유방은 다시 중국을 통일합니다

 

유방은 곧 한신의 군권을 기습적으로 빼앗았고

'황제' 에 즉위했습니다

 

한나라 1대황제 한고조 유방

 

그렇게 중국 역사 한나라 왕조가 시작됬고

 

한고조 유방은 이후부터는 적당히 부역을 면제하며

전후 복구에 힘썼고

전쟁이 끝나자 전쟁때 공을 세운 공신들을 하나둘 숙청합니다,,

당시 한신은,,

 

<한신>사람들이 

 

'교활한 토끼가 죽으면 영리한 사냥개는 삶겨지고 ,

날던 새가 떨어지면 잘 드는 활은 광에 들어가고 ,

적국을 깨뜨리면 계획을 꾸미던 신하는 죽는다'

 

라고 하던데 정말 그렇구나

이미 천하가 평정되었으니  나도 마땅히 삶겨 죽겠군

 

(토사구팽 兎死狗烹 사냥하러 가서 토끼를 잡으면

사냥하던 개는 쓸모가 없게 되어 삶아 먹는다는 사자성어로 유명한

한신입니다)

 

한신 역시 한때 유방에 반항한 댓가로 또 처세를 잘 하지 못해

숙청됬고 여러 신하들이 숙청됬습니다

 

한고조 유방은 신하들에게는 엄격했지만 백성들에게는 관대한 편이었고

이러한 정책은 이후에도 이어집니다

 

황제가 된 한고조 혹은 한고제 유방은

백성들에게 익숙했던 옛 주나라의 봉건제와

신식 제도이지만 잔혹한 진나라의 제도였던 군현제를 적절히 융화해서

'군국제' 를 실시하는데 이후 한나라 7대황제 무제가 군현제를 확립시키기 전까지

나름 과도기적인 제도였다 할 수 있습니다

 

군국제(왼쪽)와 군현제(오른쪽)

 

또 한고조 유방은 옛 백수건달 출신의 황제답게

부하(신하)들 역시 백수건달 출신들이었는데,,

유방이 중국을 통일하고 한나라 황제가 되자

그의 부하들도 연회석에서도 서로 술에 취해 칼을 뽑고 공을 다투며

싸워댔고,,

 

그러다 유방은 신하의 조언에 따라 그전까지 그토록 싫어했던 유교를

국가적 통치 이념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동안은 전쟁과 혼란의 시기라 예보다는 말을 타고 칼을 싸우는 형식이었다면

전쟁이 끝나자 계속해서 말을 타고 칼차며 정치를 할 수는 없었고

나름 예법의 중요성을 깨달은 유방이었습니다

그는 항상 부족함이 있었음에도 주변 사람들의 충고에 귀기울인 인물이었고

강력했으나 자신의 힘만 믿고 자만한 항우와 반대되는 성향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한나라 유방은 한 건국후

군국제를 시행하고 공신들을 숙청하고

유교를 국가 통치이념으로 받아들였으나

오랫동안 가혹했던 진제국의 통치와 전쟁에 고통받았던 백성들에게는

간섭을 줄이는 등 도교적인 입장을 취했습니다

유방 사망후에는 유방의 부인 여치가 권력을 잡고 여황제로 행세했는데

평소 여색을 밝힌 유방의 첩을 질투해 잔혹하게 죽이고 또 유방에 뒤를 이어

역시 공신들을 숙청했는데 대신 역시 유방같이 백성들에게는

딱히 간섭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한고조 유방은 한나라를 건국했고

이후 한나라 漢 (한) 는 꽤나 오래 이어져 중국문화의 기틀을 다진 왕조가 되었고

이에 중국어를 한자 漢字 , 중국인을 한족 漢族 이라 부르게 됬습니다

 

한자

 

이후 한나라 이야기는 뒤에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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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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